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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교수의 강연과 새롭게 만나는 『안병욱 인생철학』
    [타임즈코리아] 안병욱 선생님의 명성에 이끌려 (神이 내려준 직장이라는 한국은행을 퇴직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에 입문함으로써 인생의 경로가 바뀐 ‘철학 서생’이 서평을 쓰게 되어 퍽 기쁩니다.   칠판에 이당체를 쓰며 웅변하듯 열강하시던 모습, 사색하는 눈매를 살짝 감춰주는 굵은 뿔테 안경, 실크 넥타이를 애용하시던 풍모, 교정을 한가로이 산보하실 때 구두 앞쪽을 조금 든 채 땅 위를 내딛는 걸음걸음, 인품의 氣가 뼛속 깊이 전달되는 안 선생님의 강의가 새록새록 회상됩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삶을 잘 그려낸 책이 『안병욱 인생철학』입니다. 아마 안병욱 선생님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정리했어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서술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유난히 ‘生’이라는 낱말이 많습니다. 책의 제목에도 ‘生’, 부제인 ‘생철학자 안병욱’에도 ‘生’이 있을 정도로 안병욱의 생철학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니체,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을 통하여 안병욱의 생명 사상을 노래합니다.   안병욱 사상의 중심인 『中庸』의 誠에 바탕을 둔 생활철학 속의 ‘生’을 앞세웁니다. 『中庸』에서 和(평화)의 요소를 찾아 안병욱의 생명 평화 사상에 접근한 태도가 눈에 띕니다. 『中庸』의 핵심인 誠이 和로 나아가는 길을 밝힌 점이 훌륭합니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다’는 대명제 아래에서 성찰하는 삶,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갈 것, 인생은 학교라는 인생학, 철학은 죽음의 연속이라는 안병욱의 생철학을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의 50권의 저작을 두루 섭렵한 저자가 안 선생님의 말씀에 철학적 담론을 입혀 원저자(안병욱)의 사상을 빛내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설법에 따라, 안병욱이 말하는 방식으로 안병욱의 철학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본디 사상에 윤기 나는 해설을 붙여 책 읽는 美感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독자가 안병욱과 함께 철학적인 호흡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안병욱 선생님이 환생하시어 나에게 철학 강의를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안병욱 선생님이 『사상계』를 통하여 시대의 고난·아픔에 동참한 일을 상세하게 기술한 점도 칭찬할 만합니다. 독재정권에 직접 맞서기보다 세련된 저항 의식을 철학적 언어로 전달한 안병욱의 고뇌를 엿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은 학사 학위 소지자로서 박사학위를 지닌 자들보다 잘 가르쳤습니다. 편협한 전공과목을 내세우는 학자라기보다 삶의 길[道]을 제시하는 선비이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선비가 아니라, 땅 위의 민초들을 계몽하기 위해 밤낮없이 강연 다니시던 대중적인 선비 안병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비의 참모습을 미끈하게 묘사한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김승국 박사(평화 연구·활동가, 숭실대학교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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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1-03-02
  •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 안병욱 평전 출간
    ‘안병욱 인생철학: 생철학자 안병욱 철학평전(김대식,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1년 1월 31일)’이 출간되었다.   ▶ 저자 김대식 박사 인터뷰   이 책은 생철학자 이당 안병욱 선생의 평전이다. 그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쫒아가며 그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흐름과 철학을 시종 여일하게 톺아가며, 그 철학과 철학적 인생을 조명하는 ‘철학평전’이다. 안병욱은 생애 전체를 기울여 청중과 독자들에게 ‘철학이 있는 삶’을 강조하고, 그의 철학대로 살아갔다. 이런 점에 주목해 그의 생애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의 삶이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 책은 ‘인생철학’을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까닭은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젊은이들의 인생 스승으로 살았던 이당의 삶과 철학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로 들어 선 오늘날 무엇보다도 철학이 갈급하다. 이런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인생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안병욱의 철학을 크게 성(誠)의 철학, 중용(中庸) 철학, 생(生)의 철학, 실학(實學) 철학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그의 수십 편의 저작과 그가 탐구하여 용해해낸 철학자들의 사상까지 아우름으로써 안병욱 철학의 전모를 감상할 수 있게 하려고 힘썼다. 다시 말하자면 ‘안병욱 철학 입문서’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이당(怡堂) 안병욱(1920~2013)은 누구인가   지금 안병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정신의 빈곤이 두드러지는 시대, 생명과 생활의 좌표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그의 철학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철학적 생애에 관한 이 책을 ‘인생철학’이라는 ‘큰말’로 명명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철학은 크고, 넓고, 깊다. 그는 대중철학자로서 시민들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고 각자의 생명의 샘을 발견케 한 계몽철학자다. 나라와 민중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대에 도산 안창호가 외쳤던 민족개조론의 사상이 그에게도 다급했다. 일본 유학 시절 서예를 통해 동양미학적 심성을 기르며 윤동주와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도 생각하는 시민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귀국 후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진리를 설파하고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통하여 대중을 계도하였다. 함석헌과의 만남과 흥사단아카데미 활동도 그러한 삶의 노정이었다. 그는 중용철학을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생철학, 실존주의철학, 실용주의철학을 대거 흡수하여 폭넓은 사유체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결국 대중 혹은 시민이 “어떻게 ‘올바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안병욱은 이를 위해서 삶에 정성을 다하는 성(誠)의 철학과 성의(誠意)의 철학적 삶을 살라고 대답한다. 나아가 철학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이어가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당은 대중을 위한 생철학자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 출판사 서평   행복한 인생을 향한 바른 길, 안병욱의 인생철학       삶은 원본적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삶은 인간이 직접 체험되는 현장이며 실존이 논증되는 광장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죽음조차도 이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을 좀 더 성실(誠實)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함(philosophieren)을 대중들과 함께 나누며 연장시켜 간 철학자가 이당(怡堂) 안병욱(安秉煜, 1920~2013)이다.   그는 자칫 사변으로 흐르기 쉬운 철학적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탁월함뿐만 아니라, 좋은 언어 구사력까지도 겸비한 철학자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넘나들며 시대의 민중이 갈급해 하는 실천적 사유의 바른 길, 더 나은 길을 『사상계』를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역설했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직접 강연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의지를 열어 주었다.   안병욱은 생애 동안 50여 권의 수상록을 남긴 저술가요 수필가(문필가)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수백 회의 대중강연을 통해, 회색빛 시대를 관통하여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참되고 성실한 인생을 지향할 수 있게 한 대중 강연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당의 이력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도산 안창호 시절로부터 이당의 시대로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안병욱은, 지금도 살아서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김형석 선생, 그리고 천재적인 문필가여 강연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어령 선생 등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글과 강연으로 이끌어온 우리 사회의 석학이요, 스승이었다.   이당을 만든 철학, 이당이 만든 철학   그의 철학은 동서양을 아우르고 넘나든다. 동양철학은 공자,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도산 안창호와 맞닿아 있다. 서양철학은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슈바이처, 우나무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생철학적 지평에 걸쳐 있다. 이를 종합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한 이당의 철학은 생(生)철학 혹은 성(誠)의 철학으로 귀결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지류를 폭넓게 수용하여 독창적으로 펼친 이당의 철학을 평전의 저자는 좀더 세분화하여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성철학(誠哲學), 중용철학(中庸哲學), 생철학(生哲學), 실학철학(實學哲學;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 등의 실용주의까지)이 그것이다.   오늘날 철학의 유사상품이나 파생상품은 많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철학과 철학함은 드물어 보인다. 철학함은 단순히 빛나는, 번득이는 지혜를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학자의 삶으로 구현해 보임으로써 그 철학(함)을 입증하는 데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관성과 실천성을 겸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삶에 녹아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사유능력을 통한 엄밀한 비판정신 또한 살아 있어야 한다.   비판은 화자의 모범적 시범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국은 비난일 수밖에 없으니, 비판정신이 살아 있는 철학을 이어나가고, (철학자가) 죽어도 그 철학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력, 삶과 뜻에 정성을 다하는 성의(誠意)가 있어야 한다. 허언(虛言)을 하지 않고 알맹이가 있는 삶인 무실역행(務實力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용철학, 곧 절제와 지족(知足)도 중요하다. 이것이 모두 이당에게 해당한다.    ‘성실’한 삶을 가르친 이당   사람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한 것인데도,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그것에 정성을 기울이고[誠]이고 힘쓰는[務實力行] 생생한 삶[生]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대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기보다 오히려 차고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풍요속의 빈곤감이 더욱 커진다. 사람들의 행동이 나날이 그악스러워지고, 해마다 고립되어 가는 까닭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각자의 삶을 올바른 인생으로 완성시키면서, 또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되려면, 그 모든 것이 ‘중용’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은 사실상, 어려운 것 가운데서도 어려운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또한 중용은 가까운 데서, 낮은 데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곳곳에서, 한가운데서, 작은 데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당은 그 점을 알려준다. 그 점을 깨닫게 한다. 그 길로 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과 동력을 준다.   사람은 저마다 삶의 행복을 꿈꾼다. 생각을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불행하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회나 국가도 그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꿈꾼다. 다른 말로는 사회와 국가의 행복이다. 물론 이당이 말한 ‘올바로 사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이다.   철학은 행복한 삶(eudaimonia)의 길을 지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행복한 삶은 좋은 삶, 참살이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그래서 철학함은 나를 먼저 반성하고 타자를 배려하며 세계를 전망하여 참다운 관계를 설정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당의 철학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전체를 관조하면서 충실, 만족, 충족, 자족하라고 말한다. 그 처음과 끝은 관조적(contemplative) 삶에 닿아 있다. 시민이, 서민이, 민중이, 민초가 일상에서 중용을 찾고 중용을 살아가는 가까운, 쉬운, 평범하고도 비범한 길이다.   성실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     이당은 이 모든 철학함의 원리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철학함으로서의 공부, 삶의 원리에 대한 공부로서의 철학은 곧 위기지학과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수단으로서의 공부나 처세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독실(篤實), 무실, 결실이 완숙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고 풍요로움을 나누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공부나 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시대적 살핌으로 나아가는 까닭이다. 철학의 쓸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만이 아니다. 말을 이루어야 한다[言+成=誠]. 이당의 철학에서 유독 ‘성’(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당은 자신의 저서 『키에르케고르』(1967)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인생의 자전 제1장에 무슨 단어부터 먼저 쓰겠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성실(誠實)’이라고 대답하겠다. 나는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싶다. 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나 스스로를 대할 때나, 나는 성실하기를 힘쓴다. 우리가 첫째로 꼽아야 할 인생의 공부과목은 성실하기 공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당 안병욱의 생철학을 고백적으로 잘 드러낸 말이다. 오늘의 우리 삶이 첨단화하고 복잡다단해진 만큼 성실 이상의 정보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정보와 기술은 결국 성실, 성실한 공부로서 갈무리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할 분이다. 그런 점에서 성실이야말로 최신의, 최고의 처세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그러므로 어떻게 성실할 것인지를 이당의 생애, 이당의 철학은 지시한다.   철학평전, 안병욱의 인생을 철학으로 톺아 가다!   『안병욱 인생철학』 은 안병욱 평전이되, 그의 생애사를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그의 철학을 톺아간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곧 그의 삶이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그의 생애를 좇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철학평전’이다. 누구에게든 ‘인생철학’은 있게 마련이지만, 철학자의 생애를 통틀어 ‘인생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아가, 그 철학자의 평전을 ‘인생철학’이라고 명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스승으로서 이당의 인생을 녹여내었기에 ‘인생철학’이고, 오늘 철학이 갈급한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때문에 ‘인생철학’이다.   그는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 “청무성(聽無聲)”을 이야기하였다. 죽음이 들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되뇌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 아닐까?   ‘죽음’이란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를 내려놓고, 비워가고, 걸어가는 것, 그렇게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라 원시(元始)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붙잡으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이당이 쓴 수많은 글들은 물론이고, 그가 공부한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당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촘촘히 뜨개질하여 ‘이당 안병욱의 철학, 철학자 안병욱의 사상’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저자(김대식)는 “이 평전은, 그의 아호가 뜻하는 것처럼 철학의 기쁜[怡] 터[堂], 행복한[怡] 철학의 집[堂]을 짓기 위한 초석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이제 이당의 더 큰 철학의 집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그의 철학적 삶을 이어나갈 동학(同學)들도 말이다.”라고 밝힌다.   ‘삶’이 ‘생활’이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당의 철학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한 삶, 아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이당은 산다는 것은 큰 뜻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야로 분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뜻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니 허송세월하지 말고, 대망(大望)과 대지(大志)를 품고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살라고 역설했습니다. (30쪽)   이당의 철학은 생철학으로 수렴됩니다. 그의 철학은 성(誠)을 기반으로 하는 성철학과 중(中)을 바탕으로 하는 중용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철학은 단순히 이론이나 담론으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사유[思], 그리고 일을 함에 있어 실제에 힘쓰는 것[務實],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 진실된 마음을 갖는 것[實心], 힘써 실천하는 것[力行]으로 이어집니다. (40쪽)   안병욱이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는 것은 사람-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 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야 가능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으로 인간의 지표로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50~51쪽)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사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66~67쪽)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의 길로서,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의 지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중략)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이당은 이렇게 풀어서 말합니다.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 (96~97쪽)   수많은 대중들에게 강연을 다니면서 유명세를 탔던 이당은 대중 철학적 언어에 탁월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당 역시 강연을, 말씀을 전달하는 미적인 것, 그 언어를 전달하는 예술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당대의 달필이요 유려한 언어와 목소리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분명 천분(天分)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분수, 곧 자기의 몫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몫을 다한 철학자입니다. (116쪽)   “일명일생(一命一生). 인간은 유일성(oneness)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onceness)의 생애를 삽니다.” 이당의 말입니다. 그 안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이 있습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관점, 곧 인생관이 분명해야 후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관이 없으면 대충, 대강 살다 가게 됩니다. 인생의 원칙, 삶을 대하는 정신 자세, 도반과 사물을 향한 마음가짐이 없이 인생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생철학, 생활철학, 생철학이라고 합니다. (136쪽)   이당은 “존재는 표현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표현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생은 인간에 의해서 진실을 표현하고 삶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생은 표현입니다. 생은 내적으로 의미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을 산다는 것은 저마다 제 소리를 하고, 제 노래를 부르고, 제 말씀을 하고, 제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의 고유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155쪽)   이당은 “학(學)에서 시작하여 행(行)으로 끝나야 한다. 학의 목적은 각(覺)에 있고, 각의 목적은 행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에서 비롯됩니다. 참됨과 성실함[誠]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리라 할 것입니다. 성실한 행위가 없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의 근본이자 성의 본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속이고 타자도 속이는 삶은 가치가 없으니 말입니다. (200쪽)   이당의 미학의 특징은 다채미(多彩美)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212쪽)   이당은 와세다대학 시절에 서도에 관심이 생겨서 동양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금석학(金石學)과 문자학(文字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석이나 종(鐘) 같은 데 새겨진 문자는 물론 문자의 구조를 알기 위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학생 때 점심값을 아껴 가면서 몇 해 동안 사 모은 서첩들과 많은 장서를 한 권도 건지지 못하고 이북에 버려 둔 아쉬움, 그리고 한국전쟁 잃어버린 책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글에서는 그의 책사랑과 학자로서의 간서치(看書癡)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225쪽)   이당은 생즉로(生則路), 생즉도(生則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단 한 번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당은 ‘성(誠)’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였습니다. 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던 현대 한국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이당은 근(勤)과 인(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240쪽)   <본문 - 안병욱의 어록 중에서>   “인생은 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학이 인생의 시발점이다. 학의 목적은 지(知)요, 지의 목적은 행(行)이요, 행의 목적은 성(成)이다. 學→知→行→成, 학(學)에서 시작하여 성(成)으로 끝나는 행동의 체계, 이것이 인생이다. 학은 모든 위대한 것의 원천이요, 시발점이다.”(안병욱, 『논어인생론』) (본문, 38쪽)   “이 혼탁한 난세를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투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정신이다.”(안병욱, 『사람답게 사는 길』) (본문, 38~39쪽)   “우리는 지족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지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지족은 행복의 길이요, 부지족(不知足)은 불행의 길이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선경(仙境)도 되고 범경(凡境)도 된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본문 106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타락한 시장 사회의 원리가 작용한다. 불성(不誠)과 불화(不和)가 지배한다. 부패한 상인 정신이 휩쓴다. 나의 이(利)에 눈이 어두워 남을 수단으로서 이용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조우(遭遇)가 있었다. 상호 불신 속에 인간적 화목을 잃었다. 불의(不義)의 재(財)를 탐내고 부정의 이(利)에 혹하여 양심이 마비되고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곧은 마음과 바른 정신을 잃었다.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망각한다. 속임수와 권모술수가 성행한다. 타인을 나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다.” (안병욱, 『빛과 생명의 안식처』) 본문 107쪽)   안병욱의 인생관 : 생즉도(生卽道): 산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즉학(生卽學): 산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생즉수(生卽修): 산다는 것은 부지런히 자기의 재능과 인격을 갈고 닦는 것이다. 생즉동(生卽動): 산다는 것은 가치창조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본문 130쪽)   “우리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무책임한 향락의 유흥장이 아니요, 심심풀이로 하는 도박의 장소가 아니요, 일확천금에 골몰하는 탐욕의 싸움터가 아니다. 인생은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엄숙한 수련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안병욱, 『때를 알아라』) (본문 145쪽)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본문 209쪽)   ▶ 목차   추천사 김형석, 이어령 들어가는 말 이당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   Ⅰ. 성(誠)철학  1. 인생의 지혜는 삶보다 먼저 옵니다!  2. 진실한 물음, 분명한 대답: 물음 주체, 삶의 주체인 ‘나’  3.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4.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  5.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6.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공부  7.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8. 성의(誠意)가 있는 삶을 위해 힘써야[務實] 합니다!  9.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10. 행복은 삶에 정성을 다한 만족감입니다!  ● 이당의 성실(誠實)철학   Ⅱ. 중용(中庸)철학  1.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2.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3.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4. 시중(時中)하면 이미 군자입니다!  5. 평화와 조화와 화목의 자리가 중용입니다!  6. 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7. 성실의 덕을 살리고 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 이당의 중용(中庸) 철학   Ⅲ. 생(生)철학  1. 인생은 예술 이상의 예술입니다!  2.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3. 성찰하는 삶이어야 살 가치가 있습니다!  4. 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5. 진실과 진리로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6. 인생은 ‘창조적 자기 표현’입니다!  7. 생은 사유와 행동의 지속입니다!  8. 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  9. 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燃燒)하는 일입니다!  10. 인생은 한 권의 위대한 책입니다!  ● 이당의 생철학   Ⅳ. 실학철학과 실용주의  1. 철학의 멸시가 철학입니다!  2. 지성일관(至誠一貫)의 삶을 사십시오!: 도산 안창호와 이당 안병욱의 만남  3.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삽시다!  4. 우리가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5. 위대한 국민적 성격과 정신만이 살길입니다!  6.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7. 미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8. 한창필연불유진(閑窓筆硯不留塵): 이당의 문예 미학과 서예 미학  ● 이당의 실용주의와 실학 철학    나오는 말  이당(怡堂)이라는 별호처럼 아름다운 그의 철학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록 1. 이당 안병욱 연보  부록 2. 이당 안병욱 저작 및 기고문 목록  회고의 글 / 김선욱 / 박인주 / 이동원 / 황보윤식  감사의 말 / 안동규   ▶ 저자 소개   <김대식> 1967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M.A.),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Ph.D.),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Ph.D.)에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등에 출강하면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학술위원장 및 안병욱아카데미 원장,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과 (사)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 사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절대자유를 갈망한 사람들』(공저),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등이 있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1-01-18
  • 미(美)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미는 영원의 기쁨이라고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노래했다. 인간에게 풍성한 미의 세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미는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구원이다. (…) 인간이 지니는 보람과 가치의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다시없이 소중한 것의 하나가 미의 세계요, 아름다움의 왕국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58.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슴속에서 나온다. 인생이 깊은 것은 심장의 산물이다. 인생의 가장 성실한 것은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 가슴은 하나님의 출장소다. 가슴은 인생의 지성소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7, 아름다운 창조』, 교육도서, 1988, p.67. 이당의 미학은 다채미(多彩美)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美)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장엄합니다. 위대하고 웅장합니다.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장엄하고 웅장함에서 풍기는 미를 느끼게 합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좋아했던 이당은, 그 음악가로부터 우아미, 섬세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상적인 미의 원형을 발견하고, 조화와 균형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당은 인간이 지닌 정신의 미, 성격의 미, 인품의 미를 외형의 미, 용모의 미보다 높게 쳤습니다. 이는 성격을 닦고 인품을 기르고 심전을 풍성하게 가꾸는 데서 풍기는 향기입니다. 겉모습을 다듬고 외형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정신의 미, 인품의 미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쾌감은 무관심한 만족, 곧 직접적 이해관계나 실제적 목적에서 떠난 순수한 만족감입니다. 미에는 욕망이나 욕구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순수한 만족감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를 목적 없이 목적에 적합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미는 순수한 쾌감이자 정신적 만족감입니다. 미를 통해서 인간은 정신적 구원의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미는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미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하는 세계입니다. 해탈 아닌 해탈의 세계입니다.   이당은 여성에게서는 우미(優美, grace; Anmut), 남성에게서는 위엄미(威嚴美; dignitas)가 풍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미의 극치는 정신의 미와 관능의 미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미는 생명적이고 건강하고 영속적인 데서 드러납니다. 숭고미는 엄청나게 크고 무한한 힘을 지닌 대상에게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미적 감정입니다. 밤하늘, 망망대해, 험산 준령을 바라볼 때는 압도감을 느낍니다. 숭고함은 영원과 무한의 상징입니다. 우미는 조화와 균형, 숭고미(sublime; Erhabene)는 조화와 균형을 깬 미를 가리킵니다. 비극의 미(비참의 미, 혹은 비장미)라고 하는 것은 숭고의 감정이 고뇌나 비극과 결부될 때 느끼는 미적 감정입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구분하였습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서 정적이고 합리적인 미의 표현인 건축에 의한 조형예술의 상징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으로서 음악과 무용에 의한 동적이고 격정적, 비합리주의적 미를 나타냅니다.   이당이 미에 관해서 기술한 내용을 일별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는) 인간의 영원한 기쁨이요 행복한 도취요 순수한 만족의 쾌감이요 인생의 가장 흐뭇한 보람이요, 목적이요, 가치다.” 따라서 미는 생명적이어야 합니다. 다양함 속에서의 통일성, 질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움, 그리고 균형감 있는 생의 충일감(充溢感)을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미는 생명에 건강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생을 저해하거나 손상하는 미, 혹은 생을 피곤케 하는 미는 참된 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강하고 건전한 미의식을 가지고 생명에 기쁨을 주는 미를 탐구하고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p.58~7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12
  •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46. 생은 체험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을 체험, 이해, 표현으로 본 딜타이, 힘에의 의지로 본 니체, 그리고 생의 약동으로 본 베르그손, 이들의 철학적 핵심어는 생, 삶입니다.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살 것이냐, 내용이 실(實)한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진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바탕에는 적어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유익하다는 마음(利心)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학이 실(實)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중점을 둔 철학으로 발전한 것도 삶을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실증입니다.   이당은 “무실(務實)의 반대는 부허(浮虛)요, 허위(虛僞)요, 역행(力行)의 반대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이요, 형식주의요, 외화내허(外華內虛)다. 거짓과 공리공론과 외화내허의 사회는 허약한 사회요, 그러한 생활은 허망한 생활이요, 그러한 인간은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실(實)은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이며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거짓은 속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학은 사(事), 현상, 보이는 것, 사실을 중시합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실은 넉넉함, 부강함, 민생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울 좋은 명분만 남발되는 사회에서 알짬, 알참, 꽉 참이 절실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지(知)가 아니라 행(行)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행동(pragma)과 실천에 방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두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성이 없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참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나라의 철학이자 사상의 근간이 된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38~24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8
  • 우리는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결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다.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무용(舞踊)보다도 씨름과 비슷하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한다. 특히 내가 나하고 항상 싸워야 한다. 인생은 자아를 실천하는 사명의 장소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진지한 생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생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향락이 아니고 일이요, 활동이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44.   인생에서 자기의 생명을 끊임없이 개조하는 일은 인간의 과제입니다. 삶의 개조, 혼의 개조를 부르짖은 춘원 이광수의 말처럼, 인간은 혼을 개조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생의 예술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당의 메시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축조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그것이 생의 의의입니다.   지성인은 비판적 양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대학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자신과 사물을 깊이 탐구하는 정신, 분석적으로 사고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는 정신을 지닌 지성인들이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을 넘어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개조(改造)”에 있습니다. 인간 형성과 주체(자아) 및 객체(타아)를 개조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사람, 이성적 사유, 탐구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지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의 과정에서 창조와 지성은 나란히 가야 합니다. 생은 창조적 활동이요 날카로운 인식과 성찰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배워서 자신을 교정하고 개조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 곧 자아와 인격 전체를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밭의 계발, 주체와 객체의 개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칸트(I. Kant)가 주창하는 선한 인격과 듀이(J. Dewey)가 내세우는 좋은 환경과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칸트의 도덕제일주의와 듀이의 지식제일주의의 융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체와 개조에 중심을 두는 도덕제일주의와 객체의 개조에 역점을 두는 지식제일주의 혹은 직업주의교육은 양분될 우려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앙리 베르그손과 존 듀이가 역설한 삶의 도구로서의 지성, 기술적 지성, 창조적 지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지성으로 살아가려면 객관적 대상을 조용히 바라다보는 관상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도 균형 있게 갖춰야 합니다.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 도덕적 지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건설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 대학과 사회가 모두 민주지성의 탄생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칸트는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바람직한 지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창조적 지성과 더불어 비판적 사고능력, 그리고 관조적 지성을 겸비하려는 생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p.44~5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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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 공부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공부는 마음 공부(工夫)다. 심학(心學)처럼 중요한 학이 없다. 마음 공부란 무엇이냐. 우리 마음을 닦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기르는 공부다. 우리의 마음을 쓰는 공부요, 우리의 마음을 통일하는 공부다. 수심(修心)과 양심(養心)과 용심(用心)과 구심(求心)이 마음 공부의 중요한 목표요, 항목이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177.   이당은 마음 공부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달리 정신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마음을 공부하는 것이 철학자의 자세이자 마땅히 힘쓸 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은 알지만, 마음 씀씀이와 마음을 올바르게 찾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그래서 후자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마음 공부의 요령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진리를 하나 붙들고 밤낮으로 그것을 사유하고, 실천하고, 터득하려고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점점 더 밀려나고 있습니다. 몸 쓰는 일, 마음 쓰는 일, 머리 쓰는 일도 점점 더 약화하여 갑니다. 이런 것은 모두 유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마음 공부가 따로따로 되고 있으니 혼연일체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닦고 마음을 쓰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앞세우다가 보니 마음이 다치게 됩니다.   이당은 본립도생(本立道生), 즉 ‘근본이 서면 방법[道]은 저절로 생긴다’는 말로 올바른 마음 공부가 중심 역할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성(誠)의 철학자답게 율곡 이이를 비롯하여 퇴계 이황(敬), 우암 송시열(直), 도산 안창호의 애(愛)에 이르기까지 마음 공부의 대표 선인들을 언급합니다.   ‘성(誠)’을 마음 공부의 화두로 삼았던 율곡 이이는 매사에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마음 자세로 일과 사람을 대했습니다. 퇴계 이황은 ‘경(敬)’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고 믿었습니다. 공경스러운 마음은 오만한 마음, 거짓된 정신, 경솔한 태도를 경계합니다. 우암 송시열은 곧고 올바르며 공정한 정의의 원칙대로 사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꼽았습니다. 곡(曲), 사(邪), 악(惡)은 모두 ‘직(直)’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도산 안창호는 사랑하기를 삶의 철학으로 품고 살았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의 사랑은 나라, 사람, 진리, 자연, 하나님, 문화, 일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만사의 철학으로 규정짓고 몸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에게 네 정성과 최선을 다하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성(誠)이든, 직(直)이든, 경(敬)이든, 애(愛)든 다 성(誠)으로 통한다면 무리(無理)일까요? 필자는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당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마음 공부에 대한 전범(典範)을 알았으니,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후대의 자손은 선대의 교훈을 과거의 산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 누구도 선대의 연장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닦고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올바로 쓰는 일까지,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조신하게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마음 공부를 위해 인생의 진리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그 진리를 자신의 마음 밭에 놓고 곱씹어 득함으로 몸에서 배어 나오게 하면 눈빛이 달라질 것입니다. 낯빛은 온화해지고 목소리의 색깔 다정하며, 눈에서 배어 나오는 빛깔이 부드러워져서 결국 정신은 선(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선대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닦아 놓고 증명한 마음 공부(의 방법)를 정성(精誠)껏 성실(誠實)하게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그와 같은 인물로 닮아갈 것입니다. 『安秉煜에세이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교육도서, 1988, pp.177-179.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5
  •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
    “이름과 알맹이가 둘 다 완전한 것, 이름도 좋지만 그 속에 담긴 알맹이와 실력이 충분할 때 한문에서는 명실겸전(名實兼全)이라고 한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79. 양구 인문학박물관 안병욱 교수 서재   세상에 이름을 갖지 않은 존재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 ‘사물이 있다’, ‘동물이 있다’, ‘식물이 있다’ 등등 ‘있다’라고 할 때는 그 대상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어야 그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안병욱은 그 이름을 ‘명(名)’이라고, 알맹이와 자격을 ‘실(實)’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은 있지만,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자격과 실력과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有名無實)이라고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세계나 사람 중에는 이름은 있지만 이름값을 못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텅 빈[虛] 상태나 거짓된[僞] 존재도 많이 있습니다. 이당은 알참, 실질, 실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이처럼 삼박자를 갖춘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실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이는 다부지고 튼튼하며 알찬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 그리고 이름이 있더라도 이름값을 못 하는 존재도 많습니다. 이름에 걸맞은 실력으로 영근 알맹이를 가득 채우려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삶의 지향을 거기에다 두어야 합니다.   이름값을 한다,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달리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한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교수, 성직자, 국회의원, 대통령, 교사, 사장, 회장, 학생 등 각기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걸맞은 언행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이른바 유용(有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당이 지적하고 있듯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의 사람, 해를 끼치는 자가 됩니다.   나아가 자신의 자리를 잘 파악하고 인식하면서 이름에 걸맞은 언행을 하려는 사람은 질서와 아름다움을 생각하여 처신합니다. 자리의 아름다움이란 있어야 할 곳, 즉 제 자리에 존재하는 상태입니다. 달리 ‘앎답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앎은 인식이며 양심입니다. 내가 있어야 할 곳, 사물이 있어야 할 곳을 제대로 알고 양심에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자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의 자리, 행복한 삶과도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순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사회적 자리에서 요구되는 원칙들을 말합니다. 책임과 신용(신의)입니다. 당연한 것 같지만 몸으로 잘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책임(responsibility)은 대인관계에서 타인에 대한 욕구나 어려움에 적절하게 반응하고 응답한다(respond)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신용을 잃지 않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무시해서는 안 되는 도덕적 행위들입니다. 이 두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적 자리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마치 산사태가 벌어지는 것처럼 엄청난 피해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당은 자리에 대한 건강함을 유지하고 이름에 걸맞은 사람살이를 하려면 제 ‘구실’(口實)을 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구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구실의 다섯 가지 원리를 거론하면, 사람 구실, 가족원 구실, 직장인 구실, 민주 시민 구실, 백성 구실입니다. 구실을 순우리말로 하면 ‘노릇’이요, 라틴어로 하면 오피시움(officium)이나 페르소나(persona)가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각자 직책이나 자리에 잘 어울리는 역할과 기능을 하면 그만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 노릇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자리가 사람의 자리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면 나머지 사람살이의 구실은 저절로 잘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실이 안 되면 나머지도 안 됩니다. 사람 구실을 제대로, 올바로 해야 보람 있는 삶이 영위되는 것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 이당은 그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이름과 사물이 일치되는 세계가 되어야 하고, 이름과 인품이 잘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만큼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당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자기 이름이 있다. 우리는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알맹이와 실력을 갖추자.”   늘 마음에 두고 반성하고 연구하며 노력해야 할 말입니다. 삶에서 정성과 성실함을 기울이라는 그의 평소 전언을 생각해보면, 유독 이름과 자리, 그리고 구실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마음의 울림으로 남습니다. (안병욱, “현대인의 생활지표”, 김양호 편, 『언어교양대학』, 언어문화사, 1974, pp.73-95.)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4
  •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aphorism)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습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줍니다. 사랑에 관한 상반되는 이 명제는 모두 옳은 말입니다. 사랑에는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전자는 ‘빼앗는 사랑’이며, 후자는 ‘주는 사랑’ 또는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고, 아낌없이 줍니다. 이것이 사랑의 헌신(獻身)의 원리입니다. 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어 하며,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독점의 원리입니다.”『인생사전』, 예원북, 2013, p.75.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이 종교에 대해서 언급한 글은 거의 없습니다. 말년의 글에서 조금씩 나타나는 신에 대한 사랑 혹은 거기에서 파생되는 사랑에 관한 풀이는 흡사 설교 문을 읽는 듯합니다. 사랑을 크게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하향적 사랑, 인간이 신을 향하는 상향적 사랑,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 사랑으로 나누는 명료함도 해석학적 식견이 한몫한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마음을 설레게 하는 고상한 밀어(密語)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사랑을 종교적 실천이나 연인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으로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철학적 문제로 사유하는 데까지 나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다 보니 이른 봄 지표면은 녹았으나 땅속은 아직도 얼어 있는 것처럼, 사랑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실천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사랑도 소유 개념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소유하거나 말거나 하는 이기주의로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삶과 사랑은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동시에 타자에게도 성실해야 하기에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당이 그토록 강조하는 것처럼, 삶을 성실하게 산다는 것은 속이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과 타자에게 속이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시기, 질투, 분노, 증오를 넘어서야 합니다.   철학적 사랑은 나의 속이나 남의 속을 모두 만족시키는 순수함에 있기에 어렵습니다.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빼앗는 사랑이 아니라 온전히 내어주는 아가페적 사랑을 높게 평가합니다. 흔히 아가페적 사랑은 성서적, 기독교적 사랑으로 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랑의 정수를 꿰뚫어 본 이당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추구하고 실천에 힘쓴다면 사랑은 모든 덕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맑은 영혼이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사랑 안에 있다는 해석학적 논리도 두드러집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으면서 유한한 인간은 그저 그러한 사랑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음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적 사랑을 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우애’(philia)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에로스(eros)는 곡해되었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인 스토르게(storge)도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인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다 신의 자녀로서 신의 뜻에 따라 사랑(agape)을 할 수 없다면, 우정 어린 마음으로 사람을 사귀는 것만큼이라도 귀중하게 여기며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처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황량한 사막과도 같습니다. 벗을 뜻하는 한자어 우(友)는 두 친구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형상을 본뜬 것입니다. 꼭 벗이 아니더라도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많아야 합니다.   필리아는 우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랑까지 아우르며 심지어 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각별하고 사심 없는 사랑도 포함합니다. 철학과 사랑의 긴밀한 랑데부(rendezvous, 밀회)가 잘 드러나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을 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이 사랑의 개념과 감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합니다. 이 개념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넓고 깊게 할 수 있는 만큼 사람이 달라집니다. 그 사랑 속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만큼 실천하게 됩니다. 실천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만큼이 그 사람의 깊이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질은 이와 비례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랑받은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당은 사람 안에 사랑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형이상학적 통찰에서 사랑을 말해줍니다.   ※아포리즘(aphorism) 명언, 격언, 잠언과 같이 신조나 이치를 기억하기 쉽게 간결하고 명쾌한 표현으로 쓴 글을 일컫는 말이다. 주로 작가의 체험적 내용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것이기에 그 작가만의 개성과 지적 역량을 통해 사물의 핵심이나 이치를 깨달으며 교훈도 얻는 묘미를 맛보게 된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3
  •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인간은 애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빵은 육체의 양식이요, 사랑은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는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사랑을 먹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의 주성분이다’라고 철학자 피히테는 말했다.”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p.21. 이당 안병욱 교수와 부인 김광심 여사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물질만 풍요로우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 즐기는 시간과 공간, 대상과 장소를 보면 사물성이나 물질성이 많은 것도 이를 반영합니다. 안병욱은 인생철학자로서 삶을 우선으로 하는 삶의 경험적 이치를 잘 설명해 주는 생철학자입니다. 그는 인생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세 가지 원리로 사랑, 믿음, 창조를 거론합니다.   안병욱은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은 인생의 흐뭇한 향기다. 사랑은 인생의 따뜻한 햇볕이다.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자칫 사랑을 감정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오히려 사랑은 정신의 토대가 되어야 하고, 그것 없이는 삶의 자양분과 원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생의 모든 힘을 뿜어내는 정신이자 정신의 깊은 속입니다.   게다가 정신도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인간의 이성적 행위로서의 책임과 이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마저도 가능해집니다. 이성(ratio, nous, reason)의 개념 안에 계산, 수치, 계량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적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안병욱은 “사랑은 인생의 위대한 가치요, 근본적인 가치요, 영원한 가치다. 사랑 없는 인생은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다. 산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命題)를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사랑절대주의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판별하는 기준, 윤리적 잣대입니다. 안병욱은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고 있는 것은 사랑-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 체득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이자 인간의 지표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사랑을 왜 공부해야 할까요? 그것은 삶과 사랑이 동근원적(同根原的)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둘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의 장(場)이 같다는 말입니다(『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21-23 참조).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30
  • 진실한 물음, 분명한 대답: 물음 주체, 삶의 주체인 ‘나’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尊貴)한 것이 무엇이냐. 온 천하를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최고 가치가 무엇이냐. 제일 값지고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나다. 왜냐,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다. 무수한 너가 있고 무수한 그가 있다. 그러나 나는 오직 하나뿐이다.” 『지혜롭게 사는 길』, p.13.   안병욱 교수, ‘양구인문학박물관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전경   [타임즈코리아] 인간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철학적 물음 중의 하나가 ‘나는 오직 하나다’, ‘똑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라는 난제(難題, aporia)일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현상으로 의식해서인지 존재 주체인 나에 관해서 묻지 않습니다. 안병욱은 나에 대해서 ‘자기’, ‘자아’(自我), ‘존엄한 생명’, ‘고귀한 인격’(人格), ‘아름다운 영혼’, ‘자각적(自覺的)인 주체(主體)’, ‘양심의 존재’, ‘이성(理性)의 빛’, ‘자유로운 혼’, ‘불성(佛性)의 그릇’, ‘만물의 연장’, ‘독자적 개성’과 같이 여러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의미하는 공통점은 ‘나’란 도구적 존재나 매매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의 개별성은 자꾸 상품으로 전락하거나 소모품(소비재)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주체요, 인격이요, 영혼이요, 독존적 존재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는 그냥 시류에 떠밀려서 혹은 맥락에 맞춰서 그때그때 자기의 자신을 팔기도 하고, 또 다른 자기[他我]를 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자아의식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이 부재한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규정하거나 나에게 명령 내린 대로만 살아가면 타율적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안병욱은 시지포스(Sisyphus)의 용기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의 정열을 갖고 살라고 당부합니다. 자기에 대한 자부심, 곧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자기 자신임, 자기(selbst, self)라는 것을 반드시 인식시킴으로써 타자와는 구별된 자기 인생을 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부심과 용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용기도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자기 인식과 자기 자신의 과신과 몰지각에서 비롯된 오만이나 교만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만용입니다.   ‘나’에 대한 인식과 ‘우리’라는 공동체성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 사회는 그 어디에서도 정도를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집단화하거나 ‘우리’를 이익만 생각하는 패거리로 왜곡·곡해합니다. 진정한 자기에 대한 물음도 없는 채 공격, 비난, 혐오 같은 것을 행하는 데에는 민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안병욱이 말한 ‘나’에 대한 존귀한 존재론적 지위·위치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29
  • 인생의 지혜는 삶보다 먼저 옵니다
    “보람 있는 인생, 성실(誠實)한 인생, 아름다운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밝은 지혜가 필요하고 총명한 슬기가 있어야 한다.” 『지혜롭게 사는 길』 서문 중에서 안병욱 교수 생전 모습   [타임즈코리아] 안병욱의 “성(誠)의 철학”은 ‘삶을 이루고 말[言]을 성취하는 것[成]’을 뜻합니다. 모름지기 인생이란 말이 자기를 표현한 현실입니다. 수많은 말이 세계와 관계, 그리고 사물을 지칭하고 뜻을 부여합니다. 그중에서 안병욱이 강조하듯이 지혜란 인생을 바르고 뜻있게 살기 위한 올바른 판단력과 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인생의 방향감각을 상실한 듯합니다. “정신의 진주”, “마음의 등불”, “총명한 슬기”를 통해서 삶을 잡지 않아서입니다. 형이상의 길보다 형이하의 길을 쫓아가기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이성의 길보다 욕망의 길을 추구하기에 드러난 결과입니다. 도(道)를 굳이 진리의 길과 죄악의 길로 나눈다면 사람들은 바른길(正道)이 아닌 죄악의 길로 접어들어 사악한 길(邪道)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정도(正道)를 알려주고 그 길로 인도해 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인생은 부단한 선택의 과정이다”라고 말한 그의 생각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Jean-Paul Sartre)와 흡사한 실존주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인간은 매사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실존이 결정됩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정도(正道)를 걷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인간이 단 한 번 태어나 살아가기에 연습은 불가능합니다. 이를 알고 있다면 인간답게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됨의 실현이고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안병욱의 철학적 통찰이 수많은 철학자의 연장선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차원입니다. 정도(正道)를 가는 사람은 자기다운 길을 걷는 데 충실합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지 타자의 것, 모호한 누군가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를 통해 조화의 꽃을 피워 냅니다.   지혜의 철학, 어쩌면 동어반복일 수 있는 'philo-sophia'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임을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지혜를 추구하며 올바름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부단히 노력하는지를 반성하기 위함입니다. 이에 안병욱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옳은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옳은 길을 걷고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이 물음 앞에 서야 한다.”(지혜롭게 사는 길, 삼육출판사, 1977, pp.10~12.)   김대식 박사   안병욱 평전의 저술자 김대식 박사는 박수근과 이해인이 탄생한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강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였으며 종교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서울신학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숭실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 출강했으며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종교연합(URI-Korena) 지도위원,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씨알의 희망과 분노』(공저),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 성서해석 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식탁의 영성』(공저), 『망각의 해석학』(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생태 영성의 이해』,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예수와 신앙 언어』.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그리스도교 감성학』, 『함석헌의 평화론』, 『간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아시아 평화공동체』(공저), 『인문학적 상상력과 종교』(공저)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종교 간 고통에 대한 해석학적 성찰과 유동적 종교」,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과 생명미학적 정치」 등이 있다. 주요 관심분야는 아나키즘과 현상학적 인식론 및 존재론을 기반으로 하는 함석헌의 철학과 사상,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 해석, 기술철학과 정치미학, 해체구성적 종교이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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