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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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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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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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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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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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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2021-05-17

실시간 종합정보 기사

  • 분열이 아닌 성장을 이루는 분립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어야 한다.   지난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분립위원장 이성희 목사)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두 개로 분립하는 예배를 드렸다. 분열하여 갈라지는 분립이 아니라, 성장하여 두 개로 나누어 더욱더 활성화하기 위한 분립이었다.   분열은 개인과 사회를 멍들게 할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한 분립은 많은 유익을 창출한다. 모종해서 일정하게 키운 다음에는 분립을 시켜 밭에 옮겨 심어야 크게 성장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의 분립이 정치적 목적이나 자리다툼의 발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언젠가는 그 마각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성장을 이루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더 확산하고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면 나날이 성장하며 아름다운 향기를 발하게 될 것이다.   ▲ 지난 19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가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두 개로 분립하는 예배가 열렸다.       평양노회에서 새로 분립한 노회의 지도자가 된 박영득 목사와 그가 담임하는 남양주큰빛교회는 이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 서야 할 것이다. 나무는 열매를 보면 안다고 했다. 말로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치며 내적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계산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라, 악마의 조종을 받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성화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여기는 집단들이 교회를 빙자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그런 집단들을 욕하기 전에 그런 집단이 발생하게 한 생태계를 조성한 점에 대해 깊이 자성하고 올바른 신앙의 토대를 튼튼히 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도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는 생각으로 수수방관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들을 어찌 올바른 크리스천이라고 하겠는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민족과 사회의 문제에 대해 아파하며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 평양남노회장으로 선출 된 박영득 목사(남양주큰빛교회) - 좌측       일제 강점기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에 당당히 맞서서 순교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도 신앙고백적 삶을 실천하며 순교의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런 올곧은 목회자들이야말로 진정한 크리스천의 표상이다. 이런 크리스천들을 본받기는커녕 성경적 윤리관을 왜곡하여 자기 왕국을 만드는 조잡한 행위를 일삼고 신비주의적 행태를 마치 진실한 믿음의 행위인양 떠들어 댄다면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올바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도 분별조차 못 하는 크리스천과 지도자들이 제 잘난 줄로 착각하고 앞으로만 내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 실시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평양노회의 분립이 시대적으로 큰 모범을 남기며 올바른 기독교신앙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큰 유익과 덕을 세울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경북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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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15-10-22
  • 분노하는 민중과 함석헌 효과
      함석헌. 우리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아련하게 기억한다. 한국 역사의 현대사적 인물로서 철학, 정치, 경제, 종교, 문화, 기술, 교육, 여성 등에 대한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독특한 철학을 우려냈던 분으로 알려졌다. 그에 비해 더는 그를 이 시대에 다시 만나야 할 사상가로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서구 철학자의 세례를 받고 지난 반세기를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자양분을 그들로부터 찾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서구의 사상이나 철학조차도 외면당하고 있다. 이성적 숙고를 통해서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이성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는 여지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지식과 진리, 그리고 지혜에 대한 욕구보다 물질적이고 향락적 욕망이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 현존재는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말한 것처럼, “자기 창조의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자기를 스스로 선택하는 실존”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것이 바로 함석헌이 다시 요청되는 까닭이다. 인간 현존재는 결단코 일상인(das Man)으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이 자기 자신과 세계에 대한 혁명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근본 기분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고루하다는 편견을 불식시키고 자기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수행적 언어들이 넘쳐난다.   함석헌의 저서를 읽으라는 주문은 한가한 잡담으로 접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할 준비를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민중의 의식을 깨우는 함석헌의 언어, 그리고 언어적 행위들은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자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고 회의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그의 발언적 진리를 인식하기에 앞서, 민중은 지금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민중이 전체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민중이 아니라 그것은 노예요 종이다. 현재 우리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자본과 체제, 이데올로기와 상품의 노예는 있을지언정 순수 의식, 순수 정신을 품은 민중을 만나보기란 매우 어렵다.   ▲ 우리는 정신의 진보가 아닌 물질적, 과학 기술적 진보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보다 그것을 누리려는 욕망이 커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30년 전 함석헌은, “사람은 감응(感應)하는 물건이다. 감응이란 곧 다른 것 아니요, 하나로 된 바탈[보편성, 통일성]이다. 사람이 전체와 내가 하나인 것을 느낄 때처럼, 전체가 이 나를 향해 부르는 것을 느낄 때처럼, 흥분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감응하면서 흥분하는 현존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전체를 지각하고 깨닫는 사람이 부족하다. 게다가 흥분이란 대상에 의해서 감각된 인간의 감정이 촉발되는 것일 텐데, 이성적인 것과 반대되는 부정적 태도와 반응인가. 아니다. 흥분은 민중이 살아 있다는 인식과 기분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한 인간의 근본 기분은 지루함이나 권태, 불안만 있는 것은 아니다. 흥분이야말로 민중이 혁명할 수 있는 근본 기분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상상으로는 혁명 기분은 아니 나온다... 혁명은 혁명으로만 나온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이미지(image)는 감정과 인식을 속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의 작용 없이 상상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상상(Einbildung)은 대상을 현시함이 없이 상(Bild)을 떠올리거나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상을 그리는 것만으로 혁명할 수 없다. 자칫 상상이 지나치면 망상이나 공상이 되기에 십상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분,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흥분은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작용 때문에 이루어지는 감정이어야만 한다.   혁명은 전체에 대한 인식과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혁명이 무슨 치기 어린 감정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상과 현상에 대한 정확한 직관과 판단은 사태에 대해서 저항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획득한다. 지금 민중이 혁명의 근본 기분인 흥분이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흥분의 물꼬가 엉뚱한 방향으로 트인다. 흥분의 의지, 흥분의 에너지가 매스미디어, 스포츠, 쇼핑 등으로 발현되고 있다.   민중의 흥분에의 의지는 전체, 즉 체제, 제도, 조직, 이데올로기, 자본 등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민중의 흥분 의지는 조작되고 통제당하면서 그 흥분이라는 근본 기분마저도 박탈당하고 있다. 혁명에의 근본 기분이 흥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근본 기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촉발되고 있지 못하니 혁명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민중이 혁명하려면 혁명 기분을 새롭게 일구어야 한다. 혁명 기분이 인간 현존재의 변화와 세계의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 『생태영성의 이해』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5-04-27
  • 고난주간 맞아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한국교회
       진도 팽목항 찾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 위로, 장기기증 서약, 소외된 이웃 돌아보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다음 3일 만에 부활한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은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념일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의 모습으로 낮아져 인간의 몸이 되어 이 땅에 온 것은 지극한 사랑의 절정이다.   여기에 더하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바울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6~8)고 하였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핵심적이고 변치 않는 증거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 전 한 주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되새기는 기간으로 보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기간에 ‘최후의 만찬’도 행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한 것은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 남양주 큰빛교회에서는 지난 29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임준식 목사(목양교회)를 강사로 초청하여 성막에 대해 배우는 가운데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고 여겨지며 하나님의 평화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는 절정이 부활이다. 부활을 소망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는 이 주간에 기독교단체와 교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여기에 동참하며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는 3일(금)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기도회를 할 예정이다. 교회들은 장기기증 서약, 환경정화, 소외된 이웃 돌아보기 등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고 기뻐할 일들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의 의미를 깊이 되새기고 있다.   남양주 큰빛교회에서는 지난 29일부터 다음 달 1일까지 임준식 목사(목양교회)를 강사로 초청하여 성막에 대해 배우는 가운데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활절을 맞이하려는 이런 움직임은 매우 귀한 것이다. 이런 일들을 꼭 고난주간에만 국한하여서 하고 멈출 것이 아니라, 지속하여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받고 부활한 것은 어떤 기간이나 행사를 위한 일이 아니다. 일회성에서 그치지 않고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태복음 11:29)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남양주 김경북 시민기자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5-03-31
  • 차라리 그대의 마음을 탓하라!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산’이라는 시이다. 산은 자신의 존재를 열어 밝힌다. 산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면서 권태를 모른다. 산이 봉기하여 일어서서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명체를 끌어안고 있는 산은 늘 물음을 제기하고 동시에 답을 제시한다. 산은 그 자리에서 자연의 신비를 품고 있어서 범접하기 어려운 존재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존재론적 해답을 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해답, 그것은 산만이 줄 수 있는 고유성이다. 그러니 탓할 일도 아니다. 시인이 말하듯이 나무랄 일도 아니다. 그 속에서 거주할 세계로 인식하지 않을 바에는 아예 만남조차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산을 향해 조소도 심지어 정복과 지배도 마다치 않는다. 그러나 어디 산이 끄떡이래도 하던가? 산, 즉 자연(physis)은 “모든 본질적 존재자가 그 현존 상태로 나타나고 그 부재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산의 들고 나감은 흔적도 없다. 흔적조차도 없는 산을 향해 조소를 보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의 존재는 늘 그러한 상태로 있음을 모르지 않을 터, 차라리 허허로운 웃음으로 날 마주 대하듯, 산을 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시인이 산을 의심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의심이란 이미 존재 안에 가정된 확신과 뒤섞인 신념이 내재하여 있기 때문에 드는 이성의 자기 경계요, 비판이다. 산을 의심한 것은 산의 존재를 인간실존 본질의 현존과 기댐이라는 감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산의 존재를 의심해도, 산은 산으로서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보아도 볼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의심은 오히려 사태에 붙잡혀 있고, 몰두해 있는 것이다. 산에 붙들린 상태, 그것이 곧 시인의 의심이다.   자신의 자기보다 상대적으로 큰 산의 존재는 이성과 감성을 압도하고 실존을 파괴하려는 듯이 서 있다. 산에 대한 감정과 기분이 지속할수록, 산은 더는 ‘그것’(It)이 아니라 너, 당신, 그대(Thou)로 다가온다. 산 앞에서, 산 옆에서, 산 뒤에서, 산 안에서, 산 위에서 우리는 지루할 틈도 없다.   그대를 만나는 것이기에 예의와 설렘, 회귀와 귀속의 본능으로 다가선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이제 닮고 싶은 마음과 표정이 된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나의 몸, 특히 나의 눈은 그대, 곧 산에 내맡기며 산에 의해서 포섭된 눈길로 나를 보고 산 그 자체와 하나가 되려고 한다. 산은 도구와 수단이 되지 않고 내가 가진 호기심은 산의 호기심이 되어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5-01-29
  • 영혼이 숨 쉬는 사람책이 되라
    각자에게 따로따로 존재하던 참신한 아이디어들의 만남은 새로운 꿈과 더욱더 아름다운 세상을 잉태한다.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삶에서 벗어나 기뻐서 신명나게 움직이는 환경을 만들자. 민들레 홀씨가 터지면 바람을 타고 번져나간다. 이것은 엄청난 증가를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이다. 내 속에만 잠재했던 생각이 사람들의 변화를 일깨우기 시작하면, 그것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연쇄적으로 반응하며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사람이 동식물과 다른 것은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식물은 감각적 능력에 따라 반응하거나 행동한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개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것은 학문이나 경험으로 배우고 익혀서 아는 것 이전의 문제이다. 선천적,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상황을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성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창조 본래적 목적에 부합하는 순수함을 회복하고 발현해야 선(善)한 것이다. 진달래가 개나리가 될 수는 없다. 진달래는 분홍색 꽃을 피워야 하고, 개나리는 노란 꽃을 피워 봄이라는 계절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것이 아니다. 다양하고 자유롭지만 조화롭다. 인간의 삶도 이런 진리에 따라야 행복하고 향기로운 아름다움을 발하게 된다.   자신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존재하는 주변에 유익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만남과 소통을 통해 아름답고 빛나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식물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가루의 수정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꽃을 피우지만,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향기를 풍기며 봄의 약동을 촉진한다. 벌과 나비는 부지런히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모은다. 이 과정에서 꽃가루의 수정을 돕게 된다. 서로서로 상대의 성공을 돕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 리듬을 타면 생육과 번성이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들은 그 무엇에도 억지나 부당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 가식과 가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창조 본래적 메커니즘이다. 인공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천연을 갈구한다. 자연미에 환호한다. 이렇다 보니 생화보다 더 생화 같은 조화(造花)가 나타난다. 똑같은 화분에 심겨 있어도 분명한 차이는 생명의 유무이다. 생명이 없이는 세대를 이어가며 놀라운 확산을 만들 수도 없고, 향기를 발하지도 못한다. 그저 그렇게 아무런 감각도 없이 멈추어 있을 뿐이다.   조화(造花)와 같은 삶을 원하는가. 아니면 살아 숨 쉬며 꽃을 피워 향기를 발하는 생화가 되고 싶은가.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는 어리석은 질문일 것이다. 주변에 어떤 유익도 제공하지 않고 아무 변화도 없이, 나만의 유지를 위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면서 함께 번성하는 삶을 살겠는가. 정상적인 사고를 한다면, 나누고 공유하며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용기가 없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전제한 것과 같이 식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음에 있어, 어떤 억지나 부당함도 발생하지 않는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도 이와 같다. 인위적인 가공이나 화려한 기술이 번뜩이는 글쓰기도 요구하지 않는다. 애써 집필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출판 비용을 감당해야 할 필요도 없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면 충분하다.   어느 여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 주시는 음식은 아주 맛있고 탁월하다. 그런데 언젠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면,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너무 안타깝다. 이 재료 배합과 조리법이 많은 사람에게 전수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좋은 방법을 찾고자 고민하게 되었다. 책을 집필하거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의 감정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듯이 이것만으로는 생생하게 전수하기가 어렵다. 어느 날 사람책(Human Wisdom Book)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당장 할머니의 요리에 관한 사람책(Human Wisdom Book)을 한 권 만들어 드렸다. 이제 계속해서 시리즈로 만들어 드리려고 한다. 나도 노트 정리법, 학습 계획과 실천이라는 두 권의 사람책(Human Wisdom Book)을 만들었다.”   자연을 보라. 크고 화려한 꽃만 있지도 않고,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소박한 모양의 꽃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생명의 조화이고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의 모습이 가장 복되고 진실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사람책(Human Wisdom Book) 출간의 용기가 생긴다.   세상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유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茅盾)이기 때문이다. 모순이라는 말은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초나라의 어떤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자신이 파는 창은 어떤 방패라도 다 뚫을 수 있고, 자신이 파는 방패는 어떤 창도 막아낼 수 있다며 호객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이 파는 창과 방패로 서로 찌르고 막는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굳이 모순에 관한 고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누구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재와 존재에 대한 폄하는 모순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이웃과 사회를 향해 힘차게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명분이 분명해졌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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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술정보
    2015-01-13
  • ‘갑’의 횡포는 우리 모두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급속한 외적 성장에 비례하여 내적 성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불리는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문제가 한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떠들썩한 사건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성숙하지 못한 문제점들도 드러나고 있다. 급속한 외적 성장에 비례하여 내적 성장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탓이다.   등산에서 과정과 관계없이 정상에 오른 것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등정주의(登頂主義)라고 한다. 결과만 좋게 보이면 옳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등정주의를 선택한다. 반면 과정이 바르고 옳아야 결과도 아름답다고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선택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등정주의를 우선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이야기가 시민들의 탄식으로 흘러나오는 것은 이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폐수를 불법적으로 방류해 하천을 시커멓게 오염시킨 것은 예사였고, 부정부패, 권위주의, 잘못된 관행이 횡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이런 일들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선거에서도 불법적인 행위는 당선 후에도 처벌받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고귀한 신분에 맞는 도덕적 책무)의 정신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 대한민국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갑’의 횡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며 사회적 약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어 보지 못했으니, 어찌 동병상련(同病相憐)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갑’의 횡포가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교육에서 이론과 함께 체험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공감능력이 곧 리더십이다. 공감능력이 없다면 많은 학력과 뛰어난 기술력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러니 머지않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갑’의 횡포와 관련된 여러 사건을 바라보며 느끼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긍휼의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저지른 행위들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생각할 수만 있다면, 극단적인 행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며 배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서로에 대한 공감과 ‘너’와 더불어 ‘나’의 마음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라는 공동체 정신을 형성하며 함께 잘살고 행복할 길을 찾게 한다. 이제 우리는 남의 탓이나 핑계만 대지 말고, ‘나부터’라는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먹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마음과 실천이 더욱더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토대가 아니겠는가.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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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15
  • 훌륭한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한 자녀교육 성공비결 10가지
      1. 자녀를 사랑으로 품어주라.   사람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사랑이다. 자녀의 출산도 사랑의 결실로 얻어지게 한 것이 창조 섭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하려면 사랑을 공급받아야 한다. 사람은 사랑으로 감싸줄 때 제대로 자랄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성장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환경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기심의 공급과는 다른 것이다. 사랑 가운데 자란다는 것은 자신과 부모·형제는 물론 모두를 사랑할 힘을 기르는 것이다.   2. 자녀에게 좋은 인성의 씨앗을 심고 길러주라.  성품에 지식과 윤리성이 스며들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기본적인 사고와 세계관이 형성된다. 여기에 따라 삶의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자녀에게 좋은 인성의 씨앗을 심고 길러주는 것은 가장 우선해야 할 교육이다.   3. 자녀가 꿈과 자아존중감을 기르고 꽃피게 하라.  꿈이 없다면, 삶의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꿈은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를 찾고 드러내게 하는 첫출발이 꿈에서 비롯된다. 꿈을 욕심에 따른 목표 설정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꿈을 장래희망과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진정한 꿈은 자신의 삶의 근본을 찾는 것이고 그것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냄으로써 모두와 조화롭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런 꿈을 가진 사람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갈등하거나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다. 세상에 태어난 모두는 각자 자신만의 목적과 아름다움이 있고, 그것이 모두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귀천이 없는 것이고 각자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적 가치로 빛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다. 반면에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사람의 존재적 가치를 모르는 가장 무식하고 저질인 사람이다.   4. 자녀에게 성실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라.  성실한 사람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땀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쉽게 얻으려는 데에서 범죄가 싹트는 것이다. 성실하다는 것은 때를 아는 것이다. 식물이 싹터야 할 때, 꽃피워야 할 때를 놓치지 않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 모두가 유익하게 하는 것이 성실이다.    이처럼 자신이 잘되고 아름다운 것이 모두의 유익과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실하게 잘사는 것은 이기심으로 자신만 배불리 먹고 나눌 줄 모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모두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 자신의 역할에 소홀함이 없는 삶이 성실한 것이다.   5. 자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라.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며 갖는 지식은 독사의 독과 같아서 모두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없다면 그의 삶은 독약과 다를 것이 없다. 사랑은 사람이 아름답게 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도 통한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다. 공감의 마음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야 사람의 삶으로서의 진정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 신풍제지 부설 창강재단에서는 매년 인성이 바르고 성적이 우수한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6. 자녀가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인도하라.   이탈리아 파르마(Parma)대학교의 신경심리학자인 지아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ti)와 그의 연구팀은 일명 공감뉴런이라고 하는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기만 해도 자신의 신경세포가 자신도 마치 그 행동을 하는 것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다른 사람의 감정에 똑같이 반응하는 이 현상에 대해 ‘거울신경세포(mirror neuron)’라 이름을 붙였다. 없던 것이 생긴 것이 아니다. 이미 존재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사람은 함께 울고 웃으며 공감하는 가운데 삶의 의미를 느끼며 새로운 희망을 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기도 하고, 행복도 느끼게 된다. 이런 공감능력과 그 사람의 행복은 비례하는 것이다.   7. 자녀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인도하라.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것은 심각한 인격적 장애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물론,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인생을 이기심의 늪에 빠져서 허비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적 가치와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다움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즐겁고 보람찬 인생을 누리게 된다.   8. 자녀가 나눔을 일상화하도록 인도하라.  나눔은 지구촌 최대의 공용어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나눔이 없다면 사람의 삶에서 사회는 무의미하고 소통과 교감도 필요하지 않게 된다. 나누며 사는 것이 생명력의 발현이다. 공기를 공유하고 사는 것처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사람됨을 실현하는 일이다. 나눔은 모두를 하나 되게 연결하는 아름답고 신비한 접착제이다.   9. 자녀가 모든 학습에서 원리와 개념을 깨우치고 실천하게 인도하라.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암기 실력이 우수하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배우는 것에 대해 배우는 이유를 물어야 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것이 분명해지면 학습에 흥미가 생기고 작은 부분까지도 세세하게 알게 된다.   이런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며 확산하는 역할도 감당하는 힘이 된다. 이런 사람이 탁월한 삶을 사는 것이고, 지도자이다. 성적의 향상은 학원과 과외, 학습시간의 확대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됨의 가치를 깨우치는 것으로부터 모든 것의 원리와 개념을 깨우치고 그에 합당한 실천을 하는 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10. 자녀가 ‘너’와 더불어 ‘나’라는 ‘우리’를 인식하고 공동체와 조화롭게 살아가게 인도하라.   인간은 공동체를 통해서 존재적 가치를 발현하고 자신을 보호하고 기쁨과 보람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자신만의 유익을 좆아 살아간다면 그는 서서히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함께 살면서 함께 살지 못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망가트리는 암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법과 제도는 고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웃과 공동체는 나의 혈액과 몸의 모든 기관이며 조직과도 같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평화를 만들며, 더욱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귀하게 쓰일 것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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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05
  • ‘맘’ 자락 어딘가에 영혼이 멈춰서면
      마음은 하늘의 숨을 머금은 듯 그 청아함과 숭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마음은 자연을 닮은 순수 형상일까? 함석헌의 시어가 가리키는 마음은 자연 본성이다. 반복적인 운율을 따라 자연의 시어들을 구사하는 작가의 무의식은 강박적으로 자연을 지향한다. 마지막 연의 “차라리”라는 어투가 갖는 함의는 본성을 아예 탄생의 본래적 순수성으로 가져간다. 그런데 왜 그는 ‘마음’을 ‘맘’이라 했을까? 그것은 단순 축약어가 아닌 말의 아낌이고, 마음을 다 드러내지 않으려는 작가의 감성적 과잉의 절제나 다름이 없다.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 자연을 닮은 순수함이 달아나기라도 할 듯이 꼭꼭 감추어둔 ‘맘’은 살포시 그 언저리만 내보인다.   ▲ 자연이 마음의 외면이라면, 마음은 자연을 닮은 순수한 내면이다.     <맘>   맘은 꽃 골짜기 피는 난 썩어진 흙을 먹고 자라 맑은 향을 토해   맘은 시내 흐느적이는 바람에 부서지는 냇물 환란이 흔들면 흔들수록 웃음으로 노래해   맘은 구름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한 때 한 곳 못 쉬건만 늘 평온한 자유를 얻어   맘은 봉 구름으로 눈물 닦는 빼어난 바위 늘 이기건만 늘 부족한 듯 언제나 애타는 얼굴을 해   맘은 호수 고요한 산 속에 잠자는 가슴 새벽 안개 보드라운 속에 헤아릴 수 없는 환상을 건너   맘은 별 은하 건너 반짝이는 빛 한없이 먼 얼굴을 하면서 또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어   맘은 바람 오고감 볼 수 없는 하늘 숨 닿는 대로 만물을 붙잡아 억만 가락 청의 소리를 내   맘은 씨알 꽃이 떨어져 여무는 씨의 여무진 알 모든 자람의 끝이면서 또 온갖 병상의 어머니   맘은 차라리 처녀 수줍으면서 당돌하면서 죽도록 지키면서 아낌없이 바치자면서 누구를 기다려 행복 속에 눈물을 지어   마음은 가만히 있어도 묻어나는 향기와 같아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방으로 퍼지며, 또한 소리처럼 온갖 울림으로 타인에게 말을 건넨다. 마음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얼굴이 되기를 원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은 고요한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지만, 한 줄기 빛으로 자신의 자리를 드러내준다.   마음은 하늘의 숨을 머금은 듯 그 청아함과 숭고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게 될 때 마음은 하나의 잉태 가능성을 내포한 씨-알이 되어 모든 것들을 살려내는 힘이 될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희생을 간직한 내적 깊이요, 타자에게 마음의 행복을 주려는 자기 수줍음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음은 환상이라기보다 “차라리” 진실이자 사실이고 싶은 게다. 그래야 마음은 숨은 듯 숨지 않은 듯 자기의 본래성을 외면하지 않고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들여다보지 않고도 어딘가에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갖게 되는 신념은 신앙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순수에 대한 열정은 거기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마음은 적어도 오염되거나 탁해져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인간학이 작가의 시선과 더불어 보편적인 인간의 마음을 이상화한다.   마음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언제든 드러나니 자연과 닮아 있다. 자연이 마음의 외면이라면, 마음은 자연을 닮은 순수한 내면이다. 마음을 형상화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닮은 사람이 가진 마음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라야 읽을 수도 있고 향기를 맡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함석헌이 그린 마음 시어가 오늘 우리 가슴에도 ‘꽃, 시내, 구름, 봉, 호수, 별, 바람, 씨앗’으로 그려져 맑은 향을 묻어내고, 웃음으로 노래하며, 한없이 은근한 속삭임을 주기도 하는 어머니가 되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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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12
  • 사람책도서관과 지식 나눔
      지식 나눔의 문화가 왕성하게 작동해야 지식경영이 성공할 수 있다.   인류의 발전과 문명 창출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지식을 원동력으로 한다. 도구를 만들고 농사를 지으며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도 지식의 공유와 전수를 통해서 가능했다.   현대 경영학에서도 이것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것은 소실의 우려가 크고 전수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지식을 모으고 융·복합함으로써 효율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추어 나가는 경영방식이 지식경영(Knowledge Management)이다.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일하는 방법의 개선과 새로운 개발을 통해 기존의 틀을 바꾸는 혁신을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것이 지식경영이라고 했다. 특히 정보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지식의 활발한 창출과 공유를 제도화해야 한다. 지식의 창출과 공유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기업과 조직에는 물론, 인류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한다.   ▲ 사람책도서관은 우리의 생활문화를 건강하게 바꾸어 놓을 신선한 패러다임이다.      이런저런 여러 논의가 있을 수 있겠으나 나눔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진척이 될 수 없다. 지식 나눔의 문화가 왕성하게 작동해야 지식경영이 성공할 수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도 지식 나눔을 활성화하지 못해 지식경영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래서 승진, 보너스, 시상 등의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활성화에 안간힘을 쓴다.   기업이나 조직은 물론, 사회와 국가 또한 지식경영을 활성화해야 한다.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어떻게 달 것인가이다. 21세기를 아름답고 풍요하게 할 경쟁력의 원천은 지식의 공유와 컨실리언스(consilience·융복합)라고들 이야기한다. 이에 대한 솔루션으로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람책도서관은 조금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유행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생활문화를 건강하게 바꾸어 놓을 강력한 패러다임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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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4
  • 언어는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정점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삶을 영위한다.   언어는 인간에게 있어 타인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요한 수단이다. 타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와 사회는 서로를 함의하는 말이다. 일상은 물론, 학문, 예술, 종교까지도 언어에 의해 파생되거나 규정되기도 한다. 이것은 본래적 자아가 언어에 의해 얼마나 변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만큼 본질적 자아로의 회복이 중요하다. 아울러 이에 따른 현실화를 위해서도 언어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벵베니스트(Emile Benveniste)는 자아는 언어 행위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아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 본래적 주체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 본래적인 순수한 ‘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가치혁신의 최우선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에 관한 대화(A dialogue on Language)》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어라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언어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삶을 영위한다. 언어와 사물이 만남을 이루면 존재는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에게 만족과 기쁨을 제공한다. 언어라는 것은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정점이다.   대화는 인간의 마음에 파종하는 농작물이며 삶을 밝혀주는 빛이다. 대화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나아가게 하는 가장 시원한 길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대화이다. 언어는 우리가 타인에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 대화는 인간의 마음에 파종하는 농작물이며 삶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언어가 그 사회와 역사를 드러내고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언어를 올바로 사용할 때만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아름다운 생명력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만 잘하면 심각한 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혀 밑에 도끼 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만큼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중요한 것이다. 언어에 관한 올바름이라는 것도 모호한 말이다.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인간의 창조 본래적 순수함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드러내고 유지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아름답고 올바른 것이다.   인생의 가치혁신을 위해서 언어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의 활동에서도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가 있겠으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수단은 말이다. 성경의 야고보서에도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3:2)는 언급이 나온다.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말을 생성하고 실천하는 것은 본질적 자아를 회복하는 것 다음으로 매우 중요하다.   창조 본래적 ‘나’에 대한 회복과 그 실현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자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벗어 버려야 할 요소이다. 창조 본래적 ‘나’는 모든 세계와의 조화에 최적이며 필수적인 존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풍요가 된다. 상생을 만들고 조화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이렇게 인생의 가치혁신을 아름답게 일궈내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주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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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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