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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지성 검색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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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 “미는 영원의 기쁨이라고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노래했다. 인간에게 풍성한 미의 세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미는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구원이다. (…) 인간이 지니는 보람과 가치의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다시없이 소중한 것의 하나가 미의 세계요, 아름다움의 왕국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58.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슴속에서 나온다. 인생이 깊은 것은 심장의 산물이다. 인생의 가장 성실한 것은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 가슴은 하나님의 출장소다. 가슴은 인생의 지성소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7, 아름다운 창조』, 교육도서, 1988, p.67. 이당의 미학은 다채미(多彩美)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美)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장엄합니다. 위대하고 웅장합니다.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장엄하고 웅장함에서 풍기는 미를 느끼게 합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좋아했던 이당은, 그 음악가로부터 우아미, 섬세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상적인 미의 원형을 발견하고, 조화와 균형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당은 인간이 지닌 정신의 미, 성격의 미, 인품의 미를 외형의 미, 용모의 미보다 높게 쳤습니다. 이는 성격을 닦고 인품을 기르고 심전을 풍성하게 가꾸는 데서 풍기는 향기입니다. 겉모습을 다듬고 외형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정신의 미, 인품의 미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쾌감은 무관심한 만족, 곧 직접적 이해관계나 실제적 목적에서 떠난 순수한 만족감입니다. 미에는 욕망이나 욕구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순수한 만족감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를 목적 없이 목적에 적합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미는 순수한 쾌감이자 정신적 만족감입니다. 미를 통해서 인간은 정신적 구원의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미는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미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하는 세계입니다. 해탈 아닌 해탈의 세계입니다. 이당은 여성에게서는 우미(優美, grace; Anmut), 남성에게서는 위엄미(威嚴美; dignitas)가 풍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미의 극치는 정신의 미와 관능의 미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미는 생명적이고 건강하고 영속적인 데서 드러납니다. 숭고미는 엄청나게 크고 무한한 힘을 지닌 대상에게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미적 감정입니다. 밤하늘, 망망대해, 험산 준령을 바라볼 때는 압도감을 느낍니다. 숭고함은 영원과 무한의 상징입니다. 우미는 조화와 균형, 숭고미(sublime; Erhabene)는 조화와 균형을 깬 미를 가리킵니다. 비극의 미(비참의 미, 혹은 비장미)라고 하는 것은 숭고의 감정이 고뇌나 비극과 결부될 때 느끼는 미적 감정입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구분하였습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서 정적이고 합리적인 미의 표현인 건축에 의한 조형예술의 상징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으로서 음악과 무용에 의한 동적이고 격정적, 비합리주의적 미를 나타냅니다. 이당이 미에 관해서 기술한 내용을 일별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는) 인간의 영원한 기쁨이요 행복한 도취요 순수한 만족의 쾌감이요 인생의 가장 흐뭇한 보람이요, 목적이요, 가치다.” 따라서 미는 생명적이어야 합니다. 다양함 속에서의 통일성, 질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움, 그리고 균형감 있는 생의 충일감(充溢感)을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미는 생명에 건강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생을 저해하거나 손상하는 미, 혹은 생을 피곤케 하는 미는 참된 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강하고 건전한 미의식을 가지고 생명에 기쁨을 주는 미를 탐구하고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p.5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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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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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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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46. 생은 체험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을 체험, 이해, 표현으로 본 딜타이, 힘에의 의지로 본 니체, 그리고 생의 약동으로 본 베르그손, 이들의 철학적 핵심어는 생, 삶입니다.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살 것이냐, 내용이 실(實)한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진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바탕에는 적어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유익하다는 마음(利心)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학이 실(實)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중점을 둔 철학으로 발전한 것도 삶을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실증입니다. 이당은 “무실(務實)의 반대는 부허(浮虛)요, 허위(虛僞)요, 역행(力行)의 반대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이요, 형식주의요, 외화내허(外華內虛)다. 거짓과 공리공론과 외화내허의 사회는 허약한 사회요, 그러한 생활은 허망한 생활이요, 그러한 인간은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실(實)은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이며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거짓은 속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학은 사(事), 현상, 보이는 것, 사실을 중시합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실은 넉넉함, 부강함, 민생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울 좋은 명분만 남발되는 사회에서 알짬, 알참, 꽉 참이 절실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지(知)가 아니라 행(行)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행동(pragma)과 실천에 방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두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성이 없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참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나라의 철학이자 사상의 근간이 된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38~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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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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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 “인생은 결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다.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무용(舞踊)보다도 씨름과 비슷하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한다. 특히 내가 나하고 항상 싸워야 한다. 인생은 자아를 실천하는 사명의 장소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진지한 생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생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향락이 아니고 일이요, 활동이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44. 인생에서 자기의 생명을 끊임없이 개조하는 일은 인간의 과제입니다. 삶의 개조, 혼의 개조를 부르짖은 춘원 이광수의 말처럼, 인간은 혼을 개조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생의 예술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당의 메시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축조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그것이 생의 의의입니다. 지성인은 비판적 양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대학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자신과 사물을 깊이 탐구하는 정신, 분석적으로 사고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는 정신을 지닌 지성인들이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을 넘어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개조(改造)”에 있습니다. 인간 형성과 주체(자아) 및 객체(타아)를 개조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사람, 이성적 사유, 탐구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지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의 과정에서 창조와 지성은 나란히 가야 합니다. 생은 창조적 활동이요 날카로운 인식과 성찰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배워서 자신을 교정하고 개조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 곧 자아와 인격 전체를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밭의 계발, 주체와 객체의 개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칸트(I. Kant)가 주창하는 선한 인격과 듀이(J. Dewey)가 내세우는 좋은 환경과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칸트의 도덕제일주의와 듀이의 지식제일주의의 융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체와 개조에 중심을 두는 도덕제일주의와 객체의 개조에 역점을 두는 지식제일주의 혹은 직업주의교육은 양분될 우려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앙리 베르그손과 존 듀이가 역설한 삶의 도구로서의 지성, 기술적 지성, 창조적 지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지성으로 살아가려면 객관적 대상을 조용히 바라다보는 관상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도 균형 있게 갖춰야 합니다.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 도덕적 지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건설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 대학과 사회가 모두 민주지성의 탄생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칸트는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바람직한 지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창조적 지성과 더불어 비판적 사고능력, 그리고 관조적 지성을 겸비하려는 생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p.4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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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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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삶이어야 살 가치가 있습니다
-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삶의 기본 명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갈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대해 사색을 하는 존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관해 진지한 사색을 한다.” 안병욱, 『길 道』, 자유문학사, 2005, p.38. “사색은 지성인의 특권이다. 지성인이란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자요, 살아가면서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당의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삶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사색과 생각이 먼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당은 이 시대의 크나큰 병폐는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 데 있다고 걱정했습니다. 그가 생철학자로 언급했던 슈바이처(A. Schweitzer)은 현대인의 병리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현대인은 무사상(無思想)이다. 현대인은 자기의 사상을 갖지 않는다. 그는 진리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고 진리를 희구하는 마음도 상실한 채, 그저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며 여러 가지 의견 사이를 이리저리 떠다니고 말았다. 사색을 포기하는 것은 정신적 파산 선고나 다름없다. 현대는 사색의 멸시와 사색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현대인은 매일 매일의 허다한 지식에 압도되어 정신적 자산을 상실하고, 새로운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지 못한다.” 정신적 빈곤과 사유의 빈약함은 단시간 내에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 같은 것입니다. 정신적 황폐화의 깊은 늪에 빠져서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운명(moira)을 짊어질 힘도 없습니다. 운명은 말 그대로 각자가 마땅히 수용해야 할 자기의 몫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합니다. 자기 몫을 곰곰 생각하며 자신의 생에 대해 감사와 인내로 대하는 것 또한 생의 지혜입니다. 니체가 운명애(amor fati), 곧 운명을 사랑하라고 한 것은 자기 생의 몫을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이 왜 이 지경인가. 이렇게 물어보았자 운명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좌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의 질곡과 난관을 넘고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는 것 또한 인간의 몫입니다. 맹자(孟子)는 이것을 변론합니다. “하늘이 앞으로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고 할 때 반드시 그이의 심지를 괴롭게 하고 뼈마디를 수고롭게 하며, 몸을 굶주리게 하고 신세를 가난하게 하며, 그가 무엇을 하면 하려는 바를 망쳐서 불안하게 한다. 이것은 그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하며 내성을 길러서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是故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맹자, <고자> 하 15; 『孟子』, 박경환 옮김, 『맹자』, 홍익출판사, 2005, p.316. 참조) 생은 단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없이 소중하고 엄숙합니다. 이 땅에 수많은 생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중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성찰과 인종(忍從)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늘 한탄하며 자신의 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생의 무게를 대신 짊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입니다. 내게 주어진 생은 나의 몫이요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생을 성찰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입니다. 나의 생은 내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지상의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생의 몫을 신에게 지울 수도 없습니다. 나의 생은 오직 창조적으로 만들어 가야 할(poiesis) 나만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생에 대한 성찰과 사유는 필연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천분(天分)이요, 생에 대한 예의입니다. 안병욱, 『길 道』, 자유문학사, 2005, pp.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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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하는 삶이어야 살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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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조화와 화목의 자리가 중용입니다
-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타락한 시장사회의 원리가 작용한다. 불성(不誠)과 불화(不和)가 지배한다. 부패한 상인 정신이 휩쓴다. 나의 이(利)에 눈이 어두워 남을 수단으로써 이용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조우(遭遇)가 있었다. 상호 불신 속에 인간적 화목을 잃었다. 불의(不義)의 재(財)를 탐내고 부정의 이(利)에 혹하여 양심이 마비되고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곧은 마음과 바른 정신을 잃었다.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망각한다. 속임수와 권모술수가 성행한다. 타인을 나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다.” 안병욱, 『빛과 생명의 안식처』, 삼성출판사, 1979, pp.22-23.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인식론적 확신과 존재론적 명석판명(明晳判明)함(clara et distinct; 나의 의식에 분명히 현존하기에 부인할 수 없고 다른 지식과 명확히 구별됨)은 ‘우리는 존재한다’는 관계적 명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나는 너를 통해 존재하고 너는 나로 인해서 존재인식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당은 이렇게 ‘나’와 ‘너’가 만나는 그 마당을 사회라고 말합니다. ‘나’와 ‘너’가 만나는 곳이 공동체적 장(community)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게 정성을 다하듯이 타자인 너에게도 정성을 다하는 생의 성실성이 요구됩니다. 너에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언어적 행동, 행위적 행동, 노동적 행동, 사유적 행동 등 행동이라는 실천적 모습으로 모든 존재자와 조화(調和)와 화목(和睦)을 이루어야 한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더욱이 인간이 ‘수신(修身)’에서 ‘평천하(平天下)’, 곧 자기 자아가 세계로까지 확장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평화·조화·화목의 조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당이 상호존중이나 상호존경을 위한 수신(修身)에서 경(敬)보다 앞서는 것이 성(誠)이라고 말한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모름지기 세계로 속절없이 내던져진 ‘나’는 모든 ‘너’라는 존재와 적절하고 조화롭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존중과 존경을 받기 위한 합당한 인격체로 서 있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성(誠)이 화(和)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세계’와 ‘나’라는 존재 말고도 수많은 또 다른 ‘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和)는 서로 사랑이요 서로 나눔을 이룸으로써 비폭력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존엄하고 소중한 것처럼 ‘다른 나’ 곧 타자(타자, alter ego)도 존엄한 존재요 존중 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이당은 사람의 사람다움은 “화의 원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격적 존경과 존중의 바탕은 화(和)에 기반을 두어야 비인격, 비인간으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획일주의, 전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한쪽만의 정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통제하는 사회를 넘어서서 각 인격체의 개성을 존중하는 ‘너’와 ‘나’가 되어야 합니다. 중용(中庸)은 화이부동(和而不同)입니다. 이에 이당은 “모두가 동(同, 같다)할 필요는 없지만, 화(和)할 필요는 있다”고 말합니다. 명언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상호 존중, 상호 존경, 상호 인정이 살아 숨 쉬는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성(誠), 경(敬), 화(和)의 철학적 체계가 중용(中庸)의 정신으로 정착되어야 비로소 인간은 서로 수단의 존재, 사용의 존재, 불신의 존재가 아니라, 참된 인간적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병욱, 『빛과 생명의 안식처』, 삼성출판사, 1979, pp.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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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조화와 화목의 자리가 중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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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권의 위대한 책입니다
- “인생은 양의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질이 중요하다. 길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깊이가 중요하다.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인생이라는 위대한 책이 내 앞에 놓여 있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2』, 자유문학사, 1997, p.62. [타임즈코리아] “인생은 독서다”라고 이야기하는 이당의 철학적 혜안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 줍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한 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귀하고 소중한 그 책을 정작 저자 본인이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겉장만 쳐다볼 뿐 새겨진 글자를 읽지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책장을 덮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하르트만(N. Hartmann)이 말한 것처럼, 전경(前景)만 관조할 뿐 후경(後景)은 전혀 볼 생각도 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모르는 채, ‘나’라는 책을 제대로 집필하지 못한 채, 횡설수설, 좌충우돌, 엉망진창, 뒤죽박죽의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인생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을 잘 써서 명저로 남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한 권의 책에는 어려운 곳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채롭고 풍부한 내용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곳도 있습니다. 이 인생의 책을 열심히, 성실하게 쓰고 읽으면서 깊은 의미를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길입니다. 나아가 이당은 “인생은 여행이요, 우리는 나그네고, 생즉행(生 行)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일러줍니다. 자기의 길을 가되 생의 깊은 의미를 바로 볼 줄 아는 눈도 필요합니다. 올바로,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귀도 있어야 합니다. 정확하고 순수하게 생각할 줄 아는 머리와 사태를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줄 아는 마음과 가슴도 필요합니다. 이렇게 생이라는 책을 쓰고, 읽는 데 이목구비 혹은 감각이 중요할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이당은 “바로 보고, 바로 듣고, 바로 알고, 바로 생각”하는 인간상을 당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이성과 감성, 그리고 감정이 올바로 작동해서 인생의 책을 잘 읽을 수 있을까요? 이당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거기에는 성실이 필요하고, 정열이 요구되고, 정신의 집중이 있어야 한다. 마음을 바로 하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보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듣고자 하는 정신이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 생을 인식하려는 의지도, 자각하려는 정신도 부족하지 않도록 늘 갈고닦으며 채우고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 각자 ‘나’라는 유일한 책을 쓰고 읽어나갈 때 건성으로 읽는지, 아니면 오묘하고 심원한 뜻을 깊이 파악하는 혜안을 통해 써나가며 읽기도 하려는지 자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2』, 자유문학사, 1997, pp.59~62, 1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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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완성하는 것이다. 자아의 완성, 자아의 실현이다. 그리스의 철학자는 이것을 엔텔레케이아(Entelekeia)라고 하였고, 중국의 사상가들은 이것을 성기(成己)라고 하였다. 이 말은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이다. 성기는 자기완성이다.” 안병욱, 『나를 위한 인생 12장』, 자유문학사, 2005, p.172. [타임즈코리아] 이당은 ‘성(成)’에 담긴 철학적 의미가 『중용』의 성(誠)의 철학의 연장선에 있음을 밝힙니다. ‘成’이라는 한자어가 갖는 무게감은 자기를 완성한다는 데에서 알 수 있습니다. ‘成’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 실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우리는 성을 사업의 성공이나 학업적 성취, 또는 인생의 가시적, 물질적 성취, 나아가 권력이나 명예를 얻는 꼭짓점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成’의 진정한 의미는 ‘나’라는 인격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이당이 일관성 있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요, 나의 의지와 힘으로 움직이는 활동체요, 독자적인 개성과 이성과 양심을 지니는 인격체”인 ‘나’인 것도 원초적 자아(individual)의 그 독특성의 소중함을 천명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成’이 자기를 완성하고 세우는 데에서 중요한 철학적 개념으로 작용하는 것은 나에게서 출발하지 않는 사회와 나라, 그리고 공동체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당은 공동체나 집단우선주의보다 자기, 개별적 자아나 자유에 더 방점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건설이나 나라 건설, 공동체의 건설은 자아건설(自我建設)에 있다고 역설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종교학자 최준식이 적시하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집단주의, 가족이기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폐단이 많습니다. 이것이 민족주의, 국수주의, 배타주의, 전체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개별적 자아의 완성이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적 정체성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데서 파생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자아관 또는 자아개념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냥 자아관이 아니라 맹자나 주자가 설파한 정기(正己)여야 합니다. 주자는 자신의 저서 『근사록(近思錄)』에서 “정기위선(正己爲先)”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나를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학(大學)』에서도 수신위본(修身爲本)이라고 했는데, 오늘날에도 이처럼 나를 갈고 닦아 성숙한 인격을 만드는 데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교육, 종교에서 여러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이유는 수신과 정기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실체가 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동양 사회에서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완성하고 확립하는 인격은 몸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몸(짓)은 의식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다스리거나 가르치고자 하는 자, 혹은 타자와 관계 맺는 모든 개별적 자아들은 자기를 먼저 바로 잡고 세운 후 남 앞에 서야 합니다. 이당의 폭넓은 통찰력과 철학적 독서력은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의식개혁과 사고혁명에 동감을 표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변화와 변혁의 시발점은 의식과 사고의 개조에 있습니다. 사고가 행동을 결정한다는 명제는 “사람을 바꾸려면 먼저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리로 통합니다. 이당의 생즉사(生 思, 산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라는 철학적 실존은 정사(正思)와 상통합니다. 정사는 공자의 사무사(思無邪)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사악한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나아가 정사는 남의 의견에 맹종하거나 억측을 일삼지 않고, 스스로 명석판명하게 사고하는 것입니다. 정사, 정행(正行)으로 나아가자면 습(習)을 고쳐야 합니다. 습여성성(習與性成, 습관이 오래되면 그것이 천성으로 굳어짐)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습관이 몸에 배기 전에 좋은 습관으로 좋은 성격을 만들어야 합니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혁구습(革舊習), 곧 낡은 습관을 개혁(혁파)하라고 조언합니다. 습관의 습(習)은 ‘익힐 습’, ‘버릇 습’, ‘거듭 습’자입니다. “습은 날개 우(羽)와 백(白)이 합성된 한자어입니다. 백(白)자는 스스로 자(自)의 한 획을 줄인 것입니다. 어린 새가 자신의 힘으로 날려고 날개를 수없이 퍼덕거리는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입니다. 습은 되풀이하고 반복하는 것이요, 관(貫)은 반복의 결과 버릇이 되고 관행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궁극적 완성인 성(成)은 사고와 행동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어 성격을 새롭게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독일의 문학자이자 미학자인 쉴러(F. Schiller)는 말합니다. “네 운명은 네 가슴 속에 있다.” 이당은 성(誠)과 성(成)을 연관 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의 기초 위에 굳건히 서는 건전한 인격을 건설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자신의 성(成)이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성찰해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成)이라는 한 글자에 담긴 사려 깊은 이당의 철학을 곱씹어 봐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나를 위한 인생 12장』, 자유문학사, 2005, pp.171~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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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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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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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燃燒)하는 일입니다
- “현대 지식인의 가장 큰 정신적인 덕이 무엇이냐. 자기의 인생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인생을 되는대로 사는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가장 큰 정신적 악이라고 했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11, 생의 푸른 초원에서』, 교육도서, 1988, p.27. 왼쪽에서부터 장준하, 안병욱, 김준엽 “현대 지식인의 가장 큰 정신적 범죄가 무엇이냐. 자기 인생에 대해서 불성실한 것이다.”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의 말입니다. 인생을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자기의 생을 사랑하고, 자기의 생명을 자신과 세계를 위해서 촛불처럼 연소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 위한 생에만 연연하여 살지 않습니다. 그는 타자에게 빛이 되고 세계를 향해서는 등불을 밝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생에 대한 성실은 자기 생에 대해 정성을 다해 존재 가치를 드높일 뿐만 아니라, 타자와 세계에 대해서도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생은 자기의 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자의 생과 더불어 살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은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그렇게 가치를 발현하며 생명을 연소시키는 것입니다. 나를 다 바쳐 타자를 위해서 정성껏 시간을 들이고 헌신하는 삶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주어진 속성 때문입니다. 이런 의지와 의욕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헌신하며 의미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나누고 연소시키며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삶은 자신의 생의 의욕, 살려는 의욕인 동시에 이것은 타자의 의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삶이라는 것이 본질에서 서로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려는 의욕, 곧 생은 자기가 몸 바칠 대상, 몸 바칠 곳이 어딘지를 찾아야 합니다. 자기의 생, 자기의 생명을 연소시킬 대상과 장소와 의미가 없는데, 연소시킨다면 무의미한 소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이런 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연소시키며 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주위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 온기를 주어 온통 밝고 따뜻하게 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이당은 “산다는 것은 강한 의욕을 갖는 것이다. 의욕이 없다는 것은 죽은 거나 다름이 없다. 생(生)의 의욕(意慾) 상실은 곧 생의 의미 상실이다. 의욕이 없는 인생은 의미가 없는 인생이다”라고 말합니다. 생의 약동, 생의 흐름과 지속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부여된 것입니다. 그것을 거부하거나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행태는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의 약동과 지속을 인정하기 위해 마음 밭을 잘 갈아야 합니다(心田耕作).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자연과 타자에게서 배워야 정신과 인격을 고매하게 가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산다는 것이 결국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생명의 길, 진리의 길, 자유의 길, 책임과 결단의 길을 오롯이 갈 수 있게 됩니다. 한 번 주어진 길은 존귀하고 엄숙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묻고, 또 물으면서 다음과 같은 이당의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참을 찾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별을 노래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참과 별과 길. 이것이 생에 대한 그 대답이었다. 가슴에 참을 지니고 별을 바라보며 나의 길을 가는 것, 그것이 보람 있게 사는 길이다.” 생의 보람과 참을 밝히고 자기의 생명을 별처럼 밝혀, 모두가 함께 가는 길에 빛이 되어 주는 생, 그것이 생의 약동이요, 생에의 의지요, 생철학적 삶을 몸으로 행동으로 이해하며 사는 것입니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11, 생의 푸른 초원에서』, 교육도서, 1988, p.27. pp.110~111,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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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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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燃燒)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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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성 개조만이 살 길입니다
- “민족의 흥망성쇠는 그 민족성에 달려 있다. ‘민족적 성격의 개조, 이것이 민족이 살아나갈 유일의 길이다.’ (...) 민족개조주의 내용이 무엇이냐. (...)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 공상(空想)과 공론(空論)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 (...) 실과 행의 국민 성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민족 개조 사상의 핵심이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p.189-191. [타임즈코리아] 이당이 평소에 무실역행의 실과 행의 생활을 반복적으로 성(誠)의 철학과 연결 지은 것은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하게 생각하고 영향을 받았던 춘원 이광수가 해석한 도산의 민족개조론과도 맞물려 있습니다(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228.). 정성을 다한 것과 정성을 다한 것으로 나타난 행위와 결과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실을 다한 후에 실망(失望)하거나, 망연자실(茫然自失)하기도 합니다. 이당은 성실하면 손해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성실은 누구나 인생의 기본 신조로 삼아야 할 필수적 자세입니다.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은 그 어원이 되는 ‘pragma’곧 행동과 관련된 실용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행동과 행위에 방점을 찍은 것은 정성스러운 행위와 삶은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실은 대도(大道)요, 정도(正道)요, 상도(常道)가 되어 개인과 사회를 바로 세우는 원리입니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무릇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중용에서 강조하고 있는 성의, 성실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산의 ‘민족개조론’에 대해 춘원이 논문을 쓴 것처럼, 성실을 진리로 삼되 생각한 바를 부지런히 실행에 옮기며 거짓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춘원도 무실과 역행을 ‘민족개조론’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정치계나 경제계, 교육계 혹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빈말이 난무합니다. 말을 뱉어 놓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그저 한담(閑談)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자아를 속이고 참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 James)는 “진리는 선(善)의 일종”이라고 하면서, “선(善)을 현실과 삶에서 모색하는 지적 행위가 바로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은 진리이자 선(善)입니다. 따라서 생을 산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산다는 것이요, 선한 행위의 흐름으로써 산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역으로 유용하기에 진리라고 보는 것이 실용주의의 주요 논점입니다. 진리와 유용성은 삶에서 그 일치가 증명된다는 것인데, 진리는 자신의 삶에서 유용하다는 것이기에 모두에게 통용되는 현금 화폐(cash)와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誠)은 곧 실(實)이요, 진(眞)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과 타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행위는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행동으로 드러나는 가치가 있는 삶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p.11~13, 171, 1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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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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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성 개조만이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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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
-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 자리를 준비하면서 네 인생을 살아라. 그것이 현인(賢人)의 길이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142.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말은 이당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안동규 교수, 현재 한림대학교 부총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는 말로 규정하였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 만물의 이치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현재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많은 재물을 소유하려고 남에게 상처를 줄 까닭도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유산을 남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산 때문에 자식들 사이에 분란이 발생하고 사람답지 못한 상황까지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끝에 유산을 남기느니, 자식들에게 평생 남을 만한 좋은 생의 철학을 물려주는 것이 낫습니다. 죽음은 그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뿐입니다. 자신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니, 서러워할 것도 욕심을 낼 것도 없습니다. 초연하게 죽음을 사유하고 맞이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도 “나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낙심하지 마시오”라고 유언했습니다. 성실과 사랑, 단순함과 소박함의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완성입니다.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한계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당은 죽음이란 3가지 부정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부정(否定)입니다. 내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건입니다. 둘째는 경험의 부정입니다. 죽어 본 일이 없이 불현듯 죽음을 경험하니, 그 경험의 질과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식의 부정입니다. 죽음을 묻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정의만 내릴 뿐입니다. 만일 죽음의 대강이 이렇다면 삶에 대해서 사유하는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나 이당이 말한 것처럼 죽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죽음 앞에서 멈칫거리지 않도록 생에 대해 성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후에 인간은 무(無)로 돌아갑니다. 영원히 유(有)일 것 같은 생이지만, 언젠가 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그때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삶을 살듯이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라는 말은 사유의 처음과 끝에 걸려 있는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며 삶에 대한 깨달음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엄중한 지침처럼 들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처음과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無)와 만나야 할 존재이기에, 이미 돌아갈 죽음의 흐름 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만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생을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은 죽는 연습을 잘 하며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이 실제임을 깨닫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p.13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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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