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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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교수의 강연과 새롭게 만나는 『안병욱 인생철학』
    [타임즈코리아] 안병욱 선생님의 명성에 이끌려 (神이 내려준 직장이라는 한국은행을 퇴직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에 입문함으로써 인생의 경로가 바뀐 ‘철학 서생’이 서평을 쓰게 되어 퍽 기쁩니다.   칠판에 이당체를 쓰며 웅변하듯 열강하시던 모습, 사색하는 눈매를 살짝 감춰주는 굵은 뿔테 안경, 실크 넥타이를 애용하시던 풍모, 교정을 한가로이 산보하실 때 구두 앞쪽을 조금 든 채 땅 위를 내딛는 걸음걸음, 인품의 氣가 뼛속 깊이 전달되는 안 선생님의 강의가 새록새록 회상됩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삶을 잘 그려낸 책이 『안병욱 인생철학』입니다. 아마 안병욱 선생님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정리했어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서술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유난히 ‘生’이라는 낱말이 많습니다. 책의 제목에도 ‘生’, 부제인 ‘생철학자 안병욱’에도 ‘生’이 있을 정도로 안병욱의 생철학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니체,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을 통하여 안병욱의 생명 사상을 노래합니다.   안병욱 사상의 중심인 『中庸』의 誠에 바탕을 둔 생활철학 속의 ‘生’을 앞세웁니다. 『中庸』에서 和(평화)의 요소를 찾아 안병욱의 생명 평화 사상에 접근한 태도가 눈에 띕니다. 『中庸』의 핵심인 誠이 和로 나아가는 길을 밝힌 점이 훌륭합니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다’는 대명제 아래에서 성찰하는 삶,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갈 것, 인생은 학교라는 인생학, 철학은 죽음의 연속이라는 안병욱의 생철학을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의 50권의 저작을 두루 섭렵한 저자가 안 선생님의 말씀에 철학적 담론을 입혀 원저자(안병욱)의 사상을 빛내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설법에 따라, 안병욱이 말하는 방식으로 안병욱의 철학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본디 사상에 윤기 나는 해설을 붙여 책 읽는 美感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독자가 안병욱과 함께 철학적인 호흡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안병욱 선생님이 환생하시어 나에게 철학 강의를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안병욱 선생님이 『사상계』를 통하여 시대의 고난·아픔에 동참한 일을 상세하게 기술한 점도 칭찬할 만합니다. 독재정권에 직접 맞서기보다 세련된 저항 의식을 철학적 언어로 전달한 안병욱의 고뇌를 엿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은 학사 학위 소지자로서 박사학위를 지닌 자들보다 잘 가르쳤습니다. 편협한 전공과목을 내세우는 학자라기보다 삶의 길[道]을 제시하는 선비이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선비가 아니라, 땅 위의 민초들을 계몽하기 위해 밤낮없이 강연 다니시던 대중적인 선비 안병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비의 참모습을 미끈하게 묘사한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김승국 박사(평화 연구·활동가, 숭실대학교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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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병욱 평전
    2021-03-02
  •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 안병욱 평전 출간
    ‘안병욱 인생철학: 생철학자 안병욱 철학평전(김대식,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1년 1월 31일)’이 출간되었다.   ▶ 저자 김대식 박사 인터뷰   이 책은 생철학자 이당 안병욱 선생의 평전이다. 그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쫒아가며 그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흐름과 철학을 시종 여일하게 톺아가며, 그 철학과 철학적 인생을 조명하는 ‘철학평전’이다. 안병욱은 생애 전체를 기울여 청중과 독자들에게 ‘철학이 있는 삶’을 강조하고, 그의 철학대로 살아갔다. 이런 점에 주목해 그의 생애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의 삶이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 책은 ‘인생철학’을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까닭은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젊은이들의 인생 스승으로 살았던 이당의 삶과 철학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로 들어 선 오늘날 무엇보다도 철학이 갈급하다. 이런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인생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안병욱의 철학을 크게 성(誠)의 철학, 중용(中庸) 철학, 생(生)의 철학, 실학(實學) 철학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그의 수십 편의 저작과 그가 탐구하여 용해해낸 철학자들의 사상까지 아우름으로써 안병욱 철학의 전모를 감상할 수 있게 하려고 힘썼다. 다시 말하자면 ‘안병욱 철학 입문서’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이당(怡堂) 안병욱(1920~2013)은 누구인가   지금 안병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정신의 빈곤이 두드러지는 시대, 생명과 생활의 좌표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그의 철학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철학적 생애에 관한 이 책을 ‘인생철학’이라는 ‘큰말’로 명명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철학은 크고, 넓고, 깊다. 그는 대중철학자로서 시민들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고 각자의 생명의 샘을 발견케 한 계몽철학자다. 나라와 민중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대에 도산 안창호가 외쳤던 민족개조론의 사상이 그에게도 다급했다. 일본 유학 시절 서예를 통해 동양미학적 심성을 기르며 윤동주와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도 생각하는 시민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귀국 후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진리를 설파하고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통하여 대중을 계도하였다. 함석헌과의 만남과 흥사단아카데미 활동도 그러한 삶의 노정이었다. 그는 중용철학을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생철학, 실존주의철학, 실용주의철학을 대거 흡수하여 폭넓은 사유체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결국 대중 혹은 시민이 “어떻게 ‘올바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안병욱은 이를 위해서 삶에 정성을 다하는 성(誠)의 철학과 성의(誠意)의 철학적 삶을 살라고 대답한다. 나아가 철학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이어가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당은 대중을 위한 생철학자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 출판사 서평   행복한 인생을 향한 바른 길, 안병욱의 인생철학       삶은 원본적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삶은 인간이 직접 체험되는 현장이며 실존이 논증되는 광장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죽음조차도 이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을 좀 더 성실(誠實)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함(philosophieren)을 대중들과 함께 나누며 연장시켜 간 철학자가 이당(怡堂) 안병욱(安秉煜, 1920~2013)이다.   그는 자칫 사변으로 흐르기 쉬운 철학적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탁월함뿐만 아니라, 좋은 언어 구사력까지도 겸비한 철학자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넘나들며 시대의 민중이 갈급해 하는 실천적 사유의 바른 길, 더 나은 길을 『사상계』를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역설했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직접 강연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의지를 열어 주었다.   안병욱은 생애 동안 50여 권의 수상록을 남긴 저술가요 수필가(문필가)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수백 회의 대중강연을 통해, 회색빛 시대를 관통하여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참되고 성실한 인생을 지향할 수 있게 한 대중 강연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당의 이력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도산 안창호 시절로부터 이당의 시대로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안병욱은, 지금도 살아서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김형석 선생, 그리고 천재적인 문필가여 강연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어령 선생 등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글과 강연으로 이끌어온 우리 사회의 석학이요, 스승이었다.   이당을 만든 철학, 이당이 만든 철학   그의 철학은 동서양을 아우르고 넘나든다. 동양철학은 공자,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도산 안창호와 맞닿아 있다. 서양철학은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슈바이처, 우나무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생철학적 지평에 걸쳐 있다. 이를 종합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한 이당의 철학은 생(生)철학 혹은 성(誠)의 철학으로 귀결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지류를 폭넓게 수용하여 독창적으로 펼친 이당의 철학을 평전의 저자는 좀더 세분화하여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성철학(誠哲學), 중용철학(中庸哲學), 생철학(生哲學), 실학철학(實學哲學;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 등의 실용주의까지)이 그것이다.   오늘날 철학의 유사상품이나 파생상품은 많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철학과 철학함은 드물어 보인다. 철학함은 단순히 빛나는, 번득이는 지혜를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학자의 삶으로 구현해 보임으로써 그 철학(함)을 입증하는 데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관성과 실천성을 겸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삶에 녹아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사유능력을 통한 엄밀한 비판정신 또한 살아 있어야 한다.   비판은 화자의 모범적 시범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국은 비난일 수밖에 없으니, 비판정신이 살아 있는 철학을 이어나가고, (철학자가) 죽어도 그 철학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력, 삶과 뜻에 정성을 다하는 성의(誠意)가 있어야 한다. 허언(虛言)을 하지 않고 알맹이가 있는 삶인 무실역행(務實力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용철학, 곧 절제와 지족(知足)도 중요하다. 이것이 모두 이당에게 해당한다.    ‘성실’한 삶을 가르친 이당   사람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한 것인데도,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그것에 정성을 기울이고[誠]이고 힘쓰는[務實力行] 생생한 삶[生]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대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기보다 오히려 차고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풍요속의 빈곤감이 더욱 커진다. 사람들의 행동이 나날이 그악스러워지고, 해마다 고립되어 가는 까닭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각자의 삶을 올바른 인생으로 완성시키면서, 또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되려면, 그 모든 것이 ‘중용’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은 사실상, 어려운 것 가운데서도 어려운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또한 중용은 가까운 데서, 낮은 데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곳곳에서, 한가운데서, 작은 데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당은 그 점을 알려준다. 그 점을 깨닫게 한다. 그 길로 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과 동력을 준다.   사람은 저마다 삶의 행복을 꿈꾼다. 생각을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불행하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회나 국가도 그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꿈꾼다. 다른 말로는 사회와 국가의 행복이다. 물론 이당이 말한 ‘올바로 사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이다.   철학은 행복한 삶(eudaimonia)의 길을 지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행복한 삶은 좋은 삶, 참살이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그래서 철학함은 나를 먼저 반성하고 타자를 배려하며 세계를 전망하여 참다운 관계를 설정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당의 철학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전체를 관조하면서 충실, 만족, 충족, 자족하라고 말한다. 그 처음과 끝은 관조적(contemplative) 삶에 닿아 있다. 시민이, 서민이, 민중이, 민초가 일상에서 중용을 찾고 중용을 살아가는 가까운, 쉬운, 평범하고도 비범한 길이다.   성실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     이당은 이 모든 철학함의 원리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철학함으로서의 공부, 삶의 원리에 대한 공부로서의 철학은 곧 위기지학과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수단으로서의 공부나 처세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독실(篤實), 무실, 결실이 완숙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고 풍요로움을 나누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공부나 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시대적 살핌으로 나아가는 까닭이다. 철학의 쓸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만이 아니다. 말을 이루어야 한다[言+成=誠]. 이당의 철학에서 유독 ‘성’(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당은 자신의 저서 『키에르케고르』(1967)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인생의 자전 제1장에 무슨 단어부터 먼저 쓰겠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성실(誠實)’이라고 대답하겠다. 나는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싶다. 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나 스스로를 대할 때나, 나는 성실하기를 힘쓴다. 우리가 첫째로 꼽아야 할 인생의 공부과목은 성실하기 공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당 안병욱의 생철학을 고백적으로 잘 드러낸 말이다. 오늘의 우리 삶이 첨단화하고 복잡다단해진 만큼 성실 이상의 정보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정보와 기술은 결국 성실, 성실한 공부로서 갈무리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할 분이다. 그런 점에서 성실이야말로 최신의, 최고의 처세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그러므로 어떻게 성실할 것인지를 이당의 생애, 이당의 철학은 지시한다.   철학평전, 안병욱의 인생을 철학으로 톺아 가다!   『안병욱 인생철학』 은 안병욱 평전이되, 그의 생애사를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그의 철학을 톺아간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곧 그의 삶이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그의 생애를 좇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철학평전’이다. 누구에게든 ‘인생철학’은 있게 마련이지만, 철학자의 생애를 통틀어 ‘인생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아가, 그 철학자의 평전을 ‘인생철학’이라고 명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스승으로서 이당의 인생을 녹여내었기에 ‘인생철학’이고, 오늘 철학이 갈급한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때문에 ‘인생철학’이다.   그는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 “청무성(聽無聲)”을 이야기하였다. 죽음이 들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되뇌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 아닐까?   ‘죽음’이란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를 내려놓고, 비워가고, 걸어가는 것, 그렇게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라 원시(元始)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붙잡으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이당이 쓴 수많은 글들은 물론이고, 그가 공부한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당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촘촘히 뜨개질하여 ‘이당 안병욱의 철학, 철학자 안병욱의 사상’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저자(김대식)는 “이 평전은, 그의 아호가 뜻하는 것처럼 철학의 기쁜[怡] 터[堂], 행복한[怡] 철학의 집[堂]을 짓기 위한 초석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이제 이당의 더 큰 철학의 집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그의 철학적 삶을 이어나갈 동학(同學)들도 말이다.”라고 밝힌다.   ‘삶’이 ‘생활’이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당의 철학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한 삶, 아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이당은 산다는 것은 큰 뜻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야로 분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뜻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니 허송세월하지 말고, 대망(大望)과 대지(大志)를 품고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살라고 역설했습니다. (30쪽)   이당의 철학은 생철학으로 수렴됩니다. 그의 철학은 성(誠)을 기반으로 하는 성철학과 중(中)을 바탕으로 하는 중용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철학은 단순히 이론이나 담론으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사유[思], 그리고 일을 함에 있어 실제에 힘쓰는 것[務實],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 진실된 마음을 갖는 것[實心], 힘써 실천하는 것[力行]으로 이어집니다. (40쪽)   안병욱이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는 것은 사람-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 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야 가능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으로 인간의 지표로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50~51쪽)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사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66~67쪽)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의 길로서,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의 지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중략)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이당은 이렇게 풀어서 말합니다.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 (96~97쪽)   수많은 대중들에게 강연을 다니면서 유명세를 탔던 이당은 대중 철학적 언어에 탁월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당 역시 강연을, 말씀을 전달하는 미적인 것, 그 언어를 전달하는 예술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당대의 달필이요 유려한 언어와 목소리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분명 천분(天分)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분수, 곧 자기의 몫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몫을 다한 철학자입니다. (116쪽)   “일명일생(一命一生). 인간은 유일성(oneness)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onceness)의 생애를 삽니다.” 이당의 말입니다. 그 안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이 있습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관점, 곧 인생관이 분명해야 후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관이 없으면 대충, 대강 살다 가게 됩니다. 인생의 원칙, 삶을 대하는 정신 자세, 도반과 사물을 향한 마음가짐이 없이 인생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생철학, 생활철학, 생철학이라고 합니다. (136쪽)   이당은 “존재는 표현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표현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생은 인간에 의해서 진실을 표현하고 삶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생은 표현입니다. 생은 내적으로 의미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을 산다는 것은 저마다 제 소리를 하고, 제 노래를 부르고, 제 말씀을 하고, 제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의 고유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155쪽)   이당은 “학(學)에서 시작하여 행(行)으로 끝나야 한다. 학의 목적은 각(覺)에 있고, 각의 목적은 행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에서 비롯됩니다. 참됨과 성실함[誠]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리라 할 것입니다. 성실한 행위가 없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의 근본이자 성의 본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속이고 타자도 속이는 삶은 가치가 없으니 말입니다. (200쪽)   이당의 미학의 특징은 다채미(多彩美)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212쪽)   이당은 와세다대학 시절에 서도에 관심이 생겨서 동양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금석학(金石學)과 문자학(文字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석이나 종(鐘) 같은 데 새겨진 문자는 물론 문자의 구조를 알기 위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학생 때 점심값을 아껴 가면서 몇 해 동안 사 모은 서첩들과 많은 장서를 한 권도 건지지 못하고 이북에 버려 둔 아쉬움, 그리고 한국전쟁 잃어버린 책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글에서는 그의 책사랑과 학자로서의 간서치(看書癡)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225쪽)   이당은 생즉로(生則路), 생즉도(生則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단 한 번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당은 ‘성(誠)’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였습니다. 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던 현대 한국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이당은 근(勤)과 인(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240쪽)   <본문 - 안병욱의 어록 중에서>   “인생은 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학이 인생의 시발점이다. 학의 목적은 지(知)요, 지의 목적은 행(行)이요, 행의 목적은 성(成)이다. 學→知→行→成, 학(學)에서 시작하여 성(成)으로 끝나는 행동의 체계, 이것이 인생이다. 학은 모든 위대한 것의 원천이요, 시발점이다.”(안병욱, 『논어인생론』) (본문, 38쪽)   “이 혼탁한 난세를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투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정신이다.”(안병욱, 『사람답게 사는 길』) (본문, 38~39쪽)   “우리는 지족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지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지족은 행복의 길이요, 부지족(不知足)은 불행의 길이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선경(仙境)도 되고 범경(凡境)도 된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본문 106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타락한 시장 사회의 원리가 작용한다. 불성(不誠)과 불화(不和)가 지배한다. 부패한 상인 정신이 휩쓴다. 나의 이(利)에 눈이 어두워 남을 수단으로서 이용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조우(遭遇)가 있었다. 상호 불신 속에 인간적 화목을 잃었다. 불의(不義)의 재(財)를 탐내고 부정의 이(利)에 혹하여 양심이 마비되고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곧은 마음과 바른 정신을 잃었다.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망각한다. 속임수와 권모술수가 성행한다. 타인을 나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다.” (안병욱, 『빛과 생명의 안식처』) 본문 107쪽)   안병욱의 인생관 : 생즉도(生卽道): 산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즉학(生卽學): 산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생즉수(生卽修): 산다는 것은 부지런히 자기의 재능과 인격을 갈고 닦는 것이다. 생즉동(生卽動): 산다는 것은 가치창조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본문 130쪽)   “우리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무책임한 향락의 유흥장이 아니요, 심심풀이로 하는 도박의 장소가 아니요, 일확천금에 골몰하는 탐욕의 싸움터가 아니다. 인생은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엄숙한 수련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안병욱, 『때를 알아라』) (본문 145쪽)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본문 209쪽)   ▶ 목차   추천사 김형석, 이어령 들어가는 말 이당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   Ⅰ. 성(誠)철학  1. 인생의 지혜는 삶보다 먼저 옵니다!  2. 진실한 물음, 분명한 대답: 물음 주체, 삶의 주체인 ‘나’  3.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4.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  5.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6.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공부  7.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8. 성의(誠意)가 있는 삶을 위해 힘써야[務實] 합니다!  9.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10. 행복은 삶에 정성을 다한 만족감입니다!  ● 이당의 성실(誠實)철학   Ⅱ. 중용(中庸)철학  1.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2.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3.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4. 시중(時中)하면 이미 군자입니다!  5. 평화와 조화와 화목의 자리가 중용입니다!  6. 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7. 성실의 덕을 살리고 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 이당의 중용(中庸) 철학   Ⅲ. 생(生)철학  1. 인생은 예술 이상의 예술입니다!  2.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3. 성찰하는 삶이어야 살 가치가 있습니다!  4. 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5. 진실과 진리로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6. 인생은 ‘창조적 자기 표현’입니다!  7. 생은 사유와 행동의 지속입니다!  8. 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  9. 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燃燒)하는 일입니다!  10. 인생은 한 권의 위대한 책입니다!  ● 이당의 생철학   Ⅳ. 실학철학과 실용주의  1. 철학의 멸시가 철학입니다!  2. 지성일관(至誠一貫)의 삶을 사십시오!: 도산 안창호와 이당 안병욱의 만남  3.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삽시다!  4. 우리가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5. 위대한 국민적 성격과 정신만이 살길입니다!  6.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7. 미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8. 한창필연불유진(閑窓筆硯不留塵): 이당의 문예 미학과 서예 미학  ● 이당의 실용주의와 실학 철학    나오는 말  이당(怡堂)이라는 별호처럼 아름다운 그의 철학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록 1. 이당 안병욱 연보  부록 2. 이당 안병욱 저작 및 기고문 목록  회고의 글 / 김선욱 / 박인주 / 이동원 / 황보윤식  감사의 말 / 안동규   ▶ 저자 소개   <김대식> 1967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M.A.),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Ph.D.),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Ph.D.)에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등에 출강하면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학술위원장 및 안병욱아카데미 원장,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과 (사)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 사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절대자유를 갈망한 사람들』(공저),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등이 있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1-01-18
  • 미(美)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미는 영원의 기쁨이라고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노래했다. 인간에게 풍성한 미의 세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미는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구원이다. (…) 인간이 지니는 보람과 가치의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다시없이 소중한 것의 하나가 미의 세계요, 아름다움의 왕국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58.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슴속에서 나온다. 인생이 깊은 것은 심장의 산물이다. 인생의 가장 성실한 것은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 가슴은 하나님의 출장소다. 가슴은 인생의 지성소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7, 아름다운 창조』, 교육도서, 1988, p.67. 이당의 미학은 다채미(多彩美)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美)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장엄합니다. 위대하고 웅장합니다.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장엄하고 웅장함에서 풍기는 미를 느끼게 합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좋아했던 이당은, 그 음악가로부터 우아미, 섬세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상적인 미의 원형을 발견하고, 조화와 균형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당은 인간이 지닌 정신의 미, 성격의 미, 인품의 미를 외형의 미, 용모의 미보다 높게 쳤습니다. 이는 성격을 닦고 인품을 기르고 심전을 풍성하게 가꾸는 데서 풍기는 향기입니다. 겉모습을 다듬고 외형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정신의 미, 인품의 미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쾌감은 무관심한 만족, 곧 직접적 이해관계나 실제적 목적에서 떠난 순수한 만족감입니다. 미에는 욕망이나 욕구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순수한 만족감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를 목적 없이 목적에 적합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미는 순수한 쾌감이자 정신적 만족감입니다. 미를 통해서 인간은 정신적 구원의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미는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미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하는 세계입니다. 해탈 아닌 해탈의 세계입니다.   이당은 여성에게서는 우미(優美, grace; Anmut), 남성에게서는 위엄미(威嚴美; dignitas)가 풍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미의 극치는 정신의 미와 관능의 미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미는 생명적이고 건강하고 영속적인 데서 드러납니다. 숭고미는 엄청나게 크고 무한한 힘을 지닌 대상에게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미적 감정입니다. 밤하늘, 망망대해, 험산 준령을 바라볼 때는 압도감을 느낍니다. 숭고함은 영원과 무한의 상징입니다. 우미는 조화와 균형, 숭고미(sublime; Erhabene)는 조화와 균형을 깬 미를 가리킵니다. 비극의 미(비참의 미, 혹은 비장미)라고 하는 것은 숭고의 감정이 고뇌나 비극과 결부될 때 느끼는 미적 감정입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구분하였습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서 정적이고 합리적인 미의 표현인 건축에 의한 조형예술의 상징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으로서 음악과 무용에 의한 동적이고 격정적, 비합리주의적 미를 나타냅니다.   이당이 미에 관해서 기술한 내용을 일별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는) 인간의 영원한 기쁨이요 행복한 도취요 순수한 만족의 쾌감이요 인생의 가장 흐뭇한 보람이요, 목적이요, 가치다.” 따라서 미는 생명적이어야 합니다. 다양함 속에서의 통일성, 질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움, 그리고 균형감 있는 생의 충일감(充溢感)을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미는 생명에 건강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생을 저해하거나 손상하는 미, 혹은 생을 피곤케 하는 미는 참된 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강하고 건전한 미의식을 가지고 생명에 기쁨을 주는 미를 탐구하고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p.58~7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12
  •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46. 생은 체험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을 체험, 이해, 표현으로 본 딜타이, 힘에의 의지로 본 니체, 그리고 생의 약동으로 본 베르그손, 이들의 철학적 핵심어는 생, 삶입니다.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살 것이냐, 내용이 실(實)한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진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바탕에는 적어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유익하다는 마음(利心)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학이 실(實)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중점을 둔 철학으로 발전한 것도 삶을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실증입니다.   이당은 “무실(務實)의 반대는 부허(浮虛)요, 허위(虛僞)요, 역행(力行)의 반대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이요, 형식주의요, 외화내허(外華內虛)다. 거짓과 공리공론과 외화내허의 사회는 허약한 사회요, 그러한 생활은 허망한 생활이요, 그러한 인간은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실(實)은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이며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거짓은 속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학은 사(事), 현상, 보이는 것, 사실을 중시합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실은 넉넉함, 부강함, 민생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울 좋은 명분만 남발되는 사회에서 알짬, 알참, 꽉 참이 절실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지(知)가 아니라 행(行)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행동(pragma)과 실천에 방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두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성이 없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참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나라의 철학이자 사상의 근간이 된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38~24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8
  • 우리는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결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다.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무용(舞踊)보다도 씨름과 비슷하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한다. 특히 내가 나하고 항상 싸워야 한다. 인생은 자아를 실천하는 사명의 장소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진지한 생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생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향락이 아니고 일이요, 활동이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44.   인생에서 자기의 생명을 끊임없이 개조하는 일은 인간의 과제입니다. 삶의 개조, 혼의 개조를 부르짖은 춘원 이광수의 말처럼, 인간은 혼을 개조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생의 예술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당의 메시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축조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그것이 생의 의의입니다.   지성인은 비판적 양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대학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자신과 사물을 깊이 탐구하는 정신, 분석적으로 사고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는 정신을 지닌 지성인들이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을 넘어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개조(改造)”에 있습니다. 인간 형성과 주체(자아) 및 객체(타아)를 개조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사람, 이성적 사유, 탐구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지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의 과정에서 창조와 지성은 나란히 가야 합니다. 생은 창조적 활동이요 날카로운 인식과 성찰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배워서 자신을 교정하고 개조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 곧 자아와 인격 전체를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밭의 계발, 주체와 객체의 개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칸트(I. Kant)가 주창하는 선한 인격과 듀이(J. Dewey)가 내세우는 좋은 환경과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칸트의 도덕제일주의와 듀이의 지식제일주의의 융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체와 개조에 중심을 두는 도덕제일주의와 객체의 개조에 역점을 두는 지식제일주의 혹은 직업주의교육은 양분될 우려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앙리 베르그손과 존 듀이가 역설한 삶의 도구로서의 지성, 기술적 지성, 창조적 지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지성으로 살아가려면 객관적 대상을 조용히 바라다보는 관상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도 균형 있게 갖춰야 합니다.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 도덕적 지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건설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 대학과 사회가 모두 민주지성의 탄생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칸트는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바람직한 지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창조적 지성과 더불어 비판적 사고능력, 그리고 관조적 지성을 겸비하려는 생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p.44~5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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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성일관(至誠一貫)의 삶을 사십시오
    “진리(眞理)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正義)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 적어도 동포끼리는 무저항주의를 쓰자. 때리면 맞고 욕하면 먹자. 동포끼리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자. 오직 사랑하자. (...) 너도 사랑을 공부하고 나도 사랑을 공부하자. 남자도 여자도 우리 다 서로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우리 민족은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안병욱 외, 『도산 안창호 평전』, 도서출판 청포도, 2004. 이당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를 지극한 정성[至誠]으로 인생을 살았던 인물로 평하고 논합니다. 지성일관은 도산의 인격이요, 생활 원리입니다. 이당이 도산을 사상가이자 수양인(修養人)으로 평가한 것도 그가 지성 위에 기틀을 다진 삶으로 일관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당이 『중용(中庸)』의 성(誠)에 따라 학문적 생애를 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도산이 가장 사랑한 것을 꼽으라 하면, 첫째는 진실이요, 둘째는 젊은이요, 셋째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는 민족과 민중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기 혁신이나 도덕적 개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거짓말, 속임이 가장 큰 폐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공론공담(空論空談)도 문제였습니다. 입만 살아서 떠들어대고 실천실행이 없이 비판만 하는 민중을 간파하고 그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실역행(務實力行), 곧 “참을 힘쓰자, 행을 힘쓰자”라고 하면서 각 개별적 민중이 성(誠)의 인격적 존재가 되어야 민족의 중병을 막을 수 있다고 부르짖었습니다.   “이 모양으로 일상에서 반복 실천하는 동안에 습(習)이 성(性)이 되어서 개인적으로 성실하고 거짓 없는 도덕인의 만족을 얻어 더할 데 없는 법열(法悅)을 느끼게 되고 밖으로는 접하는 사람의 신임과 존경을 받아서 능히 그들의 의지할 바가 될 수 있으니, 이 지경이 깊이 들어가면 이른바 지성(至誠)이 되는 것이라, 지성의 인격은 곧 성인(聖人)의 지경이다. 지성이 감천이라 하거니와 신(神)과 사람을 감동하는 힘은 결코 언변이나 물질이 아니라 진실로 지성이다. 지성의 사람은 무언중에도 능히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질 것이다.”(안병욱 외, 『도산 안창호 평전』, 도서출판 청포도, 2004, p.231.).   이와 같은 지성일관의 사상은 이당의 생철학에서 많이 등장하는 참, 성실, 진실, 혹은 실(實)의 개념과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1920년 가을 흥사단 입단문답을 참조하면 도산과 이당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이에 이당이 진실함, 거짓과 속임이 없음을 자신의 철학과 실천적 지침으로 삼은 것도 도산의 영향이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산에게 있어 수양은 고뇌와 수련을 통해서 배우는 것인데, 서양의 아스케제(Askese, 단련 또는 훈련을 통한 자기 절제)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과 민족의 운명은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도산은 민중의 덕력(德力), 지력(知力), 체력(體力)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력이나 병력 같은 것은 이 힘의 조직이나 결과로서 나타날 뿐입니다. 물론 당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도산을 비전론자(非戰論者), 혹은 점진론자(漸進論者)라고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도산의 독립운동 방법을 마뜩잖게 여겼습니다.   성의 수양, 곧 갈고닦음은 한순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산은 “어음(語音, 음운)이 분명한 것, 말하는 속도와 음량의 조절 등 (...) 그가 한 잔의 차를 들이마시는 데도 다 고행 수련의 자취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당은 대중강연철학자로서도 탁월한 면모를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이당의 선천적 능력일 수도 있으나, 도산을 빼놓고는 판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당이 기억하는 도산 안창호의 모습은 매사에 정성일관(精誠一貫)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붙잡혀 수감생활을 할 때도 그는 위국지성(爲國至誠)의 사람이었습니다.   도산은 성내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었습니다. 도산은 선한 자에게는 자애(自愛)로운 마음으로 대하는 자비상(慈悲相)의 사람이었고 정의돈수(情誼敦修)를 외쳤습니다. 정의(情誼)란 서로 사귀어 친해지는 정(情)을, 돈수(敦修)란 돈독히(도탑게) 닦고 연마한다는 뜻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도산은 이당에게 있어 사랑하기 공부의 본으로 삼을 만했습니다. 이당의 밝고 평화스러운 삶,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바로 도산으로부터 감화받은 것입니다.   도산은 자기가 덮는 이불도 수양동지회 흥사단(興士團)의 무실(務實, 노란빛, 참)역행(力行, 붉은빛)을 본떠서 두 빛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참되기 위해 노력하고 그러한 삶을 힘써 행하려고 하는 삶의 자세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즉 걷기, 머물기, 앉기, 눕기 등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한발 더 나아가 정결한 삶의 원칙으로도 승화되었습니다. 도산의 의복, 식사, 거처 등에는 반드시 일정한 법도가 있었습니다. 사회 공동체적 일원으로서 지켜야 하는 약속과 복리에 위반되는 일이 없도록 지성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도산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삶, 정좌와 정결의 인격 수양의 자세는 이당이 숭실대학교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젠틀(gentle)하고 스마트(smart)한 학자’로 각인(독일에서 하이데거의 제자 오토 푀겔러 교수에게서 사사하고,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강의를 하는 김인석 교수의 회상)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도산은 한국의 미(美)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도산의 이런 면도 이당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입니다. 식탁 위의 꽃무늬라든가 와당(瓦當)은 한국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당은 이런 영향과 호기심을 서예로 발전시켰다고 추측을 해봅니다.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부터 연마한 그의 서예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창출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이당의 서예 미학은 나중에 ‘이당체(怡堂體)’로 발전하게 됩니다.   도산은 토론과 연설, 회의에 참석하여 의견을 토로할 때도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천사만려(千思萬慮,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 좌사우탁(左思右度, 왼편에서 생각하고 오른편에서 헤아려봄)하여 그 이상 더할 수 없다는 신념에 도달하기 전에는 아예 발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도산은 성서와 유교 경전을 읽고서 자신에게 양식이 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구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자신의 양심과 이성의 비판을 거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의 도덕률을 세웠습니다. 도산의 이와 같은 중용의 정신은 후에 이당의 생철학을 형성하는 데 있어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의 진·선·미(참, 인격, 아름다움)에 대한 성찰적 삶은 고스란히 이당에게도 녹아들어 그의 철학과 삶을 일구는 데 큰 작용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안병욱 외, 『도산 안창호 평전』, 도서출판 청포도, 2004, pp. 1-51, 218-36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0
  •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사는 지혜와 자세와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면 반드시 불행한 인생을 살 것이요,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면 반드시 행복한 인생을 살 것이다.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학문을 우리는 철학이라고 일컫는다.” 안병욱, 『인생론』, 철학과현실사, 1993, p.76.   “일명일생(一命一生). 인간은 유일성(oneness)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onceness)의 생애를 삽니다.” 이당의 말입니다. 그 안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이 있습니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관점, 곧 인생관이 분명해야 후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관이 없으면 대충, 대강 살다 가게 됩니다. 인생의 원칙, 삶을 대하는 정신자세, 타인과 사물을 향한 분명한 마음가짐 없이는 인생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생은 체험이고 이해이자 해석입니다. 생은 늘 낯선 것이기에 거기에 어떤 의미와 해석을 붙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허무적이거나, 낙관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이상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생철학, 생활철학, 생철학이라고 합니다.   이당은“나의 인생관이 나의 인생을 지배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관의 확립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인생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관이 없어도 살 수는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험천만한 일이 잘못된 인생관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그것을 가르쳐 주는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만일 그것을 가르쳐주고 지혜를 깨닫게 해주는 학문이나 철학자가 있다면 그처럼 고마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19세기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갱(Gauguin)은 만년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표제가 붙은 대작을 그렸습니다. 매우 철학적인 고민이 담긴 작품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갱의 화두는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의 근본을 알고 깨우치면 사람이 가야 할 길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두 개가 아니기에 소중합니다. 생명을 산 목숨, 살아 있는[生] 목숨[命]이라고 한 것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살라는 명령(命令)입니다. 하나의 목숨으로 인생을 열심히 살라, 하늘이 부여한 목의 숨을 잘 부지하라는 엄중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목의 숨을 지닌 존재로서 이 세계의 유일회적(唯一回的) 존재요, 단독자(單獨者)입니다. 목의 숨을 가진 존재인 나를 대신해서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의 목의 숨은 존귀하고 경이롭습니다. 불가사의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목의 숨은 주어진 목숨을 귀하게 여긴다는 귀명(貴命)으로 이어집니다. 귀명적 존재인 인간은 인생을 허망하고 무의미하게 살아가지 않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창조적 자아실현, 개성적 자기표현의 인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명(義命), 곧 참되고 의로운 목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생명은 나의 능력과 노력으로 바꿀 수 없는 불가변적인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것입니다. 반대로 가변적인 것도 있습니다. 비록 가난하거나 장애가 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여 자신의 환경을 바꿔나가면 인생은 그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숙명적으로 여기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자신의 생래적 목숨으로 얼마든지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하듯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되(amor fati)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넘어서려는 극복인(超人, Ubermensch)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운명에 굴복하는 인생의 약자가 되지 말고, 운명에 도전하고 운명을 초극(超克)하는 인생의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당의 니체 철학적 면모를 엿보게 되는 대목입니다.   안병욱, 『인생론』, 철학과현실사, 1993, p.75-88.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9
  •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위도가 3도(三度) 틀리면 법률의 조직이 바뀐다. 자오선(子午線)이 진리를 결정한다. 불과 수년 동안에 법률의 근본이 바뀐다. 기묘한 정의(正義)여, 한 줄기의 강에 지배를 받다니, 피레네산맥의 이쪽에서는 진리인 것이 저쪽에서는 오류다. 이것은 인간이 진리니, 정의니, 법률이니 하면서 큰소리를 치지만, 따지고 보면 어처구니없는 데가 있다는 것이다. 국경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면 법률의 체계가 달라지고, 진리의 기준이 다르고, 정의의 원리가 뒤바뀐다. 생각하면 허망한 일이다. 진정한 웅변은 웅변을 경멸하고, 진정한 도덕은 도덕을 무시한다. 철학을 멸시하는 것이 정말 철학을 하는 것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3 사색인의 향연』, 교육도서, 1988, pp.13~14.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파스칼(B. Pascal)의 『팡세(Pensees)』라는 책을 떠올리면 종교철학서 혹은 종교적 수상록을 쓴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여러 사연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팡세』를 통해 삶[生]의 의미를 되새기곤 할 것입니다. 『팡세』는 삶, 사랑, 죽음 등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깊이 관조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니체(Friedrich W. Nietzsche)조차도 “플라톤, 파스칼, 스피노자에 관해서 말할 때 그들의 피가 나의 핏속에 흐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고 말할 정도로 파스칼을 높이 샀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Gott ist tot)’고 선언한 후 생과 대지(大地)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반면에 파스칼은 생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한 끝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사뭇 철학적 결이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사람 모두 생에 대해서만큼은 성실했습니다. 이당의 해석대로 이 두 철학자는 성실하게 인생을 사색했습니다. 이당은 특히 파스칼을 “성실무비(誠實無比)의 철학자, 사색하며 신앙한 철학자”로 기록합니다.   인간이 사색한다는 것은 인간이 비록 세계-내-존재로서 우주에서 매우 미약한 존재이기는 하나 사고할 수 있기 때문에 위대하고 품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힘을 상실하면 인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냥 갈대가 아니라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존재만이 인간입니다. 생각이 없는 존재는 인간이 아닙니다. 그냥 생각이 아닙니다. 깊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깊은 생각을 하려면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그것은 기하학적 정신(esprit geomtrique)과 섬세(纖細)의 정신(esprit de finesse)입니다. 전자는 논리와 추리에 의해서, 후자는 직관에 의해서 사물의 원리와 질서를 단번에 파악하는 방법입니다. 과학적 인식에는 기하학적 정신이 필요하고, 인생을 이해하는 데는 섬세한 정신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논리적인 이성과 섬세한 심정(心情)을 갖습니다. 전자는 로고스(logos)의 세계라 하고, 후자는 파토스(pathos)의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심정에 의해서도 진리를 인식합니다. 사람이 양극단에 치우치면 균형이 무너집니다. 논리와 직관이 더불어 작용해야 사태의 본질과 인생의 본바탕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에서 우세한 결과가 나왔을지라도 그것은 한시적일 뿐이고 바람직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우쭐거린다면 자신이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행태입니다. 즉,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생(vie)을 세 가지 질서와 존재 방식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신체(corps), 정신(esprit), 사랑 혹은 자비(charite)입니다.   먼저 인간의 생[生]은 신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당연한 진리에 머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신체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 정신과 앎[知]에 대해서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이 가난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체의 질서에서 사는 사람은 정신의 질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정신의 질서 혹은 존재 방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신의 질서는 명예, 영광, 지식을 추구합니다. 신체의 질서를 자연태(自然態)라고 한다면, 정신의 질서는 자각태(自覺態)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랑 혹은 자비의 질서로 사는 사람은 성자(聖子)입니다. 겸손, 인내, 정결, 거룩함이 삶의 속성으로 자리 잡은 사람입니다. 평범한 사람이 쉽게 범접하기는 어려운 세계이기도 합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정신의 질서에 속하는 중간적 존재자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전체와 무한의 중간자다. (...)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짐승도 아니요, 그 중간자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순적 존재입니다. 한없이 위대하지만 동시에 한없이 비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사고하는 인간, 사유하는 인간, 생각하는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사유하는 인간은 우주(자연)를 포함하면서 초월하는 포월(包越)의 존재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자각하여 비참한 존재라는 것도 인식합니다. 죽음, 죄, 전쟁, 허위, 정욕, 위희(慰戱), 허욕(虛慾) 등 삶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그것을 망각하고 마음에 위안을 주는 온갖 위희(divertissement)로 살아갑니다. 인생을 제대로 통찰하면 불안, 공허, 권태가 늘 도사립니다. 이것이 인간이 자기 도피를 하려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성은 스스로 신앙을 도약하게 합니다. 파스칼에 의하면 인생[生] 최고의 질서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도약입니다. 신이 있다고 하면 무한한 행복이 보장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한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니 신의 유무에 대한 내기를 해도 본전은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을 바깥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바깥의 행복은 쉬 사라질 것들입니다. 파스칼은 영원한 행복을 위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중간적 존재자의 유한성을 극복하면서 신을 갈구하는 것, 즉 신앙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생 전체를 신에게 걸었습니다. 이당은 파스칼의 그 성실무비하고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을 본받았으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의 본질을 추적했습니다. 파스칼처럼 진리를 위해서 논리와 직관을 통해 삶의 본질에 천착했습니다. “위에서 찾으라”라는 파스칼의 말은 이당에게도 통용되는 말입니다. 진정성 있는 진리 탐구자인 동시에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 이것이 바로 이당의 삶이 아니었을까요?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8
  • 인생은 예술 이상의 예술입니다
    “인생은 예술 이상의 예술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인생을 조각하는 생의 예술이다. 우리 앞에는 생(生)의 대리석이 놓여 있다. 그것은 하나의 풍성한 가능성의 세계다. 이 가능성은 성실한 빛의 생애로 아로새겨질 수도 있고, 치욕의 어두운 생애로 물들일 수도 있다. 이 가능성에다가 어떠한 빛깔과 어떠한 내용의 현실성을 부여하느냐, 그것은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의 주인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3 사색인의 향연』, 교육도서, 1988, p.25.   [타임즈코리아] 우리가 굳이 이당을 서양철학적 흐름에서 하나의 지류를 찾는다면, 생철학자(生哲學者, Lebensphilosoph)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합리성이나 논리적 엄밀성을 따지는 합리론보다 파토스(pathos)나 인생과 생활의 면모를 깊게 우려내는 데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生)이란 유일회적(唯一回的)이라는 데에 동의합니다. 이 세상에서 각 사람과 그 삶은 오직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당은 “이 세상에서 제일 평등한 신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음의 신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의 삶은 소중합니다. 그냥 뜻 없이 사는 것은 절대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삶을 예술 이상의 예술이라고 한하면, 그 예술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예술은 라틴어 ‘ars’, 그리스어로 ‘techne’인데, 이것이 영어로 art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을 의술, 요리, 웅변술, 건축, 정치, 마술, 전술, 처세술, 목수 업, 대장장이 업 같은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넓은 범주에서 삶의 기술과 기예와 같은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삶은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당도 말합니다. “나는 인생을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이 예술처럼 기쁘고 보람 있고 아름다워지려면 명장(名匠)이 대작(大作)을 창조하려고 할 때 지니는 그 성실한 심정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진지하게 조각하는 길밖에 없다. 고뇌를 통해서 희열에 도달한다. 그것이 예술의 원리요, 또한 인생의 원리다. ‘인생은 예술처럼’, 이것이 나의 생의 표어다.” 이당이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생철학적 직관, 파토스, 삶이 체험과 경험의 원본적 사실이라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삶은 체험의 연속이자 깨달음을 통한 자기완성으로서 도달해야 하는 성(誠)의 과정입니다. 이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두 살 난 딸을 잃었습니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 급기야 영양실조로 딸을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 고통스럽고 슬픈 역사를 겪으면서 하게 된 생의 체험을 통해 “생명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대명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사고,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은 개인(individual)과 인간입니다. 시간 사이에, 공간 사이에, 사람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물건은 사이 존재가 아니라 사용존재입니다. 수단적 존재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절대이지 상대가 아닙니다.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건은 얼마든지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생명은 수단이 될 수 없다. 사람의 생명은 목적 그 자체다. 생명은 진실로 목적(目的) 중의 목적이다”라는 이당의 말이 피부에 와닿습니다.   사물과 생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물의 논리와 생명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에 이당은 이렇게 설파합니다. “생명은 곧 신비요, 존엄이다. 생명은 감각이 있고, 의식이 있고, 성장이 있고, 생식이 있고, 또 죽음이 있다. 자유와 책임이 있다. 요컨대 생명은 개성을 갖는다. 물건을 아무리 연장 확대해도 생명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생명은 신비(神?)와 존엄(尊嚴)의 존재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것이 생명의 논리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특히 인격이라고 한다.”   사람은 인격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동물과 다른 격(格)이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동물과 식물도 나름의 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인격, 곧 생(삶)의 내적 관조와 내적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러시아 철학자 솔로비요프(Solovjёv)는 인간의 내적 체험으로 발생하는 인격적인 감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수치(shame)의 감정’, ‘연민 또는 측은(pity)의 감정’, ‘경건(piety)의 감정’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염치없는 인간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잘못을 저질러 창피를 당했을 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입니다. 또한, 타인의 불행이나 슬픔과 괴로움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동정, 사랑, 희생, 자비의 감정이 싹틉니다.   마지막으로 경건은 인격자, 특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종교성과도 같습니다. 이는 자기보다 숭고함, 위대함, 고귀함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러한 훌륭한 인격자에 대한 인격적 감동과 감정은 그를 존경하는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경건(pietas, religio)은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에게 느끼는 인격의 엄숙한 자세입니다. 자신보다 존경받는 대상에게 품는 생각, 위엄, 품위는 인간만이 지닌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격은 그 자체로 목적입니다. 존엄, 품위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닙니다. 존경을 받을만한 대상은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환대(hospitality)받아야 합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 Kant)는 그러한 환대의 공동체, 곧 인격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목적의 왕국”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인격적 공동체입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기는 목적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개별 생명, 다시 말하자면 유일한 생명을 존중하고 평등한 인격체로서 환대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사회를 만든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격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아닐까요?   안병욱, 『安秉煜에세이3 사색인의 향연』, 교육도서, 1988, pp.23~30.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7
  •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君子誠之爲貴’(『중용』, 25장).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 성실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다. 우리는 저마다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성실하여라. 이것이 인간의 도덕의 첫째 원칙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책 중에서 성실의 원리를 가장 강조한 것은 『중용』이다. 성실은 『중용』의 중심 사상이요, 핵심 원리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12~113.   [타임즈코리아]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하늘을 감동하게 해서 끝내는 자기 생각이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이루는 것을 ‘성(誠)’이라고 합니다. ‘성(誠)’을 지향하는 사람이 마음에 품은 좋은 뜻이 하늘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수기(修己)해야 합니다. 자아를 갈고닦아 인격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태도로 갈고닦아야 하겠습니까? 이당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성실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誠)은 형이상학적 가치입니다. 인간의 도덕 원리이자 그 도덕 원리의 근간이 되는 대원리라는 말입니다.   “자아를 수양하여 덕(德)을 쌓은 다음에는 성실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수기이경(修己以敬)’이다 .”지금 우리는 인간에 대한 존경과 예의가 점점 더 위축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을 외치는데 과연 그것이 숭고한 인간애와 비례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물질을 최상으로 여기는 행태를 추구하다 보니, 인간도 사물처럼 대하는 시대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기는 자신을 소중하고 귀하게 생각하여 정중한 마음으로 대하고 자신을 잘 갈고닦으며 공경과 성실을 다하는 것입니다. 공경과 존경, 그리고 예의는 대인(對人)과 대물(對物) 관계 모두에 필요한 마음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존경과 공경을 다 하는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도 펼치는 것이 곧 수기(修己)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널리 평안(平安)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을 편안하게 합니다. 공자는 그것을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 했습니다. 수기는 수신(修身)과 같습니다. 수신은 지위고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생의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동양의 『대학(大學)』의 제1장에는 “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자천자이지어서인 일시개이수신위본)”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인격적 수양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지향해야 할 과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가 자기 성실성의 최우선으로 정기(正己)를 내세운 것도 그런 연유입니다. 이당은 정기를 다시 세분하여 ‘지기(知己)-수기(修己)-성기(成己)’로 해석합니다. 자기 자신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지기(知己), 곧 자기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도 파악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 씌어있는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은 뼛속깊이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 정기의 그다음은 수기(修己)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격을 잘 갈고닦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됩니다. 정기의 마지막은 성기(成己)입니다. 자기 수련의 목적은 자기완성에 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은 성기를 통하여, 덕(德)의 확장과 결실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기가 완성되었다는 객관적인 지표는 선(善)과 경(敬), 그리고 인격(人格)입니다. 이당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덕은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이요,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품성이요, 남을 감동, 경복(敬服) 시킬 수 있는 능력이요, 인격에서 풍기는 따뜻한 활기(活氣)요, 인간성을 정성껏 갈고닦아서 얻는 윤리적 자질이다.”   이와 같은 덕은 ‘수기-지기-성기’에서 나옵니다. 덕이 있으면 선을 베풀게 됩니다. 그러니 존경받게 되며 인격자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당연히 “덕인(德人)은 득인(得人)이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흡인력과 감화력으로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입니다. 덕망이 있으면 사람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주의를 해야 할 것은 재물에 대한 유혹입니다. 덕과 재물이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데, 항상 덕을 앞세워야 탈이 없습니다.   『대학(大學)』에서는 “덕본재말(德本財末)”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덕을 근본으로 하라고 충고합니다. 본말전도가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당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또 어떤 사람이 바람직한 인간인가. 이를 자문하고 “덕기”(德器)라고 답합니다. 덕기는 “어질고 너그러운 포용력이나 재능”을 뜻합니다. 그런 훌륭한 덕을 쌓은 온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덕을 닦는 그릇이 되어서 닦고 또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늘 덕기(德氣, 어질고 너그러운 얼굴빛이나 마음씨)가 어린 인품을 지니게 되어 사람들로부터 공경받게 될 것입니다.     안병욱, 『수필로 읽는 동양고전』, 철학과현실사, 2003,  pp.16~21, 40~45, 111~11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4
  •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지성감천(至誠感天)이다. 지성은 사람만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늘도 감동시키고 귀신도 감동시킨다. 무엇이 인간을 감동시키느냐. 지성이다. 지성은 인간 최고(最高)의 힘이요, 인간 최강(最强)의 무기요, 인간 최대(最大)의 덕(德)이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73. [타임즈코리아] 사람의 마음은 늘 하늘이 지닌 마음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길)은 먼저 성실(誠實)과 성심(誠心)에 이르러야 하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성실과 성심이 인간의 마음에 닿은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성실과 성심을 인간의 개인적 소유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은 하늘이 인간에게 그렇게 살라고 알려준 이상이요, 삶의 지도입니다. 정성을 ‘다하라’와 정성에 ‘닿아라’에서 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함과 닿음에 이를 수 있을까요. 삶에서 작은 일을 할지라도 정성스러운 마음을 다해야 하늘의 마음에 닿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중용』 25장에 나오는 “군자는 성실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是故, 君者誠之爲貴)”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유교의 최고의 인간상이자,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군자(君者)’입니다. 군자는 모름지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군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굳게 지켜나가는 사람만이 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완성된 인격체가 되고자 한다면 정성스러운 마음 바탕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실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가치를 성에 둔다, 혹은 인간과 사물에 정성이 가닿도록 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그렇게 나의 마음과 하늘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사물의 본질에 닿도록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의 마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의 마음이 내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성이 욕망이 되지 않습니다.   이당은 여기에서 『중용』 24장의 풀이로 돌아갑니다. “지극한 정성은 신과 같다(至誠如神).” 인간이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면 하늘에 닿게 됩니다. 성을 이룬 군자가 되었으니 성심, 곧 마음에 성이 그득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감동과 감화입니다. 정성이 차고 또 차서 넘칠 정도는 되어야 하늘도 감동합니다. 하늘이 움직이게 하려면 그만큼 정성을 다하는 것을 하늘도 느껴야 합니다. 이에 이당은 “우리 인간의 노력의 목표는 하늘처럼 참되려고 힘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맹자(孟子)도 이렇게 말합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고, 참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思誠者人之道也).”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이 반드시 추구해야 할 길입니다.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자(荀子)는 “우리의 마음을 기르고 정신을 수양하는 데 성실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養心莫善於誠)”고 일러줍니다. 정성을 다함, 참됨, 성실함을 인생의 화두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일 것입니다.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성실한 만남을 중시했습니다. 나와 너의 만남, 그 자체도 소중하지만 잠시 잠깐의 만남도 진정한 만남이 되어 오래 지속되게 하려면 서로 성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되지 않은 만남은 금방 들통납니다. 속임수와 거짓은 언젠가 탄로가 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삶에서 성실, 참(fides; fidelity)은 최고의 덕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에 이당은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고 풀어 말합니다. 성실은 나의 존재와 비존재를 가르는 척도입니다. 참되게 삶을 살아가는 한 나는 비존재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참되면 그는 있는 것이고, 참되지 않으면 실상 그는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는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네가 하는 일을 정성껏 하여라”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성심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성실, 곧 정성을 다하는 한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무슨 일이든 간에 그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요?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72~17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3
  •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성실은 거짓이 없고 정성(精誠)스러운 것이다. 성실은 진실무망(眞實無妄)이다. 참되고 허망(虛妄)하지 않은 것이다. 성실의 반대는 허위요, 허망이요, 속임수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169.   이당은 삶과 철학이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실’을 말하면 ‘성’과 ‘실’에 걸맞은 사람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성스러움은 없으면서 지나친 결실과 결과만을 바랍니다. 그러니 성실에서 말하는 삶의 진실 됨은 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만 난무합니다. 경쟁과 야합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진정성과 순수성은 온데간데없고 술수와 속 다른 말만 무성합니다.   이당은 주자(朱子)가 성(誠)을 진실무망으로 해석한 것을 따라서 삶은 거짓 없고 진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망(妄)을 망(望)과 같은 의미로 보기도 하니, 무망이란 결국 진실한 것 이외에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삶의 세계가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진실하게만 살아갈 수 있는가?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문 자체가 문제입니다.   중용에서 말하는 성실이 삶의 으뜸가는 덕목이 되어야 합니다. 성실을 성현의 말로만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우주의 이치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은 존재 가치를 지니고, 그에 따른 성실로 존재 가치를 실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치입니다. 삶의 현실과 이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치에 맞게 사는 것이 삶이어야 합니다.   중용은 이렇게 일러줍니다. “참은 하늘의 길이요, 참을 실천하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 『중용』 20장). 감탄을 자아내는 말입니다. 인간은 우주 질서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이치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지, 그것을 넘어서면 거짓과 속임수가 됩니다. 생사화복, 생로병사 그 모든 것들이 다 자연이 일러준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치를 설명한 말입니다.   참을 알고 참을 실천하는 것은 태어남과 병듦, 그리고 죽음조차도 다 하늘의 길이니,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귀다툼하면서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죽든 말든, 고통을 당하든 말든, 가난해서 굶든 말든 상관없이 축재(蓄財)하고 온갖 욕망을 다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진실과 순수는 허망한 것들입니다. 남에게 거짓된 행위를 하는 것은 물론 자신까지도 속이며 살아가니 말입니다.   하늘과 땅이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일은 없습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고 무위(無爲)입니다. 사람들만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거짓을 꾸며대는 작위(作爲)와 허위(虛僞)의 행태를 보입니다. 이당은 계속해서 중용 25장의 말을 인용합니다. “성실은 사물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성실이 없으면 사물도 없다(誠者物之終始, 不誠無物).”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성실은 모든 일에 시작이요, 끝입니다. 시종일관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성실하지 않고 과한 결실과 결과만을 바라는 것은 과욕입니다. 여기에서 탈이 생깁니다. 관계가 깨집니다. 우주의 이치, 천지 만물의 이법을 어겼으니 그 결과를 손에 쥔다고 한들 그것은 거짓의 열매입니다. 어디까지나 만사는 성실과 진실이라는 내면적인 법칙[眞實]에 따라서 이루어질 때 거짓되지 않습니다[無妄]. 말을 이루는 게 성(誠)이라는 한자어의 내포적 의미가 그것을 지향합니다.   결과로서 주어진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우연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진실한 마음에 의한 필연적인 것인지, 자신을 성찰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성이 결여된 행동은 천박한 행동이다. 얼마만큼 성실한가에 따라서 인간과 사물의 가치가 결정된다. 성실은 성물(成物)의 원리인 동시에 성기(成己)의 원리다(『중용』 25장).” 사물이란 본래 인간의 수단이 아니니,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하늘이 부여한 덕스러운 자기를 완성하는 것이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내 마음과 타자의 마음이 멀지 않고, 내 몸과 사물이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갈고닦는 것과 사물과 타자에게 성심을 다하여 베푸는 것, 이 둘의 관계가 어디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성실한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야말로 소리 없이 모두에게 유의미한 가치를 공급할 것입니다.   안병욱,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자유문학사, 2001, pp.169~17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2
  •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인생은 삼수도장(三修道場)이다.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수학(修學)의 도장이요, 부지런히 일하고 창조하는 수업(修業)의 도장이요, 덕(德)을 쌓고 자아(自我)를 완성하는 수덕(修德)의 도장이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머리말 중에서 양구 인문학박물관 방명록   이당의 철학 가운데 유독 많이 등장하는 개념 중의 하나는 ‘덕(德)’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삶은 덕스러움입니다. 이당은 “도는 길이요, 덕은 힘이다. 도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객관적 규범이요, 덕은 그 규범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 능력이다. 도덕은 도와 덕이 합한 것이다. 도와 덕은 동양 사상의 중심 원리요, 핵심 개념이다”(p.197)라고 정의합니다. 이는 라틴어 vis(virtus)에서 연원하는 virtue를 해석한 말입니다. 덕(德)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규범인 도(道)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인간의 이성적인 힘, 자아의 힘입니다.   그런데 이 힘 혹은 능력의 자생력은 갈고닦음, 곧 수(修)에 있습니다. 좀 더 구체화하면 수양입니다. 이당은 이와 같은 수양의 덕목들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수학(修學), 수업(修業), 수덕(修德)입니다. 이 세 가지 수양의 덕목들은 모두 수덕으로 수렴됩니다. 배움과 직업(일)은 덕스러운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써 수행이자 덕행입니다. 배움도 일도 모두 덕을 행하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 하는 필수사항입니다.   이당은 이러한 덕목을 수행하는 인생을 도장(道場)으로 비유합니다. 인생은 덕(德)을 완성하기 위한 수양과 훈련장이요, 정신단련장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도량’이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 보디만달라(Bodhimandala)를 음차한 것입니다. 보리(菩提)는 산스크리스트어 Bodhi를 음사(音寫)한 말입니다. 때로 지(知), 도(道), 각(覺)으로 번역합니다. 보리는 부처가 6년의 고행(苦行) 끝에 깨달은 진리요, 미혹이 없는 정각(正覺)의 세계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깊은 지혜의 경지를 말합니다. 만다라는 진리를 터득하고 도(道)를 깨닫는 장소, 불상(佛像)을 비치하는 단(壇)의 의미로 쓰입니다. 이와 비슷한 뜻을 갖는 영어는 gymnasium이라고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청년들은 gymnasium에서 심신을 단련했습니다. 독일에서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김나지움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당은 산다는 것은 갈고닦는 것(生卽修)이라고 보았습니다. 생명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처럼 갓난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노년에 이르기까지 산다는 것은 갈고닦음의 연속입니다. 학문을 갈고닦고, 직장과 일에서 자기의 생업을 위해서 실력과 재능을 갈고닦되, 그것은 덕을 행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 그리고 학문을 연마할 때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상경하애(上敬下愛)가 있어야 하고, 수평적으로는 신의를 다지며 아름다운 학풍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일과 직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번 단련하고 천 번을 갈고 닦는 백련천마(百鍊千磨)의 성실함으로, 어려움도 견디며 부지런히 노력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격을 갈고닦는 데 게으르지 않아야 하는 지속적인 덕행의 수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당은 『대학』, 『논어』, 『시경』에 나오는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로써 이를 정리했습니다. 절차탁마란 돌과 옥, 소의 뿔과 짐승의 뼈(石, 玉, 角, 骨)를 쓸 만한 물건으로 만들기 위하여 갈고 닦고 다듬는 지난한 과정을 일컫습니다. 절(切)은 칼로 자르는 것이요, 차(磋)는 돌 가는 것이요, 탁(琢)은 옥을 쪼고 다듬는 것이요, 마(磨)는 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절차탁마의 자세와 그 실천이 필요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도 온갖 노력과 진지함을 다하여 수양에 수양을 더하여 온전한 덕을 고양하는 삶의 자세를 지켜나가야 하니 얼마나 독실해야 하겠습니까?   동양 고전 『예기(禮記)』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玉不琢不成器 人不學不知道” <學記>. “구슬은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사물도, 사람도 갈고닦지 않으면 제대로 빛이 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인격을 잘 갈고닦아야 합니다. 이당은 힘줘 말합니다. “인간은 발광체다. 몸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다.”   사람은 저마다 빛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눈, 얼굴, 마음, 삶, 행동, 인격 모든 면에서 빛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면적 힘인 덕을 시종일관 몸에서 떠나지 않도록 갈고닦아서 수덕의 완성체를 일궈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안병욱, 자유문학사, 2001, pp.7~18, p.197.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1
  • 성의(誠意)는 참되고 아름다운 삶을 꽃피우는 원천입니다
    교육적으로 볼 때, 현대에는 세 가지 정신적 악(精神的 惡)이 있다. 첫째는 모르고도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고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한번 깊이 음미(吟味)해 볼 만하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129. 양구 ‘김형석·안병욱 철학의 집’ 안병욱 서재   [타임즈코리아] 현대 사회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진실(眞實)되고 정성을 다하려는 뜻과 의지가 눈에 띄게 약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배움[學/問]’과 ‘가르침[敎/育]’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은 배우고 가르침, 가르치면서 배움이 서로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산 안창호가 말한 무실(務實)하고 역행(力行)하는 삶과도 연결됩니다.   성실을 말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힘써야 한다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교육사상에 비춰 볼 때 참되기를 힘써야 배움과 가르침도 헛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는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정합성과 순차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을 천명하고 역행하는 것이 학문의 근본이며 사람 된 도리라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당은 “지식이기주의자(知識利己主義者)”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을까요? 배움과 가르침, 앎의 선후(先後), 배우려는 것과 가르치려는 의지가 다 배우고자 하는 정신에서 비롯됩니다. 배우고자 할 때 만물은 다 스승이 되고, 모든 사람이 스승이자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은 ‘겸손(謙遜)’과 짝을 이룹니다. 모든 대상, 사물, 사람 등과 인생과 세상이 다 삶을 배우는 학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스승으로 보입니다. 이런 자세가 되면 자연히 겸손한 마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죽는 날까지 배운다’는 말도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배워서 동시에 가르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정성을 다하는 의지와 뜻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성의(誠意)가 없으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게 되면 스승을 찾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배움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성의(誠意)가 살아 숨 쉬는 삶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성의가 있어야 겸손해지고, 배우며 가르치려는 의지가 삶의 진보를 가져오는 선순환이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삶의 공동체를 일컬어 책임사회, 봉사 사회, 연대 의식이 강한 사회라고 부릅니다. 인간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듯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집단 간에 아무런 성의가 없는 무관심(無關心)의 사회가 아니라 관심으로 가득한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배움과 가르침은 서로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당이 독특하게 개념화한 “지식이타주의자”는 배워서 남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지식이기주의자”는 배워서 자기만 알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 대해 그냥 수수방관합니다. 더욱이 지식이기주의는 자신이 아는 것을 다라고 생각하는 오만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성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에 성의가 있는 사람은 모두가 배우는 주인(주체)이자 가르치는 주인(주체)가 됩니다. 이른바 상호주체(후설의 현상학적 개념으로는 상호주관적 존재)입니다.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혹은 배움과 가르침은 모두 ‘지(知)’와 ‘행(行)’의 태도입니다. 앎을 추구하는 것에서 얻게 된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위입니다. 이것을 지행합일(知行合一) 혹은 지행일치(知行一致)이라도 합니다. 도산 안창호는 이를 위해서 ‘무실역행주의(務實力行主義)를 설파했습니다. 참됨(진실)을 알고 이를 행하는 데 힘쓰는 민중(시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배움과 가르침이 모두 성의 있고, 성실에 바탕을 두려면 말이나 생각에만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知)가 문제가 아니요, 행(行)이 문제다. 우리는 언(言)의 인(人)이 아니고, 행(行)의 인(人)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처럼 큰 정신적 죄악은 없다.”   이제부터라도 상호 배움과 상호 가르침에 성의(誠意)와 성실(誠實), 그리고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는 큰 깨우침을 주는 말입니다.   『安秉煜에세이2 삶의 보람을 찾아서』, 교육도서, 1988, pp.129-13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10
  •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성실은 인간의 위대한 힘이요, 덕이요, 빛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243. 양구 인문학박물관과 방명록   지극한 정성을 다하면 사람은 물론 하늘도 감동하게 합니다.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모든 것은 그 존재적 가치를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성실을 달리 말하면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당의 말대로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현재 자체가 목적입니다.” 탁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실한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만남도 참되고. 말도 참됨으로써 성실함을 일상화해야 합니다. 표정도 밝게 하며, 마음과 마음이 맞닿은 화(和)를 이루어야 합니다. 온화하고 인자하며 조화로움 가운데 중용을 지키는 화목(和睦)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論語』에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야기합니다. 사람과 어울림에 있어서 화합하면서도 부화뇌동하지 아니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내 앞의 사람과 사물입니다. 지금 여기는 나에게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중요한 시·공간입니다. 이당은 톨스토이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시간은 현재요,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내가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이요,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사람에게 선(善)을 행하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사람과 사물에 진정성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는 성실함은 내 앞의 모든 존재에 대한 예의이며 선입니다.  정성을 다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고개가 숙어지는 것은 그에게서 번져오는 선과 겸손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참되고 순수하고 독실한 것”이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한때 성실이 집안의 모든 사람을 묶어주는 삶의 철학이자, 그 집안의 지향성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속고 속이는 일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무던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당은 “성실의 재건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삶의 요소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성실함을 존재의 척도로 삼는 사회, 이로써 신뢰와 감동으로 일렁이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실함, 곧 나와 너, 세계와 삶을 속이지 않는 삶으로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파장을 일으키는 “성실주의”가 하나의 진리가 되는 세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당은 말합니다. “성실은 우리가 딛고 설 인생의 땅이요, 우리가 밟고 나아갈 길이다.” 안병욱, 『인생, 그 순간에서 영원까지』, 자유문학사, 1987, pp.242-25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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