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창작과지성
Home >  창작과지성

실시간뉴스
  • 안병욱 교수의 강연과 새롭게 만나는 『안병욱 인생철학』
    [타임즈코리아] 안병욱 선생님의 명성에 이끌려 (神이 내려준 직장이라는 한국은행을 퇴직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에 입문함으로써 인생의 경로가 바뀐 ‘철학 서생’이 서평을 쓰게 되어 퍽 기쁩니다.   칠판에 이당체를 쓰며 웅변하듯 열강하시던 모습, 사색하는 눈매를 살짝 감춰주는 굵은 뿔테 안경, 실크 넥타이를 애용하시던 풍모, 교정을 한가로이 산보하실 때 구두 앞쪽을 조금 든 채 땅 위를 내딛는 걸음걸음, 인품의 氣가 뼛속 깊이 전달되는 안 선생님의 강의가 새록새록 회상됩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삶을 잘 그려낸 책이 『안병욱 인생철학』입니다. 아마 안병욱 선생님이 자신의 삶과 철학을 정리했어도 이렇게 짜임새 있게 서술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는 유난히 ‘生’이라는 낱말이 많습니다. 책의 제목에도 ‘生’, 부제인 ‘생철학자 안병욱’에도 ‘生’이 있을 정도로 안병욱의 생철학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는 니체,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등의 생철학을 통하여 안병욱의 생명 사상을 노래합니다.   안병욱 사상의 중심인 『中庸』의 誠에 바탕을 둔 생활철학 속의 ‘生’을 앞세웁니다. 『中庸』에서 和(평화)의 요소를 찾아 안병욱의 생명 평화 사상에 접근한 태도가 눈에 띕니다. 『中庸』의 핵심인 誠이 和로 나아가는 길을 밝힌 점이 훌륭합니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다’는 대명제 아래에서 성찰하는 삶,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갈 것, 인생은 학교라는 인생학, 철학은 죽음의 연속이라는 안병욱의 생철학을 잘 풀어내고 있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의 50권의 저작을 두루 섭렵한 저자가 안 선생님의 말씀에 철학적 담론을 입혀 원저자(안병욱)의 사상을 빛내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설법에 따라, 안병욱이 말하는 방식으로 안병욱의 철학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안병욱의 본디 사상에 윤기 나는 해설을 붙여 책 읽는 美感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하여 독자가 안병욱과 함께 철학적인 호흡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안병욱 선생님이 환생하시어 나에게 철학 강의를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킬 정도이니까요.   그리고 안병욱 선생님이 『사상계』를 통하여 시대의 고난·아픔에 동참한 일을 상세하게 기술한 점도 칭찬할 만합니다. 독재정권에 직접 맞서기보다 세련된 저항 의식을 철학적 언어로 전달한 안병욱의 고뇌를 엿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안병욱 선생님은 학사 학위 소지자로서 박사학위를 지닌 자들보다 잘 가르쳤습니다. 편협한 전공과목을 내세우는 학자라기보다 삶의 길[道]을 제시하는 선비이셨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선비가 아니라, 땅 위의 민초들을 계몽하기 위해 밤낮없이 강연 다니시던 대중적인 선비 안병욱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비의 참모습을 미끈하게 묘사한 점이 이 책의 매력입니다.   김승국 박사(평화 연구·활동가, 숭실대학교 철학박사)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1-03-02
  •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 안병욱 평전 출간
    ‘안병욱 인생철학: 생철학자 안병욱 철학평전(김대식,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21년 1월 31일)’이 출간되었다.   ▶ 저자 김대식 박사 인터뷰   이 책은 생철학자 이당 안병욱 선생의 평전이다. 그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쫒아가며 그 삶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의 흐름과 철학을 시종 여일하게 톺아가며, 그 철학과 철학적 인생을 조명하는 ‘철학평전’이다. 안병욱은 생애 전체를 기울여 청중과 독자들에게 ‘철학이 있는 삶’을 강조하고, 그의 철학대로 살아갔다. 이런 점에 주목해 그의 생애와 철학을 통해 독자들의 삶이 더욱더 아름답고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 책은 ‘인생철학’을 담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까닭은 한국 현대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젊은이들의 인생 스승으로 살았던 이당의 삶과 철학을 녹여냈기 때문이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로 들어 선 오늘날 무엇보다도 철학이 갈급하다. 이런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인생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안병욱의 철학을 크게 성(誠)의 철학, 중용(中庸) 철학, 생(生)의 철학, 실학(實學) 철학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피면서, 그의 수십 편의 저작과 그가 탐구하여 용해해낸 철학자들의 사상까지 아우름으로써 안병욱 철학의 전모를 감상할 수 있게 하려고 힘썼다. 다시 말하자면 ‘안병욱 철학 입문서’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 이당(怡堂) 안병욱(1920~2013)은 누구인가   지금 안병욱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늘날 정신의 빈곤이 두드러지는 시대, 생명과 생활의 좌표가 흔들리는 이 시대에 그의 철학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철학적 생애에 관한 이 책을 ‘인생철학’이라는 ‘큰말’로 명명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철학은 크고, 넓고, 깊다. 그는 대중철학자로서 시민들의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고 각자의 생명의 샘을 발견케 한 계몽철학자다. 나라와 민중의 정신을 송두리째 빼앗긴 시대에 도산 안창호가 외쳤던 민족개조론의 사상이 그에게도 다급했다. 일본 유학 시절 서예를 통해 동양미학적 심성을 기르며 윤동주와 새로운 세상을 꿈꾼 것도 생각하는 시민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귀국 후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진리를 설파하고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통하여 대중을 계도하였다. 함석헌과의 만남과 흥사단아카데미 활동도 그러한 삶의 노정이었다. 그는 중용철학을 바탕으로 서양철학의 생철학, 실존주의철학, 실용주의철학을 대거 흡수하여 폭넓은 사유체계를 전개한다. 그것은 결국 대중 혹은 시민이 “어떻게 ‘올바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안병욱은 이를 위해서 삶에 정성을 다하는 성(誠)의 철학과 성의(誠意)의 철학적 삶을 살라고 대답한다. 나아가 철학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이어가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이당은 대중을 위한 생철학자라 칭해야 마땅할 것이다.   ▶ 출판사 서평   행복한 인생을 향한 바른 길, 안병욱의 인생철학       삶은 원본적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삶은 인간이 직접 체험되는 현장이며 실존이 논증되는 광장이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죽음조차도 이 범주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한다는 것은 삶을 좀 더 성실(誠實)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을 정성스럽게 대하고 긍정적인 결실을 맺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함(philosophieren)을 대중들과 함께 나누며 연장시켜 간 철학자가 이당(怡堂) 안병욱(安秉煜, 1920~2013)이다.   그는 자칫 사변으로 흐르기 쉬운 철학적 이론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탁월함뿐만 아니라, 좋은 언어 구사력까지도 겸비한 철학자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넘나들며 시대의 민중이 갈급해 하는 실천적 사유의 바른 길, 더 나은 길을 『사상계』를 비롯하여 여러 매체를 통해 역설했다. 흥사단 아카데미를 조직하여, 직접 강연을 통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고 미래를 향한 희망의 의지를 열어 주었다.   안병욱은 생애 동안 50여 권의 수상록을 남긴 저술가요 수필가(문필가)로 이해하기 쉽지만,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수백 회의 대중강연을 통해, 회색빛 시대를 관통하여 꿈과 희망을 잃지 않는 삶, 참되고 성실한 인생을 지향할 수 있게 한 대중 강연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당의 이력은 그가 스승으로 삼은 도산 안창호 시절로부터 이당의 시대로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안병욱은, 지금도 살아서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김형석 선생, 그리고 천재적인 문필가여 강연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어령 선생 등과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글과 강연으로 이끌어온 우리 사회의 석학이요, 스승이었다.   이당을 만든 철학, 이당이 만든 철학   그의 철학은 동서양을 아우르고 넘나든다. 동양철학은 공자,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도산 안창호와 맞닿아 있다. 서양철학은 쇼펜하우어,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슈바이처, 우나무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생철학적 지평에 걸쳐 있다. 이를 종합하고 창조적으로 해석한 이당의 철학은 생(生)철학 혹은 성(誠)의 철학으로 귀결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철학적 지류를 폭넓게 수용하여 독창적으로 펼친 이당의 철학을 평전의 저자는 좀더 세분화하여 네 가지로 정리하였다. 성철학(誠哲學), 중용철학(中庸哲學), 생철학(生哲學), 실학철학(實學哲學; 윌리엄 제임스와 존 듀이 등의 실용주의까지)이 그것이다.   오늘날 철학의 유사상품이나 파생상품은 많이 있다. 하지만 진정한 철학과 철학함은 드물어 보인다. 철학함은 단순히 빛나는, 번득이는 지혜를 역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철학자의 삶으로 구현해 보임으로써 그 철학(함)을 입증하는 데까지를 포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관성과 실천성을 겸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삶에 녹아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사유능력을 통한 엄밀한 비판정신 또한 살아 있어야 한다.   비판은 화자의 모범적 시범이 수반되지 않으면 결국은 비난일 수밖에 없으니, 비판정신이 살아 있는 철학을 이어나가고, (철학자가) 죽어도 그 철학이 죽지 않고 살아남는 생명력, 삶과 뜻에 정성을 다하는 성의(誠意)가 있어야 한다. 허언(虛言)을 하지 않고 알맹이가 있는 삶인 무실역행(務實力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용철학, 곧 절제와 지족(知足)도 중요하다. 이것이 모두 이당에게 해당한다.    ‘성실’한 삶을 가르친 이당   사람은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 당연한 것인데도,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그것에 정성을 기울이고[誠]이고 힘쓰는[務實力行] 생생한 삶[生]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 시대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기보다 오히려 차고 넘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풍요속의 빈곤감이 더욱 커진다. 사람들의 행동이 나날이 그악스러워지고, 해마다 고립되어 가는 까닭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각자의 삶을 올바른 인생으로 완성시키면서, 또 인생이 행복해지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되려면, 그 모든 것이 ‘중용’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중용’은 사실상, 어려운 것 가운데서도 어려운 삶의 자세이다.   그러나 또한 중용은 가까운 데서, 낮은 데서,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곳곳에서, 한가운데서, 작은 데서,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당은 그 점을 알려준다. 그 점을 깨닫게 한다. 그 길로 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과 동력을 준다.   사람은 저마다 삶의 행복을 꿈꾼다. 생각을 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다. 불행하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사회나 국가도 그 사회와 국가의 안녕과 질서, 그리고 평화를 꿈꾼다. 다른 말로는 사회와 국가의 행복이다. 물론 이당이 말한 ‘올바로 사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이다.   철학은 행복한 삶(eudaimonia)의 길을 지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행복한 삶은 좋은 삶, 참살이와 동전의 앞뒷면이다. 그래서 철학함은 나를 먼저 반성하고 타자를 배려하며 세계를 전망하여 참다운 관계를 설정하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 이당의 철학은 생로병사(生老病死) 전체를 관조하면서 충실, 만족, 충족, 자족하라고 말한다. 그 처음과 끝은 관조적(contemplative) 삶에 닿아 있다. 시민이, 서민이, 민중이, 민초가 일상에서 중용을 찾고 중용을 살아가는 가까운, 쉬운, 평범하고도 비범한 길이다.   성실로 행복을 향해 나아가라!     이당은 이 모든 철학함의 원리를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 풀어내기도 한다. 철학함으로서의 공부, 삶의 원리에 대한 공부로서의 철학은 곧 위기지학과 이음동의어이기도 하다. 수단으로서의 공부나 처세로서의 철학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독실(篤實), 무실, 결실이 완숙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고 풍요로움을 나누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로 물 흐르듯 흘러간다.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공부나 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스럽게 시대적 살핌으로 나아가는 까닭이다. 철학의 쓸모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말만이 아니다. 말을 이루어야 한다[言+成=誠]. 이당의 철학에서 유독 ‘성’(誠)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당은 자신의 저서 『키에르케고르』(1967)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인생의 자전 제1장에 무슨 단어부터 먼저 쓰겠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성실(誠實)’이라고 대답하겠다. 나는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싶다. 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나 스스로를 대할 때나, 나는 성실하기를 힘쓴다. 우리가 첫째로 꼽아야 할 인생의 공부과목은 성실하기 공부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이당 안병욱의 생철학을 고백적으로 잘 드러낸 말이다. 오늘의 우리 삶이 첨단화하고 복잡다단해진 만큼 성실 이상의 정보와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정보와 기술은 결국 성실, 성실한 공부로서 갈무리하지 않으면 백해무익할 분이다. 그런 점에서 성실이야말로 최신의, 최고의 처세술이기도 하다는 점을, 그러므로 어떻게 성실할 것인지를 이당의 생애, 이당의 철학은 지시한다.   철학평전, 안병욱의 인생을 철학으로 톺아 가다!   『안병욱 인생철학』 은 안병욱 평전이되, 그의 생애사를 쫒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그의 철학을 톺아간다. 그러나 그의 철학이 곧 그의 삶이었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그의 생애를 좇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다.   그러기에 ‘철학평전’이다. 누구에게든 ‘인생철학’은 있게 마련이지만, 철학자의 생애를 통틀어 ‘인생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나아가, 그 철학자의 평전을 ‘인생철학’이라고 명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철학자이자 스승으로서 이당의 인생을 녹여내었기에 ‘인생철학’이고, 오늘 철학이 갈급한 이 시대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발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인생의 철학이기 때문에 ‘인생철학’이다.   그는 “철학이란 죽음의 연습”이라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 “청무성(聽無聲)”을 이야기하였다. 죽음이 들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을 끊임없이 되뇌며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이 아닐까?   ‘죽음’이란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죽음의 순간에서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를 내려놓고, 비워가고, 걸어가는 것, 그렇게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마침내 하늘로 날아올라 원시(元始)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붙잡으려고, 집착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희미해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아닐까?   저자는 이당이 쓴 수많은 글들은 물론이고, 그가 공부한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사상과 이당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촘촘히 뜨개질하여 ‘이당 안병욱의 철학, 철학자 안병욱의 사상’을 생생하게 되살려 놓았다.   저자(김대식)는 “이 평전은, 그의 아호가 뜻하는 것처럼 철학의 기쁜[怡] 터[堂], 행복한[怡] 철학의 집[堂]을 짓기 위한 초석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이제 이당의 더 큰 철학의 집을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그의 철학적 삶을 이어나갈 동학(同學)들도 말이다.”라고 밝힌다.   ‘삶’이 ‘생활’이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는 이 시대에, 이당의 철학의 빛을 따라 살아갈 수 있다면, 행복한 삶, 아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이당은 산다는 것은 큰 뜻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주야로 분투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뜻이 없는 인생은 죽은 인생이니 허송세월하지 말고, 대망(大望)과 대지(大志)를 품고 자기의 뜻을 펼치면서 살라고 역설했습니다. (30쪽)   이당의 철학은 생철학으로 수렴됩니다. 그의 철학은 성(誠)을 기반으로 하는 성철학과 중(中)을 바탕으로 하는 중용철학의 양대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철학은 단순히 이론이나 담론으로만 그친 것이 아닙니다. 생각과 사유[思], 그리고 일을 함에 있어 실제에 힘쓰는 것[務實],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것[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正心], 진실된 마음을 갖는 것[實心], 힘써 실천하는 것[力行]으로 이어집니다. (40쪽)   안병욱이 사랑-하기를 철학-하기(philosophieren)처럼 명제화하는 것은 사람-함도 결국 공부고 끊임없는 훈련과 체득의 과정임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정성을 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 세계(우주)를 사랑한다는 것인데, 이는 연습과 훈련과 공부를 통해야 가능합니다. 공부-함, 철학-함, 사랑-함은 삶의 행위이자 생철학의 근간이 됩니다. 인간다움과 인간 정신의 외현적 표상으로 인간의 지표로서 평가되는 행위들입니다. (50~51쪽)   이당의 좌우명은 ‘불성무물’입니다. 이는 동양의 고전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로서,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성을 다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인생은 요행으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사물 하나하나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실이 근본이 되어야만 인생이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달리 ‘충실(充實)’이라고 합니다. 하루하루를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 알차고 보람 있게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66~67쪽)   이당은 성을 참(됨)으로 풀었습니다. 인생의 최고 진리는 참입니다. 참과 진리가 동어반복처럼 들리기는 하나, 진실무위(眞實無僞)에 가깝습니다. 참됨이야말로 사람의 길로서, 그 참됨은 결국 하늘의 길입니다. 이것을 인생의 수양의 지표로 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 Marcel)도 (중략) “성실이 없는 곳에 존재(存在)가 없다. 성실의 정도가 존재의 정도를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를 이당은 이렇게 풀어서 말합니다. “참된 내가 될 때 나는 참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가 있다. 거짓된 나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내가 얼마만큼 성실하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존재하느냐가 결정된다. 성실의 정도가 나의 존재를 좌우한다.” (96~97쪽)   수많은 대중들에게 강연을 다니면서 유명세를 탔던 이당은 대중 철학적 언어에 탁월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당 역시 강연을, 말씀을 전달하는 미적인 것, 그 언어를 전달하는 예술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당대의 달필이요 유려한 언어와 목소리를 구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듯이 분명 천분(天分)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분수, 곧 자기의 몫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몫을 다한 철학자입니다. (116쪽)   “일명일생(一命一生). 인간은 유일성(oneness)의 생명을 가지고 일회성(onceness)의 생애를 삽니다.” 이당의 말입니다. 그 안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이 있습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관점, 곧 인생관이 분명해야 후회가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 인생관이 없으면 대충, 대강 살다 가게 됩니다. 인생의 원칙, 삶을 대하는 정신 자세, 도반과 사물을 향한 마음가짐이 없이 인생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인생철학, 생활철학, 생철학이라고 합니다. (136쪽)   이당은 “존재는 표현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표현이다.”라고 규정했습니다. 생은 인간에 의해서 진실을 표현하고 삶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생은 표현입니다. 생은 내적으로 의미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을 산다는 것은 저마다 제 소리를 하고, 제 노래를 부르고, 제 말씀을 하고, 제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의 고유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155쪽)   이당은 “학(學)에서 시작하여 행(行)으로 끝나야 한다. 학의 목적은 각(覺)에 있고, 각의 목적은 행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에서 비롯됩니다. 참됨과 성실함[誠]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진리라 할 것입니다. 성실한 행위가 없이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의 근본이자 성의 본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속이고 타자도 속이는 삶은 가치가 없으니 말입니다. (200쪽)   이당의 미학의 특징은 다채미(多彩美)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212쪽)   이당은 와세다대학 시절에 서도에 관심이 생겨서 동양미술사 강의를 들으면서 금석학(金石學)과 문자학(文字學)을 연구했다고 합니다. 그는 비석이나 종(鐘) 같은 데 새겨진 문자는 물론 문자의 구조를 알기 위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대학생 때 점심값을 아껴 가면서 몇 해 동안 사 모은 서첩들과 많은 장서를 한 권도 건지지 못하고 이북에 버려 둔 아쉬움, 그리고 한국전쟁 잃어버린 책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글에서는 그의 책사랑과 학자로서의 간서치(看書癡)의 면모를 읽을 수 있습니다. (225쪽)   이당은 생즉로(生則路), 생즉도(生則道)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인생을 단 한 번 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당은 ‘성(誠)’으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였습니다. 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갔던 현대 한국 철학자였던 것입니다. 이당은 근(勤)과 인(忍)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240쪽)   <본문 - 안병욱의 어록 중에서>   “인생은 학에서부터 시작한다. 학이 인생의 시발점이다. 학의 목적은 지(知)요, 지의 목적은 행(行)이요, 행의 목적은 성(成)이다. 學→知→行→成, 학(學)에서 시작하여 성(成)으로 끝나는 행동의 체계, 이것이 인생이다. 학은 모든 위대한 것의 원천이요, 시발점이다.”(안병욱, 『논어인생론』) (본문, 38쪽)   “이 혼탁한 난세를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우리는 투철한 철학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없는 생활은 공허하고 빈약하다. 우리는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태연하게 죽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이 철학적 정신이다.”(안병욱, 『사람답게 사는 길』) (본문, 38~39쪽)   “우리는 지족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지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지족은 행복의 길이요, 부지족(不知足)은 불행의 길이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선경(仙境)도 되고 범경(凡境)도 된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본문 106쪽)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타락한 시장 사회의 원리가 작용한다. 불성(不誠)과 불화(不和)가 지배한다. 부패한 상인 정신이 휩쓴다. 나의 이(利)에 눈이 어두워 남을 수단으로서 이용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조우(遭遇)가 있었다. 상호 불신 속에 인간적 화목을 잃었다. 불의(不義)의 재(財)를 탐내고 부정의 이(利)에 혹하여 양심이 마비되고 염치(廉恥)를 상실했다. 곧은 마음과 바른 정신을 잃었다. 지조를 버리고 신의를 망각한다. 속임수와 권모술수가 성행한다. 타인을 나의 욕망 충족의 도구로 삼는다.” (안병욱, 『빛과 생명의 안식처』) 본문 107쪽)   안병욱의 인생관 : 생즉도(生卽道): 산다는 것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생즉학(生卽學): 산다는 것은 죽는 날까지 배우는 것이다. 생즉수(生卽修): 산다는 것은 부지런히 자기의 재능과 인격을 갈고 닦는 것이다. 생즉동(生卽動): 산다는 것은 가치창조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본문 130쪽)   “우리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무책임한 향락의 유흥장이 아니요, 심심풀이로 하는 도박의 장소가 아니요, 일확천금에 골몰하는 탐욕의 싸움터가 아니다. 인생은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엄숙한 수련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안병욱, 『때를 알아라』) (본문 145쪽)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본문 209쪽)   ▶ 목차   추천사 김형석, 이어령 들어가는 말 이당의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삶   Ⅰ. 성(誠)철학  1. 인생의 지혜는 삶보다 먼저 옵니다!  2. 진실한 물음, 분명한 대답: 물음 주체, 삶의 주체인 ‘나’  3. 행복한 인생을 위한 기초, ‘사랑-함’  4. 사랑의 종교철학적 아포리즘  5. 이당 안병욱의 언어철학: 이름에 걸맞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6. 율곡 이이의 후예, 성(誠)을 통한 이당의 마음공부  7. 아, 불성무물(不誠無物)의 철학이여!  8. 성의(誠意)가 있는 삶을 위해 힘써야[務實] 합니다!  9. 인생의 내적 힘은 ‘덕(德)’입니다!  10. 행복은 삶에 정성을 다한 만족감입니다!  ● 이당의 성실(誠實)철학   Ⅱ. 중용(中庸)철학  1. 삶 속에 속임수와 거짓의 자리는 없습니다!  2.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합니다!  3. 수신의 완성은 덕에 있습니다!  4. 시중(時中)하면 이미 군자입니다!  5. 평화와 조화와 화목의 자리가 중용입니다!  6. 철학은 삶의 지혜입니다!  7. 성실의 덕을 살리고 참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 이당의 중용(中庸) 철학   Ⅲ. 생(生)철학  1. 인생은 예술 이상의 예술입니다!  2. 생명을 생명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3. 성찰하는 삶이어야 살 가치가 있습니다!  4. 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가십시오!  5. 진실과 진리로 삶의 주인이 되십시오!  6. 인생은 ‘창조적 자기 표현’입니다!  7. 생은 사유와 행동의 지속입니다!  8. 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  9. 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燃燒)하는 일입니다!  10. 인생은 한 권의 위대한 책입니다!  ● 이당의 생철학   Ⅳ. 실학철학과 실용주의  1. 철학의 멸시가 철학입니다!  2. 지성일관(至誠一貫)의 삶을 사십시오!: 도산 안창호와 이당 안병욱의 만남  3.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삽시다!  4. 우리가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5. 위대한 국민적 성격과 정신만이 살길입니다!  6.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7. 미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8. 한창필연불유진(閑窓筆硯不留塵): 이당의 문예 미학과 서예 미학  ● 이당의 실용주의와 실학 철학    나오는 말  이당(怡堂)이라는 별호처럼 아름다운 그의 철학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록 1. 이당 안병욱 연보  부록 2. 이당 안병욱 저작 및 기고문 목록  회고의 글 / 김선욱 / 박인주 / 이동원 / 황보윤식  감사의 말 / 안동규   ▶ 저자 소개   <김대식> 1967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M.A.),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Ph.D.), 숭실대학교 대학원 철학과(Ph.D.)에서 공부하였다. 지금은 숭실대학교, 원광디지털대학교 등에 출강하면서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학술위원장 및 안병욱아카데미 원장,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과 (사)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 사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이성의 해방』, 『함석헌의 평화론』, 『칸트철학과 타자인식의 해석학』,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그리스도교 생태철학』, 『켜켜이 쌓인 시간을 풀어주는 사람』, 『성서로운 삶을 향한 존재의 이해』, 『절대자유를 갈망한 사람들』(공저), 『치명적 자유의 향연: 아나키즘과 함석헌』(공저) 등이 있다.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1-01-18
  • 미(美)는 인간에게 하나의 구원입니다
    “미는 영원의 기쁨이라고 영국의 시인 키이츠는 노래했다. 인간에게 풍성한 미의 세계가 부여되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미는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구원이다. (…) 인간이 지니는 보람과 가치의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다시없이 소중한 것의 하나가 미의 세계요, 아름다움의 왕국이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58.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슴속에서 나온다. 인생이 깊은 것은 심장의 산물이다. 인생의 가장 성실한 것은 가슴속에서 피어난다. (…) 가슴은 하나님의 출장소다. 가슴은 인생의 지성소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7, 아름다운 창조』, 교육도서, 1988, p.67. 이당의 미학은 다채미(多彩美)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美)란 단적으로 아름다움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풍성하고 섬세하고 미묘합니다. 이당은 미를 “신비의 여신이요, 황홀과 도취의 어머니요, 기쁨과 만족의 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미는 자연, 예술, 인간의 표정과 육체의 정신, 품성 등에서 뿜어져 나옵니다.   자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마디로 장엄합니다. 위대하고 웅장합니다. 감격을 불러일으킵니다. 장엄하고 웅장함에서 풍기는 미를 느끼게 합니다.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를 좋아했던 이당은, 그 음악가로부터 우아미, 섬세미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미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이상적인 미의 원형을 발견하고, 조화와 균형을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당은 인간이 지닌 정신의 미, 성격의 미, 인품의 미를 외형의 미, 용모의 미보다 높게 쳤습니다. 이는 성격을 닦고 인품을 기르고 심전을 풍성하게 가꾸는 데서 풍기는 향기입니다. 겉모습을 다듬고 외형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것만으로는 정신의 미, 인품의 미까지 달라지지 않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미는 쾌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쾌감은 무관심한 만족, 곧 직접적 이해관계나 실제적 목적에서 떠난 순수한 만족감입니다. 미에는 욕망이나 욕구가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순수한 만족감이고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미를 목적 없이 목적에 적합한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미는 순수한 쾌감이자 정신적 만족감입니다. 미를 통해서 인간은 정신적 구원의 경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른바 “미는 종교 아닌 종교”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미는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 하는 세계입니다. 해탈 아닌 해탈의 세계입니다.   이당은 여성에게서는 우미(優美, grace; Anmut), 남성에게서는 위엄미(威嚴美; dignitas)가 풍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미의 극치는 정신의 미와 관능의 미가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됩니다. 그러나 미는 생명적이고 건강하고 영속적인 데서 드러납니다. 숭고미는 엄청나게 크고 무한한 힘을 지닌 대상에게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미적 감정입니다. 밤하늘, 망망대해, 험산 준령을 바라볼 때는 압도감을 느낍니다. 숭고함은 영원과 무한의 상징입니다. 우미는 조화와 균형, 숭고미(sublime; Erhabene)는 조화와 균형을 깬 미를 가리킵니다. 비극의 미(비참의 미, 혹은 비장미)라고 하는 것은 숭고의 감정이 고뇌나 비극과 결부될 때 느끼는 미적 감정입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을 구분하였습니다. 아폴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서 정적이고 합리적인 미의 표현인 건축에 의한 조형예술의 상징이고, 디오니소스는 술과 도취의 신으로서 음악과 무용에 의한 동적이고 격정적, 비합리주의적 미를 나타냅니다.   이당이 미에 관해서 기술한 내용을 일별해 보았습니다만, 그는 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미는) 인간의 영원한 기쁨이요 행복한 도취요 순수한 만족의 쾌감이요 인생의 가장 흐뭇한 보람이요, 목적이요, 가치다.” 따라서 미는 생명적이어야 합니다. 다양함 속에서의 통일성, 질서 가운데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움, 그리고 균형감 있는 생의 충일감(充溢感)을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미는 생명에 건강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생을 저해하거나 손상하는 미, 혹은 생을 피곤케 하는 미는 참된 미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당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건강하고 건전한 미의식을 가지고 생명에 기쁨을 주는 미를 탐구하고 창조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6, 철학노트』, 교육도서, 1988, pp.58~7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12
  • 생(生)의 내실(內實)을 기하십시오
    “진리를 말하기는 쉽고, 애국을 논하기도 쉽고, 정의를 외치기도 쉽다. 근면과 저축과 검소를 운운하기는 쉽다. 말이야 누군들 못하랴. 행하는 것이 문제요, 실천이 중요하다. 입으로 애국을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진리와 신의를 역설하는 사람은 허다하여도 몸소 행하는 사람은 적다. 정의(正義)의 주장자는 많아도 실천자는 드물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46. 생은 체험으로 가득한 삶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생을 체험, 이해, 표현으로 본 딜타이, 힘에의 의지로 본 니체, 그리고 생의 약동으로 본 베르그손, 이들의 철학적 핵심어는 생, 삶입니다. 사람이 삶을 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 살 것이냐, 내용이 실(實)한 인생을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무진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 바탕에는 적어도 생명이 있는 존재는 유익하다는 마음(利心)이 깔려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살아갈 때 가치가 있다는 결과를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학이 실(實)과 이용후생(利用厚生)에 중점을 둔 철학으로 발전한 것도 삶을 추상적이거나 형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실증입니다.   이당은 “무실(務實)의 반대는 부허(浮虛)요, 허위(虛僞)요, 역행(力行)의 반대는 공리공론(空理空論)이요, 형식주의요, 외화내허(外華內虛)다. 거짓과 공리공론과 외화내허의 사회는 허약한 사회요, 그러한 생활은 허망한 생활이요, 그러한 인간은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라고 말합니다. 실(實)은 거짓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참이며 가득 차 있음을 뜻합니다. 거짓은 속이 비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학은 사(事), 현상, 보이는 것, 사실을 중시합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에서 실은 넉넉함, 부강함, 민생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허울 좋은 명분만 남발되는 사회에서 알짬, 알참, 꽉 참이 절실합니다.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말보다는 행동과 실천을 더 중시해야 합니다. 지(知)가 아니라 행(行)에 무게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행동(pragma)과 실천에 방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저마다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을 두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진정성이 없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참 행동과 삶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나라의 철학이자 사상의 근간이 된다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병욱, 『희망이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대사, 1991, p.238~24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8
  • 우리는 창조적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결코 향락의 놀이터가 아니다. 정성스러운 창조의 일터다. 로마의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무용(舞踊)보다도 씨름과 비슷하다. 우리는 매일 싸워야 한다. 특히 내가 나하고 항상 싸워야 한다. 인생은 자아를 실천하는 사명의 장소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의 생명을 조각하는 진지한 생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생에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향락이 아니고 일이요, 활동이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44.   인생에서 자기의 생명을 끊임없이 개조하는 일은 인간의 과제입니다. 삶의 개조, 혼의 개조를 부르짖은 춘원 이광수의 말처럼, 인간은 혼을 개조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생의 예술가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당의 메시지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자기를 축조하는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합니다. 그것이 생의 의의입니다.   지성인은 비판적 양심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대학입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자신과 사물을 깊이 탐구하는 정신, 분석적으로 사고하고 공정하게 비판하는 정신을 지닌 지성인들이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을 넘어서 사라질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교육의 근본 목적은 “개조(改造)”에 있습니다. 인간 형성과 주체(자아) 및 객체(타아)를 개조하는 것이 교육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의 사람, 이성적 사유, 탐구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지성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의 과정에서 창조와 지성은 나란히 가야 합니다. 생은 창조적 활동이요 날카로운 인식과 성찰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배워서 자신을 교정하고 개조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 곧 자아와 인격 전체를 참되게, 착하게, 아름답게 만들어가게 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마음 밭의 계발, 주체와 객체의 개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칸트(I. Kant)가 주창하는 선한 인격과 듀이(J. Dewey)가 내세우는 좋은 환경과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칸트의 도덕제일주의와 듀이의 지식제일주의의 융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주체와 개조에 중심을 두는 도덕제일주의와 객체의 개조에 역점을 두는 지식제일주의 혹은 직업주의교육은 양분될 우려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앙리 베르그손과 존 듀이가 역설한 삶의 도구로서의 지성, 기술적 지성, 창조적 지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창조적 지성으로 살아가려면 객관적 대상을 조용히 바라다보는 관상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도 균형 있게 갖춰야 합니다.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창조적 지성과 사변적 지성, 도덕적 지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모든 건설은 인간이 하는 것”인데, 대학과 사회가 모두 민주지성의 탄생에 이바지하겠다는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칸트는 “스스로 사색하고 스스로 탐구하고 제 발로 서라”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바람직한 지성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창조적 지성과 더불어 비판적 사고능력, 그리고 관조적 지성을 겸비하려는 생의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안병욱, 『安秉煜 에세이 10, 영원한 자유인』, 교육도서, 1988, pp.44~5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10-07

실시간 창작과지성 기사

  • 민족성 개조만이 살 길입니다
    “민족의 흥망성쇠는 그 민족성에 달려 있다. ‘민족적 성격의 개조, 이것이 민족이 살아나갈 유일의 길이다.’ (...) 민족개조주의 내용이 무엇이냐. (...)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게, 공상(空想)과 공론(空論)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 의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부지런히 실행하게, (...) 실과 행의 국민 성격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민족 개조 사상의 핵심이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p.189-191.   [타임즈코리아] 이당이 평소에 무실역행의 실과 행의 생활을 반복적으로 성(誠)의 철학과 연결 지은 것은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각별하게 생각하고 영향을 받았던 춘원 이광수가 해석한 도산의 민족개조론과도 맞물려 있습니다(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228.).   정성을 다한 것과 정성을 다한 것으로 나타난 행위와 결과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실을 다한 후에 실망(失望)하거나, 망연자실(茫然自失)하기도 합니다. 이당은 성실하면 손해를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습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속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성실은 누구나 인생의 기본 신조로 삼아야 할 필수적 자세입니다.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 철학은 그 어원이 되는 ‘pragma’곧 행동과 관련된 실용적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행동과 행위에 방점을 찍은 것은 정성스러운 행위와 삶은 좋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실은 대도(大道)요, 정도(正道)요, 상도(常道)가 되어 개인과 사회를 바로 세우는 원리입니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는 “무릇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 어렵다”고 했습니다.   중용에서 강조하고 있는 성의, 성실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산의 ‘민족개조론’에 대해 춘원이 논문을 쓴 것처럼, 성실을 진리로 삼되 생각한 바를 부지런히 실행에 옮기며 거짓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춘원도 무실과 역행을 ‘민족개조론’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오늘날 정치계나 경제계, 교육계 혹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빈말이 난무합니다. 말을 뱉어 놓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그저 한담(閑談)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자아를 속이고 참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용주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 James)는 “진리는 선(善)의 일종”이라고 하면서, “선(善)을 현실과 삶에서 모색하는 지적 행위가 바로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무실(務實)과 역행(力行)은 진리이자 선(善)입니다. 따라서 생을 산다는 것은 진리에 따라 산다는 것이요, 선한 행위의 흐름으로써 산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합니다. 역으로 유용하기에 진리라고 보는 것이 실용주의의 주요 논점입니다. 진리와 유용성은 삶에서 그 일치가 증명된다는 것인데, 진리는 자신의 삶에서 유용하다는 것이기에 모두에게 통용되는 현금 화폐(cash)와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誠)은 곧 실(實)이요, 진(眞)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삶과 타자에게 정성을 다하는 행위는 모두에게 보편타당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행동으로 드러나는 가치가 있는 삶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안병욱, 『안병욱에세이9 너와 나의 만남』, 교육도서, 1988, pp.11~13, 171, 189~191.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9-15
  • 성실한 생이 안온(安穩)한 죽음을 약속합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우리는 죽는 연습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 태연자약(泰然自若)하게 죽을 수 있는 마음 자리를 준비하면서 네 인생을 살아라. 그것이 현인(賢人)의 길이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142.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말은 이당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안동규 교수, 현재 한림대학교 부총장)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라는 말로 규정하였습니다. 누구나 인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 만물의 이치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현재의 삶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많은 재물을 소유하려고 남에게 상처를 줄 까닭도 없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유산을 남긴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산 때문에 자식들 사이에 분란이 발생하고 사람답지 못한 상황까지 벌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끝에 유산을 남기느니, 자식들에게 평생 남을 만한 좋은 생의 철학을 물려주는 것이 낫습니다.   죽음은 그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뿐입니다. 자신이 왔던 곳으로 가는 것이니, 서러워할 것도 욕심을 낼 것도 없습니다. 초연하게 죽음을 사유하고 맞이해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도 “나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없다. 낙심하지 마시오”라고 유언했습니다.   성실과 사랑, 단순함과 소박함의 삶을 살았던 사람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의 완성입니다. 칼 야스퍼스(K. Jaspers)는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한계상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당은 죽음이란 3가지 부정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존재의 부정(否定)입니다. 내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건입니다. 둘째는 경험의 부정입니다. 죽어 본 일이 없이 불현듯 죽음을 경험하니, 그 경험의 질과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식의 부정입니다. 죽음을 묻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저 정의만 내릴 뿐입니다.   만일 죽음의 대강이 이렇다면 삶에 대해서 사유하는 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나 이당이 말한 것처럼 죽음을 연습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고 죽음 앞에서 멈칫거리지 않도록 생에 대해 성실하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후에 인간은 무(無)로 돌아갑니다. 영원히 유(有)일 것 같은 생이지만, 언젠가 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그때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삶을 살듯이 일분일초라도 허투루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라는 말은 사유의 처음과 끝에 걸려 있는 죽음을 매 순간 떠올리며 삶에 대한 깨달음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엄중한 지침처럼 들립니다. 인간은 자신의 처음과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무(無)와 만나야 할 존재이기에, 이미 돌아갈 죽음의 흐름 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생을 가치 있게 산 사람만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생을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은 죽는 연습을 잘 하며 사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이 실제임을 깨닫는 지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p.139~142.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9-14
  • 생은 사유와 행동의 지속입니다
    “현대인은 자기의 머리로 줄기차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잃어버리기 쉽다.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의식의 과잉’과 ‘예지(叡智)의 빈곤’ 이것이 현대의 지식인이 빠지기 쉬운 결함이다. 남의 판단과 의견을 비판과 사고(思考)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신의 노예요, 사상의 종이다. 우리는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기의 판단과 의견을 가져야 한다. 옛날의 철학자들처럼 자신의 머리로 줄기차고 끈기 있게 사색하는 습관과 능력을 길러야 한다.” 안병욱, 「고독과 사색」, 『새 세대의 진로』, 학원사, 1963, p.71.   생즉사(生即思). 이당의 사유방식대로 말놀이를 하자면, 생은 곧 사색이요 사유이자 생각입니다.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참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신체적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 존재라는 그 특수성이 이를 나타냅니다. 인간은 미각적 쾌를 만족시키고 싶어 하는 욕구, 배설하는 쾌를 느끼는 욕구, 졸리면 자고 싶어 하는 취침 쾌의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특성 이외에 생각하고, 사색하고, 사유하는 특수성을 지닌 존재입니다.   이당이 말하듯이, 동물은 신체적 탄생은 있지만, 정신의 탄생과 자아의 탄생이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는 달리 정신과 자아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반성, 내적 세계의 성찰, 자기 응시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통찰한 것처럼 인간은 속절없이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입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직관한 것처럼 인간은 우연적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 자신에 대한 운명과 유한성의 자각은 인간에게 대상에 대한 관심에서 내적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고독한 사색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마침내 데카르트(R. Descartes)가 말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사색할 능력과 습관, 사유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자세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가 부족합니다. 세계를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예지력(叡智力)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고 스스로 사고하는 습관이 퇴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자기를 알고, 더 나은 ‘나’를 자기 안에서 잉태하고 출산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지지자였던 생철학자 오이켄(R. Eucken)은 인간에 대해 외면적 풍요와 비교하면 내면적으로는 빈곤하여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삶을 내면화시키고 고양할 뿐만 아니라, 일상의 표피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활동(Johannes Fischl 지음, 백승균 편역, 『생철학』, 서광사, 1987, pp.64~64.)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주체적 자아의 확립은 사색에서 나옵니다.   생철학자 앙리 베르크손(H. Bergson)은 “사색인으로 행동하고 행동인으로 사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생각, 사색, 사유는 행동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올바른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사색을 해야 합니다. 이를 꿰뚫어 본 왕양명(王陽明)은 앎과 행위가 일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귀결이 일어나려면 그것은 올바른 생각, 사색, 사유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될까요? 인간은 올바른 생각, 사색, 사유를 통하여 새로운 삶을 일구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결여된 만큼 그 존재적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삶과 교육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질에서 벗어난 약육강식, 적자생존에 따른 경제적 논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우리의 내면에 이것이 자리한 만큼 식민지화되었고, 이에 대한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노예의 삶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노예적 삶을 당연한 숙명으로 여기며 이를 더 강화하려는 몸부림을 생의 의미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약물중독에 빠져 환상의 세계를 헤매는 사람이 그것을 진실의 세계로 착각하여, 더욱더 그런 상태에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사유와 행동으로 인간으로서 그 존재 가치를 발현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생이 창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과정), 이루어진 것(결과)은 곧 나의 주체적 정신, 즉 생각, 사색, 사유가 오롯이 완성되는 것(과정), 완성된다는 것(결과)임을 깨달아야 가능해집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수많은 관계와 환경 속에서 이런 여정을 성숙하게 이어나가며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어야 인간이라는 존재 가치가 향기를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병욱, 「고독과 사색」, 『새 세대의 진로』, 학원사, 1963, p.65~74.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9-07
  • 생의 표현(表現)이 없는 존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 춤을 배우는 사람, 기하학을 배우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인생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중요한 것을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다. 학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인생학(人生學)이다. 배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배움은 인생을 바로 사는 지혜와 슬기를 배우는 것이다.”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p.12~13. [타임즈코리아] “인생은 학교로 비유된다.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생즉학(生即學)이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배워야 한다.”   이당은 이 말을 통해 매우 자명한 이치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유달리 인간 사회에서만 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는 것도 사람은 배워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교가 아니라도 배울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당이 말한 “인생은 학교다”라는 대명제에 보자면 ‘생의 평생 배움’, ‘생의 항상 배움’, ‘생의 겸손한 배움’은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의 자각’에서 생긴 배움에 대한 열망과 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배움은 생을 근본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됩니다. 오늘날 배움의 기회와 도구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배움이라는 것이 발전하기보다는 부작용에 시달리며 정체되어 있습니다. 획일화의 그늘에 가려서 수동적·피동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배움이 생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도구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배움은 생의 낯선 체험을 잘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통해 문화, 예술 등을 인간답게 표현할 수 있게 하는 토대가 되어줍니다. 결국 배움은 자기를 이해하고, 타자를 이해하며, 나아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이당은 이러한 관점에 힘을 싣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볼 때 만물 중에서 가장 무력한 존재다. 살기 위해 문화를 배워야 한다.” 독일 철학자 칸트도 “인간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배우는 사람이야말로 현명한 사람입니다. 배움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당은 날마다 배우고 익히는‘일일학(日日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간다고 고백했습니다.   배움은 수양의 과정으로서 사람과 사물, 그리고 자연 등 그 무엇을 통해서라도 인간이 인간다움을 이루기 위해 생 전체를 관통하며 성실히 실천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인생 여행이 자기완성의 여정이라고 할 때 인격은 배움을 통하여 진리를 터득하는 데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이에 이당은 “존재는 표현이다. 산다는 것은 자기 표현이다”라고 규정합니다.   생은 인간이 진실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여정입니다. 생은 표현입니다. 생은 내적으로 의미가 있고, 사상이 있고, 뜻이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을 산다는 것은 저마다 제 소리를 하고, 제 노래를 부르고, 제 생각을 드러내고, 제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체가 자기의 고유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생은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펼쳐내는 창작입니다. 따라서 창조적 자기 표현, 그것이 자기 실현이자 자기완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은 엄숙하고 진지하다. 우리의 삶은 고귀하고 존엄(尊嚴)하다”라는 이당의 말에 더더욱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의 언명은 생을 대하는 자세를 엄중(嚴重)하게 하라는 죽비(竹篦)와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이당의 생철학적 직관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나, 가장 순수한 나, 가장 선한 나를 표현해야 한다. 너 자신을 가장 아름답게 하여라.”   안병욱, 『삶의 길목에서1』, 자유문학사, 1997, pp.11~14, 35~38, 127~130.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9-01
  • 행복은 삶에 정성을 다한 만족감입니다
    “행복이란 단어는 인생의 사전에서 가장 큰 대문자로 써야 할 말입니다. 우리의 대화에 항상 오르내리고, 우리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차지하는 단어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알파며 오메가입니다.” 안병욱, 『인생사전』, 예원북, 2013, p.35.   우리는 행복이란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콜센터 직원도 고객에게 행복하여지라는 인사를 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거나 내가 행복하려면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려면 보람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감을 느낄 만큼 일, 관계, 삶에서 두드러진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정성과 지성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자녀가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형통한 형편이라고 해서 행복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이로 인해 느끼는 행복이라면 이것은 이런 상태가 유지될 때, 이와 연관된 부분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수동적이고 한정적인 행복입니다.   조건부 행복일 뿐입니다. 행복의 조건이 많다는 것과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밀접한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진정한 행복이라면 조건에 따라 좌우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유형의 산물이 아니라, 무형의 산물입니다. 마음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솟아나는 원천으로 비롯된 행복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조건에 따른 행복은 그 조건이 사라지면 불행으로 바뀌지만, 조건 없이 마음에서 샘솟는 행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에 따른 것이 아니기에 깊이 새겨져 영원히 각인됩니다.   밥, 돈, 자식, 집, 직장과 같은 외부적 조건도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진정한 행복은 사랑에서 꽃이 피고 열매 맺습니다. 피상성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행복을 바깥에서 찾지만, 그럴수록 갈증만 더해집니다. 진정한 행복을 원한다면 마음에 사랑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사랑의 씨앗이 꽃을 피우면 욕심을 내려놓고 삶에 정성을 다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만족스러운 마음, 평화로운 마음, 여유로운 마음, 배려와 나눔의 마음이 창출되며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자신의 인생이 예술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옛말에 ‘유어예(遊於藝)’라고 했습니다. “예술을 즐기고 예술 속에서 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공자는 일찌감치 도(道), 덕(德), 인(仁), 예(藝)를 생활 원리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道)에 뜻을 두어 인생이 정도를 가도록 마음을 가지라는 ‘지어도(志於道)’ 하며, 덕에 근거해서 인간다운 품위와 덕성을 가지고 살라는 ‘거어덕(據於德)’ 하며, 인에 의지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의어인(依於仁)’ 하며, 예술 속에 놀라는 ‘유어예(游於藝)’하여야 한다.   미(美)는 마음에 여유를 줍니다. 정신에 생동감을 주고 마음을 황홀하게 하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이처럼 미는 모든 삶의 조건들을 잠시 초월하게 하고, 인생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와 같이 미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정성을 다하도록 하게 해줍니다. 마음이 외부적인 환경을 넘어서는 초연, 초월, 자유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예술(美)이기 때문입니다.   이당은 예도삼매(藝道三昧)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예술을 즐기고 예술에 몰두하고 예술에 도취한다”는 것입니다. 이당은 여기에 인생의 진정한 맛과 정취, 그리고 아름다움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미와 예술은 마음을 순화하고 정화해줍니다. 이렇듯 마음은 미와 예술의 향유를 통해서 즐거움으로 가득해지게 됩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에는 예술을 즐기면서 여유와 쉼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때 비로소 인생의 아름다움을 살필 수 있는 안목인 심미안(審美眼)이 꽃을 피우기 때문입니다.   미적 대상을 보고 마음이 아름다워지는 미적 감수성이 활성화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또 하나의 행복감입니다. 그 행복감의 원천은 인간의 마음 바탕, 곧 참되고 진실함으로 정성을 다하려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진리와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의 일치는 모두 인간의 마음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안병욱, 『인생사전』, 예원북, 2013, pp.33-40, 209-211.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31
  • 노예의 생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로운 도덕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역사적 명령이다. ‘청년들이여,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같이 있어라.’ 프랑스의 문인 졸라(Émile François Zola)는 이렇게 외쳤다. 의의 편에 서서 이상에 살려는 것이 젊은이의 기상이다. 한 민족의 청년들이 이런 기상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두 진실한 인간이 될 의무를 갖는다. 진실은 만인(萬人)의 대도(大道)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5 행복의 미학』, 교육도서, 1988, p.61. 생(生)의 의미나 생의 체험은 역사에서 길어 올려야 합니다. 역사적 생의 낯선 체험을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했던 독일 철학자 딜타이(W. Dilthey)에게 생은 원본적 사실입니다. 생은 내적으로 우리에게 이미 알려져 있습니다. 생은 그보다 더 소급될 수 없는 전제의 전제라는 말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세계는 정신적이며 역사적 세계로서 생이 드러난 현실입니다. 이 세계에서 역사적 주체로서 인간은 자주인(自主人)이라고 표현한 이당은 자주의 정신은 노예의 정신과 맞선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적 삶의 의식과 해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노예를 ‘살아 있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도구는 인격이 없습니다. 도구는 사용을 기다리는 객체일 뿐입니다.   노예는 자기가 지닌 의식도, 자기의 판단도, 자기가 구상하는 계획이 없이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신분상으로는 노예가 아니지만, 자기만의 의식이며 판단, 자기가 설계하고 꿈꾸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노예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외부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존재는 자유도 권리도 없습니다. 자기의 운명을 자기가 개척할 수는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불경(佛經)에 “자등명 자귀의(自燈明 自歸依)”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자기에게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정신이 없으면 죽은 존재고,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존립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서고자 하는 사람에게 정신은 생명처럼 귀중합니다. 그것은 강인한 정신, 사라지지 않는 정신, 굴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고통당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제우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불의와 억압에 맞서 약자인 인간의 편을 드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적 저항정신입니다.   인간은 불의한 외부와 저항하는 정신이자 부당하게 주어진 자기 운명과도 싸우는 새로운 정신으로 가득한 새로운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노예의 정신, 노예의 덕을 없애고 완전한 자유인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진실을 토대로 사고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선의 기초입니다.” 이당은 진실과 진리를 같이 봅니다. 진실한 정신은 진리의 정신에 따라 의롭게 살아갑니다.   진리는 참이요, 삶의 근본입니다. 진리는 편견과 사리(私利), 아집에 사로잡힌 상태가 아닙니다. 진리의 정신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참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진리의 정신은 하늘의 길이자 참을 행하는 사람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허위(虛僞)가 없습니다. 허위는 악의 통로입니다. 바이러스가 건강을 해치고 마침내 생명까지 위협하듯이 허위는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 세계, 진리의 세계에서 허위를 물리치고 참을 따르기 위해서는 부단히 자기를 수양해야 합니다. 양명학(陽明學)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은 “산중(山中)의 적(賊)은 물리치기 쉽지만, 심중(心中)의 적은 물리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진리의 정신과 마음을 따른다는 것은 녹록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진리를 따라 올곧은 삶을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이당의 명쾌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의로운 도덕적 질서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역사적 명령이다. ‘청년들이여, 청년들이여, 언제나 정의와 같이 있어라.’ 프랑스의 문인 졸라(Émile François Zola)는 이렇게 외쳤다. 의의 편에 서서 이상에 살려는 것이 젊은이의 기상이다. 한 민족의 청년들이 이런 기상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그 민족의 장래에 대해서 아무런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두 진실한 인간이 될 의무를 갖는다. 진실은 만인(萬人)의 대도(大道)다.”   이당은 성실하게 일관된 자세를 취하고 실천하라는 성실일관(誠實一貫)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진실한 사회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진실의 정신으로 새로운 사회를 세우고 새 역사를 쓰려면 제 분에 맞게[應分] 근면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실한 정신과 생생한 삶을 추구하며 살았던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어찌 행복을 구하랴. 나는 일을 구한다.” 삶의 열정은 정성을 기울이는 삶에 대하여 고뇌를 극복하도록 합니다. 동시에 진리와 진실의 정신만이 인간의 생을 구원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진실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생의 화두는 진실의 정신과 진리의 정신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병욱, 『安秉煜에세이5 행복의 미학』, 교육도서, 1988, pp.53~63.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8
  • 구도자의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진지한 구도자(求道者)의 정신을 가지고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무책임한 향락의 유흥장이 아니요, 심심풀이로 하는 도박의 장소가 아니요, 일확천금에 골몰하는 탐욕의 싸움터가 아니다. 인생은 성실하게 일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엄숙한 수련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되는 대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안병욱, 『때를 알아라』, 자유문학사, 1998, p.26. 생즉동(生卽動). 산다는 것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명이 움터오는 것입니다. 삶은 생명의 바탕에서 그렇게 움직이는 힘으로써 지속됩니다. 이렇듯 인간은 움직이는 존재, 활동하는 존재, 일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동물이라고 칭하는 속뜻도 생(生)에 기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Gottfried W. Leibniz)는 “존재한다는 것은 활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의 고유성, 생명의 특성은 활동에 있습니다. 움직이고 사는 것, 사는 것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존재의 위대함은 움직임, 힘들여 움직임[重+力]에 있습니다. 이당은 “활동은 존재의 핵심 원리요, 생활의 등뼈”라고 갈파합니다.   존재, 곧 ‘있다’라는 것은 ‘움직임’이라고 역설한 이당의 철학은 누구보다도 삶에 대해 생생하게 잘 이해한 것에서부터 우러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당을 일컬어 “영혼의 향기를 리듬으로 여는 운명과 자유의 교향악 연주자”라고 했습니다.   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남이 움직이라고 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 존재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은 일에 치여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가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많은 정보와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식과 정보의 범람 속에 지성을 제대로 키워낼 맑고 순수한 사상은 부족합니다. 이런 시대 속이지만 우리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올바름을 지향하여 성찰적 실천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에 이당은 일의 노예가 아니라, 일의 주인이 되라고 말합니다. 빵과 수입에 매몰되지 않고 일 자체를 사랑하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것에는 쉬는 것도 포함됩니다. 인간의 삶에는 잠자는 것도 포함되듯 쉼은 곧 일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도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하루는 쉬라고 합니다. 학교에도 방학이 있습니다. 이것은 방학도 교육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마치 신들린 듯이 혹은 신이 나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역동이요, 열정입니다. 열정을 뜻하는 enthusiasm은 신이 내 안에, 내가 신 안에(entheos) 있는 물아일체, 혼연일체의 무아적(無我的) 경지를 가리킵니다. 일하든지, 공부하든지, 사랑하든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삶의 대부분을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ora et labora(기도와 노동)’를 균형 있게 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수도원의 정신은 인간의 생이 어때야 하는지를 잘 짚어준 것입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날은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생은 오늘입니다. 오늘은 지나면 다시 오지 않으니 오늘이라는 시간에 기꺼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을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생에 대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이 끝나면 죽음입니다. 오늘의 연속 후에 맞이하는 시간은 오늘이 다한 죽음이요, 오늘은 다시는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선가 솟아오기도 하지만 늘 사라져가기도 합니다.   인구에 회자되는 “오늘이 네 인생의 첫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 오늘이 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라”라는 교훈은 오랜 생의 체험이 반영된 지혜입니다. 오늘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허투루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오늘은 누구를 기쁘게 해줄까를 생각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여라.” 이당의 깨우침 또한 가슴에 울림을 줍니다. “오늘을 천일(天日)이라 생각하라.” “오늘 만나는 사람을 천민(天民)이라 생각하라.” “오늘 하는 일이 천직(天職)이라 생각하라.” 오늘은 하늘이 내게 준 날입니다. 지금 만나는 사람은 하늘이 내게 보내 준 사람입니다. 이 시간에 내가 하는 일은 하늘이 내게 맡겨준 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날이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늘 비범한 날입니다. 감사의 날, 은총의 날, 희열의 날, 행복의 날입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이 날을 열(熱)과 성(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을 살아가되 올바르게 살아갈 뿐만 아니라[正道], 어질고, 사랑하며[仁]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공자의 애제자 증자(曾子)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고 했습니다. 생의 책임은 무겁고 나의 갈 길은 먼 법입니다.   “오늘은 영원 속에서 오직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소중한 날입니다. (...) 오늘을 사랑하고 오늘을 감사하고, 오늘에 충실하십시오. (더불어) 우리는 가야 할 옳은 길을 선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성의를 다하여 열심히 가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대원칙입니다.”   안병욱, 『때를 알아라』, 자유문학사, 1998, p.11~26.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7
  • 진정한 앎은 ‘행함’으로 이어집니다
        [타임즈코리아] 무실(務實)의 한쪽 날개인 역행(力行)은 바로 행동주의와 실천주의를 일컫습니다. 탁상공론이나 하고 실천과 행동이 게으르면 민중도 나라도 힘이 약해집니다.   조선 근대유학의 양대 산맥을 꼽으라고 하면 주자학(朱子學)과 양명학(陽明學)입니다. 이견이 없다면 전자는 독서, 이론,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후자는 지행일치(知行一致)와 사상연마(事上鍊磨)의 철학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주자학에 매달려 공담허상(空談虛想) 만 늘어놓을 뿐 민생과 민중의 의식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양명학이 배척당하게 되면서 그 뜻을 제대로 실현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實學)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등장한 철학입니다.   왕양명은 “아는 것은 행하는 것의 시작이고, 행하는 것은 아는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知行之始, 行知之成)”라고 가르쳤습니다. 앎의 목적은 행위에 있습니다.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적인 일을 통해서 인격과 정신을 연마해야 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근면과 성실로써 땀을 흘리면서 그 노고를 아끼지 않으면 그 일의 의미를 터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으로써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속이지 않고 진실하고 근면하게 실천하는 것이 무실역행이고, 지행일치의 삶이자 생의 철학입니다. 사실 진실주의와 행동주의는 이율곡이 주장하는 성(誠)의 철학을 시작으로 왕양명뿐만 아니라 실학에 이르기까지 오롯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나 이당 안병욱이 정신과 삶의 철학으로 펼치려고 했던 무실역행의 뿌리는 성실이고 참이었습니다. 성의 표현이 무실이며 역행입니다. 참의 원리는 하늘의 길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불완전합니다. 유한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부단히 극복하려는 존재입니다. '참'되려고 노력하고 '성실'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면 성의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실역행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당은 그 방법으로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 다섯 가지를 언급합니다. 사람은 널리 배워서 정신세계를 확대하고 식견을 넓게 해야 합니다(박학). 사람은 자세히 물어야 합니다. 올바른 물음은 올바른 대답을 가능하게 합니다(심문). 혼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색이 없는 독서는 저작(咀嚼)이 없는 식사와 같다(신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올바른 사리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명변). 사람은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한 것이 모두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독행).   이당은 “학(學)에서 시작하여 행(行)으로 끝나야 한다. 학의 목적은 각(覺)에 있고, 각의 목적은 행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성에서 비롯됩니다. 참됨과 성실함[誠]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한 행위가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무실역행의 근본이자 성의 본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진실함이 바탕을 이루지 않으면 그것은 사상누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자신도 속는 것이고 타자도 속이는 삶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는 곧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38, 151.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p.264~274.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5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삽시다
    “최초로 무실역행의 정신을 강조한 사람은 도산 선생이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선생이 도산 선생에게 “무실역행을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면 뭐라고 하면 좋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때 도산은 간결 명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무실은 속이지 말자요, 역행은 놀지 말라다.” 속이지 말고 놀지 말자. 이것이 무실역행의 근본이다. 적극적 표현을 하면, '참되자'와 '일하자'다.”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265. <한국실학학회>에서는 실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실학은 형이상학적 사변적 학풍의 비생산적 논쟁이 만성화되어 있거나 어떤 이념과 체제에 묶이어 시대 현실에서 멀어져 가고 있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현실에 즉한 실제 사정에 대한 과학적 파악으로 문제해결을 추구하려는 학문 방향을 말한다.”   이는 사변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증적이면서 동시에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공부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형이상학보다 삶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율곡, 정약용, 안창호, 그리고 이당 안병욱은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더 방점을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정신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하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에 있어야 합니다. 생의 근본 철학은 무실과 역행이어야 한다는 것은 독일 근대철학자 피히테(Johann G. Fichte)와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1870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일어났던 독불전쟁에서 독일이 패망한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피히테는 도덕적 삶의 해이와 민중의 이기심을 들었습니다.   그는 칸트의 계승자이자 초월적 관념론자로서 자아의 본질을 무한한 활동으로 보았습니다. 이 자아의 활동성은 동일한 사유 원리와 존재 원리를 바탕으로 하기에 행위(Handlung)와 사실(Tatsache)를 결합하는 근원적 활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식과 존재가 하나로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피히테는 이를 일컬어 사행(事行;Tathandlung)이라고 합니다. 이당은 “나는 활동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은 능동적 활동의 주체다. 그는 활동적 자아를 강조했다”라고 적시했습니다. 자아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행동하는 양심 속에 있습니다.   인간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실천이나 개인의 실력에서 성실해야 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이당이 실(實)의 개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삶은 실재실재(實在, reality)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것이 현실이고 그 역인 현실도 참되어야 한다는 생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참되다고 속임이 없는 것은 단지 개별 민중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민중을 토대로 하는 국가나 민족도 참되고 속임이 없어야 합니다. 조직, 제도, 체제가 개별 민중을 속이는 것은 진실을 상실한 것입니다. 왜곡된 진실을 받아들이는 민중들은 자신의 삶을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실(實)과 대립하는 것이 명(名), 허(虛), 위(僞)입니다. 명은 이름입니다. 실은 알맹이입니다. 이름만 있고 알맹이가 없으면 유명무실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름과 알맹이, 형식과 내용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을 명실상부(名實相符)라고 합니다. 명과 실이 다 완전한 것은 명실겸전(名實兼全) 혹은 명실쌍전(名實雙全)입니다. 제대로 이름값을 하려면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제구실을 못 하면 공허하기 짝이 없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이름값을 올바르게 해야 한다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을 펼쳤습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보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은 자기다움의 품위와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자면 내실(內實)을 키워야 합니다. 실과 대립하는 허(虛)는 공허와 허무를 의미합니다. 속이 빈 것이고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허명(虛名), 허세(虛勢), 허영(虛榮), 허욕(虛慾)은 허망한 것들입니다. 이에 이당은 “충실 속에 미(美)가 있고 힘이 있고 생명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충실미를 따르지 못하는 것이 위(僞)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삶은 참과 진실을 가볍게 여깁니다. “진실은 인간의 최고의 덕이다”라는 이당의 외침은 자신의 생의 법칙이자 규범을 살아낸 실질이고 체험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당은 “무실은 실사구시다. 행동과 실천은 아니 하고 공리공론으로 빈말, 빈 소리만 하는 폐풍(弊風)을 버리고, 실제(實際)와 실질(實質)에 입각하여 올바른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실사구시다. 우리는 무실인(務實人)이 되어야 한다”라고 역설합니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38, 151. 안병욱, 『세계사와 민족의 이상』, 철학과현실사, 1990, pp.264~274.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4
  • 시중(時中)하면 이미 군자입니다
    “중용은 중간이라는 뜻이 아니다. 중용은 지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상태요, 과부족(過不足)이 없는 중정(中正)의 상태를 말한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174. 공자는 “군자중용 소인반중용(君子中庸 小人反中庸)”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시중’(時中)입니다. 공자가 시중(時中)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때 그 경우에 꼭 알맞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때로, 수시로 인간의 삶은 지나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합니다. 때로 거기서 혹은 그때 딱 멈추어야 하는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이거나 조금 더 나아간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중(中)의 상태 딱 그만큼에서 절제와 절도를 발휘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한자어 중(中)에는 ‘가운데’를 의미하는 동시에 ‘맞힌다’는 뜻이 있습니다. 과녁의 가운데를 맞추거나 행동의 적정상태(適正狀態)를 의미하는 것이 시중입니다. 식사를 너무 지나치게 많이 해도, 너무 모자라게 해도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도 그 자리와 상황에 맞게 소리를 내야 합니다.   건강을 챙기지 못해서 몸과 마음에 결함이 생기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도 강박입니다. 타자나 자연에 대한 배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몸에 좋다는 온갖 것을 다 섭취합니다. 적당한 운동을 하며 활력을 발휘하는 것은 좋으나 무리한 운동을 하게 되면 오히려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처럼 시중의 철학적 시선으로 성(性)의 그때와 그 자리를 보아도 지나침과 모자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성은 지나쳐도, 모자라도 인간의 본능(本能)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영국의 작가 로렌스(D. H. Lawrence)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 서문에서 “나는 남자도 여자도 성(性)의 문제를 충분히 철저하게 성실하게 그리고 건전하게 생각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또 그의 서간집에서는 이런 말도 눈에 띕니다. “성과 미(美)는 생명과 의식(意識)처럼 하나의 것이다. 성을 증오하는 자는 미를 증오하는 자다. 살아 있는 미를 사랑하는 자는 성을 존중한다.”   성과 미는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고 인간의 감성적 행위입니다. 맹자도 ‘식색성야(食色性也)’라고 했습니다. 본능은 타고난 인간의 행동양식이나 능력입니다. 그것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이나 제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성의 때, 성의 자리도 성실하면 아름다운 법입니다.   이당은 “성은 본능 이상의 것도 아니요, 본능 이하의 것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생식(生殖, reproduction)도 과다(過多)와 과소(過少), 과대(過大)와 과소(過小)가 항상 골칫거리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시중에 대한 인식이 공고하게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알맞아야 합니다.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는 늘 자연에서 배워야 합니다. 자연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스스로 자신이 그러할 뿐입니다. 자연이 ‘지나치다’, ‘모자라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그렇게 규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인간의 행동에는 적시성(適時性)과 적소성(適所性)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때 그 자리에 꼭 알맞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자리를 논할 때 자기 혹은 주체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자신과 가족의 체면을 생각해서 다른 사람의 시선(타자의 입장)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즉, 동양에서는 시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때를 알고, 자리를 알고, 몸을 알며, 생각을 알아차리면 거기에 꼭 알맞은 처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적중하여 적절하게 말하고,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을 통해 조화(調和)와 중화(中和)를 이루게 합니다.   과식(過食), 과색(過色), 과음(過飮), 과욕(過慾) 등은 과유불급(過猶不及)입니다. 이당은 시중철학적 대안으로 지족(知足), 곧 수분지족(守分知足)을 내세웁니다. “우리는 지족의 철학을 배워야 한다. (...)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불행한 사람은 지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 지족이 행복의 길이요, 부지족(不知足)은 불행의 길이다. 인생은 마음먹기에 따라 선경(仙境)도 되고 범경(凡境)도 된다.” 이런 흐름을 따라가다가 보면 시중을 『중용(中庸)』의 철학적 핵심으로 삼은 이유를 납득할 것이라고 봅니다.   안병욱, 『빛과 지혜의 샘터』, 철학과현실사, 1992, p.44, 55, 73, 174. 참조. 
    • 창작과지성
    • 안병욱 평전
    2020-08-2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