김용창 애국지사 추모식과 그 의미
광복회 화성시지회는 지난 11일 화성시 향남읍 상두리 김용창 애국지사 추모 동산에서 관계자들과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열었다.
매년 6월에 열리는 추모식이지만, 연례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를 거듭할수록 그 의미가 더욱더 되살아나게 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올해도 이와 같은 고귀한 희생정신이 대한민국을 넘어 지구촌 평화에 이바지하는 평화와 화합의 정신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그 방안을 모색했다.
일제의 만행이 더욱더 극악해져 가자 목숨을 건 항일운동의 흐름도 그만큼 거셀 수밖에 없었다. 화성지역에서는 향남이 거점이 되었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으로 위기를 느꼈던 일제는 이전보다 더욱더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거세게 저항해나갔다. 이런 저항의 대열에는 너와 내가 따로 없이 한마음이 되었다. 이때 표면적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행위는 목숨을 거는 행위였다. 그랬기에 그만큼 위축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죽음도 불사하고 오직 조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헌신은 더욱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이런 애국지사들이 바친 목숨의 토대 위에서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그저 역사적 사실로만 기록될 뿐, 우리의 의식에서 점점 더 잊히고 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용서는 하되 절대로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맥락에서 애국지사들의 헌신을 국민의 마음속에 되새기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후손의 마땅한 자세다.
화성 향남 출신의 애국지사 김용창은 서울에서 고학하며 한국역사를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당시 19살이었던 김용창은 “2천6백만 동포여, 조선독립의 때가 왔다”는 유인물을 곳곳에 부착하고 배포하며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것이 발각되어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법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의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가운데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부친은 이 소식을 듣고 애끓는 마음을 참을 수 없어 1945년 4월 13일 향리에서 운명했다.
동생으로는 용무, 용걸 형제가 있으며 그들도 애국지사의 형제답게 모범적인 살고 있다. 용무씨는 지금도 가문이 500여 년을 살아온 고향 집에서 살고 있다. 그는 화성시 광복회에서도 운영위원, 화성시남부노인복지관 운영위원, ‘노노 신나라 색소폰’ 동아리 단장으로 봉사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다.
배영환 취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