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한국사상
Home >  한국사상  >  종합정보

실시간뉴스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 한국교육
    • 종합정보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 한국뉴스
    • 교육
    2021-05-17

실시간 종합정보 기사

  • 혁명적 인간, 혁명하는 인간
    “이제 혁명은 개인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을다시-만드는 일(재-형성, re-form)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 모름지기 혁명은 씨알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결단코 혁명이 아니다. 혁명(革命). 혁명(reformation)은 그릇[형식]을 바꿔서 통째로 내용물[질료]까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던가. 그래서 함석헌은 “달라지되 어느 한 부분만 아니라 전체를 왼통 뜯어 고치는 일”, “새 출발을 하는 일”(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5쪽)이라고 말한다. 혁명은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고쳐야 한다는 말인데, 과거의 혁명은 완전한 혁명이 되지 못하고 늘 불완전한 혁명으로 그치고 말았다. 특히 한국현대사의 비극인 5․16을 혁명이라고 하나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 군사 쿠데타였다. 씨알에 의해서 밑에서부터 일어난 혁명이 아니라, 무력을 앞세운 힘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 사건으로 무엇이 달라졌단 말인가? 그것을 과연 새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5.16군사정변이 ‘새로움’, ‘새’라는 수식어를 달 수 없는 것은 그로 인해 새워진 정권이 곧 군사정권, 군사독재라는 결과물을 낳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 군인이 국가 수장의 탈을 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모름지기 혁명은 씨알로부터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하늘로부터 명(命)을 받아서, 하늘로부터 말씀을 받아서(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5쪽)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결단코 혁명이 아니다. 그것이 5․16 군사정변을 혁명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이다. 씨알이 주인이 되는 시기, 씨알의 의식이 깨이는 시기, 씨알의 정신이 자주성을 갖는 시기, 씨알이 생각을 펼치는 시기가 퇴보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4․19혁명의 불완전성 때문에 빚어진 현상도 없지 않을 것이긴 하다. 5․16군사정변의 폐해가 인간의 정신이 깨이고 자신이 역사의 주인이 됨으로써 씨알이 역사철학을 형성하는 시기를 늦추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6-27쪽). 그래서 함석헌은 비판한다. “민중이 일어서야겠는데, 일어서지 않기 때문에 군인이 일어선 것이다... 일어설 것은 군인이 아니요, 민중이다... 사람이 아니란다고 감정을 내는 학생이나 군인은 참 사람은 못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61, 66쪽)반면에 5․18민주화운동은 어떤가? 그 사건은 하늘로부터, 씨알로부터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함석헌이 말했듯이, “생명의 길은 언제나 모험의 길”(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27쪽)이다. 혁명에는 바로 생명의 길로 접어드는 필연적인 과정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과 고통,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라면 섣부른 판단일까.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고 정치권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의 군사독재, 언론통제, 민주정치 인사의 투옥, 계엄령, 휴교령 등에 맞선 그 당시 저항운동은 역사의 필연일 수밖에 없었다. 비록 비폭력으로 시작된 시위였다가 무장시민군이 형성되면서 엄청난 희생이 발생한 사건이 되었지만, 그것은 엄연한 ‘시민혁명’-영국의 청교도혁명(1640~60), 미국의 독립혁명(1775~83), 프랑스혁명(1789~94), 독일의 3월 혁명(1848), 러시아의 2월 혁명(1917) 등과는 다르다 하더라도-이었던 셈이다. “민중의 노함은 하나님의 불”(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56쪽)이라는 말처럼, 시민이 주축이 된 혁명, 하늘의 뜻, 하늘의 소리를 씨알 전체에게 주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시민혁명은 국가, 세계, 생명 전체를 살리기 위해서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아(大我)를 택한 사건이다. “혁명의 목적은 공(公)을 살리기 위해 사(私)를 죽이는 데 있습니다.” 프랑스의 혁명정신 속에 살았고 민주주의 투사였던 빅토르 위고는 폭동과 혁명을 구별해 말하면서 “폭동은 물질적 동기로 일어나는 것이고 혁명은 정신적 동기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이 무엇입니까? 공(公)을 위하는 것이 정신입니다. 그런데 공이 무엇입니까? 천하위공(天下爲公)입니다. 세계가 공입니다... 살아도 인류 전체가 같이 살고 죽어도 인류 전체가 같이 죽게 된 것이 오늘의 세계의 현실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30쪽) 이제 혁명은 개인을 넘어서 세계 전체를 살리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을 다시-만드는 일(재-형성, re-form)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인에게서 시작하는 혁명은 한 개인을 넘어서 사회, 국가, 세계로 뻗어 나갈 수가 있다. 개인에게 머무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하늘 뜻을 새롭게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한갓 개오(改悟)에서 멈추고 만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라고 했지 자기에게서 그치라고 하지는 않았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되 목표삼지는 말라는 말이다. 자기를 파악하되 자기에 사로잡히지는 말라는 말이다.”(Martin Buber, 장익 옮김,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 1978, 40쪽) 물론 개인을 새롭게 만들지 못하는 혁명은 공동체를 새롭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 모두가 처해진 상황과 위치를 전혀 알지 못한다.“랍비 하녹이 한 이야기다. 옛날에 아주 멍텅구리가 하나 살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찾아 입기가 너무 어려워, 밤이 되면 이튿날 깨면서 또 고생할 생각이 끔찍해서 잠자리에 들기를 꺼릴 정도였다. 그러다가 하루저녁 큰 노력을 하여 연필과 종이를 갖다 놓고 옷을 한 가지씩 벗는 대로 어디다 놓았는지를 정확히 적어 두었다. 그 이튿날 아침 매우 만족한 그는 종이 조각을 들고 “모자”하고 읽으면 모자가 있어서 머리에 쓸 수 있었고, “바지”하면 바지도 있어서 입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옷을 다 입도록 계속했다. “자, 그건 다 좋았는데 나 자신은 어디 있지”하고 크게 당황하면서 물었다. “내가 도대체 세상 어디에 있는 거지”하면서 두리번거렸으나 자기는 찾지를 못했다. “우리가 바로 그 모양이에요”하고 랍비는 말했다.”(Martin Buber, 장익 옮김, 하씨딤의 가르침에 따른 인간의 길, 분도출판사, 1978, 37-38쪽)그 어느 때보다 지금,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인간, 자기 존재도 모르는 인간을 위한 “인간 개조”, 즉 자기 초월을 하면서 인간 자신을 뜯어 고치는 혁명이 전체로서 일어나야 한다. 그 “혁명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대중운동이 아니면 안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65-66, 74쪽)“이제 혁명은 전체의 협동으로서만 될 수 있습니다. 가령 아주 알기 쉬운 실례를 하나 든다면 핵무기 문제입니다... 개인의 참 발달을 막고 병들게 하는 것은 개인주의와 그것의 변태인 집단주의입니다. 개인의 정말 발달은 전체가 개체 안에 있고 개체가 전체 안에 있는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국가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금 국가가 전체를 가장하고 속이는 그 우상숭배주의 때문에 인간의 물질적․정신적․영적 에너지는 얼마나 쓸데  없이 소모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계의 발달만 아니라... 새 인류가 나타날 가능성까지도 내다보고 있는 이 진화의 시점인데, 그러한 돌변화는 개체의 자유가 절대로 보장이 되는 전체 안에서만, 말을 바꾸어 한다면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에서만 될 수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30-31쪽)세계는 지금 생명의 위기, 환경의 위기, 문명의 위기, 경제의 위기, 정치의 위기, 교육의 위기 등 인간 전체, 세계 전체의 위기에 직면에 있다. 그야말로 위기의 시대다. 이러한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개조, 인간 자체의 혁명인 것이다. 국가의 혁명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세계를 전체로 보고 전체로서의 혁명, 전체로서의 인간 혁명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소진되고 있는 여러 현상들 이면을 짚어내는 ‘생각의 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근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5-23
  • 언어로 맺어진 모자(母子)간의 유대
    언어는 단지 밥벌이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자신의 정체성과 소속한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적 자본이며,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실존처럼이나 중요한 것이다 ▲ 부모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며 선물이다. 부모가 전해 준 언어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고, 문화의 자산인 언어를 후세대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다. “무슨 일이야?” “아무 일도야. 나는 생각했어. 여기 아무 것도 있네.”“조금 전에 먹은 떡볶이 매워서 혼났네.”“엄마, 누구한테 혼났어?” 내 말에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엉터리 같은 대답을 해 주는 아이는 7살을 두 달 앞둔 나의 아들이다. 내 아이는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부모를 둔 탓에 가정에서 한국어와 불어를, 학교에서는 불어, 영어를 사용하고 있다. 나의 아들은 하루에 세 언어의 세상을 넘나들며 사는 것이다. 남들은 말한다. 언어교육을 위한 사교육비는 안 드니 얼마나 좋겠냐고. 하지만 내 아이의 다중언어 습득 과정은 험난하고 먼 여정과도 같다.  다문화가정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다언어 사용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하는 것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임과 동시에 큰 혼란과 두려움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엔 세 언어를 모두 유창하게 하는 아이의 모습도 있고, 반대로 어떤 언어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불행해 하는 아이의 모습도 있다. 이 아이는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왜 세 언어를 해야 하는 부담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기나 할까. 언어교육을 전공하는 나에게 아들의 다중언어 습득은 늘 주된 관심 대상이다. 아이는 태아 때부터 아빠의 불어와 나의 한국어에 노출돼 있었다. 우리는 절대 두 언어를 섞어서 아이에게 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이를 갖기로 계획함과 동시에 우리가 정한 가정의 언어정책이기도 했다. 이런 언어 환경에서 성장한 아이는 이런 상황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내가 장난삼아 어쩌다 불어나 영어로 말을 걸어도 아이는 언제나 한국어로 대답을 해 주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아이의 한국어에 하나 둘 불어나 영어 단어가 섞이기 시작했다. 난 그럴 때마다 한국어로 다시 말해 보라고 하거나, 그것도 어려워하면 내가 만든 한국어 문장을 따라 하게 한다. 어쩌면 난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니면 모자 관계의 끈을 영영 잃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 아이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엄마는 아빠하고 불어로만 말하잖아. 불어 할 줄 알면서 왜 나한테는 한국말로 하라고 해?” 순간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아이의 수준에 맞게 서둘러 둘러 댄 나의 변명 아닌 설명은 “너는 한국인이니까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지”였다. 사실 한국어가 여전히 능숙하지 못한 아이의 아빠와 나의 대화에는 한국어보다 불어가 훨씬 더 자주 개입된다. 아이 앞에서는 되도록 한국어를 사용하려 하지만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는 한국말을 사용했다가도 대화가 종종 단절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어로 바꿔 버리게 된다. 아이는 이런 상황을 이미 눈치 채버렸다. 불어를 말할 줄 아는 엄마의 모습이 자신의 눈에 들어왔고, 불어가 서서히 자신의 제 1언어로 자리를 잡아가는 자신에게도 불어 사용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아이가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을까 늘 고심한다. 한국어로 맺어진 아이와 나의 유대감이 한국어로 인해 잃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모자의 유대감에 위기감을 안겨 준 상황을 실제 짧게나마 경험하기도 했었다. 작년 여름 방학 때, 아이는 아빠와 같이 시댁이 있는 프랑스에 두 달간 머물렀었다. 일 때문에 한국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화상전화를 통해 아이의 안부를 묻고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어가 없는 불어의 세상에서 두 달을 살다 온 아이는 공항에서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쉬운 한국말조차도 말하지 못했다. 그 후 아이가 다시 한국어 사용을 회복하는 데 꼬박 두 주 반이 걸렸다. 이 짧고도 긴 시간동안 나는 복합적인 감정으로 매우 힘들었었다. 오랜만에 가슴에 품은 아이는 모자 관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 동안 한국어 유지를 위해 들였던 나의 공도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아 공허하고, 서글펐다. 난 가끔 나의 모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아이와 대화를 하는 나를 상상해 본다. 아이에게 외국어로 사랑의 감정을 전하고, 훈육을 하며 위급 상황을 전해야 하는 나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낯설고, 불편하다. 외국어로 전달되는 나의 감정과 생각은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나만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난 오늘도 아이 앞에서 명료한 발음과 아이의 수준에 맞춰 적절한 단어를 골라 한국어로 수다를 떤다. 누군가는 말한다. 아이가 세계인으로 성장하는데, 그까짓 한국말 하나쯤 못하면 어떠냐고 말이다. 세계적 위상이 높은 영어와 불어를 할 줄 알면, 어느 나라에 가서도 밥벌이 걱정은 없을 거라고 한다. 이 폭력적 위로는 다문화 가정 자녀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에게는 매우 큰 상처가 되고 만다. 실제 동남아 출신 여성과 한국인 남성이 이룬 다문화 가정에서 엄마들의 모국어는 그들의 가정에서조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엄마의 어설픈 한국어에 노출된 아이들은 결국 엄마의 말도, 아빠의 한국어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은 공식 교육 기관에서도 버젓이 발생하는데 다문화 가정 자녀가 처음 학교에 들어가서 학교의 교육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교사는 학부모에게 아이의 모국어대신 학교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집에서도 사용하라고 충고한다. 결국 세계적 위상이 높은 언어는 배우고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비교적 위상이 낮다고 판단되는 소수 언어는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것일까. 부모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하는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며 선물이다. 부모가 전해 준 언어를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고, 문화의 자산인 언어를 후세대에게도 계속 전달할 수 있다. 언어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 주는 정체성의 표지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어떤 언어도 우세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모든 부모들은 그들의 모국어를 자녀들에게 계승할 권리가 있다. 경제적인 가치만이 부각되는 가정과 학교 내의 언어 교육은 하나의 개인을 주체가 아닌 물질로 환원시킬 뿐이다. 모든 유기체가 공존할 때 건강한 생태계가 유지되는 것처럼 다양한 언어의 공존은 건강한 언어 생태계를 유지시킬 것이다. 언어는 단지 밥벌이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과 소속한 공동체 내에서의 유대감을 확인시켜 주는 문화적 자본이며, 삶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하고 사고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의 실존처럼이나 중요한 것이다. 박성원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5-15
  • 대학에서 방황하는 외국인 유학생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화로운 공생을 위한 다문화 사회, 모두가 복된 지구촌 시대, 더불어 잘하는 인류사회의 건설과 같은 요란한 구호가 진실도 사랑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는 아닌지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에서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에 대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식과 태도가 성찰 없이 지속된다면, 성숙한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요즘 국내 대학에서 다인종, 다국적의 학생들이 캠퍼스를 활보하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아시아 학생, 특히 중국인 학생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어 교사로 이러한 외국학생들이 국내 대학에 입학하도록 돕는 일을 해 왔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한국어 능력 중급 이상을 자격 요건으로 내세우는 대학의 요구에 맞춰 국내 대학의 입학 허가를 받는다. 가끔은 한국 신입생들도 받기 어려운 높은 비율의 장학금을 받으면서 말이다. 내가 가졌던 한국어 교사라는 직업의식 때문인지, 난 대학 내에서도 그들의 생활이나 교실 참여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그들의 대학생활은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들 중 열에 아홉은 대개 한국인이 아닌 자국 친구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고, 강의 시간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는다. 외국에서 짧은 교환학생 생활을 해 본 나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2언어로서의 한국어 학습자를 넘어 학문 공동체 내에서 한국 학생들과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 학생들이기에 이런 상황은 안타깝고 애처롭다. 특히 한국인들의 머릿속에 잔재하는 이중적 외국인 수용 잣대가 적용되는 것을 보면 이런 상황은 더욱더 안타깝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과에서 유독 한 명의 중국 유학생이 눈엣가시처럼 한국학생들에게서 소외되고 있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런 그 친구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시간을 내 그의 어려움을 들어보았다. 예상대로 그의 유학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 고통은 계속 진행 중이다.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저에게 수업을 알아듣지 못할 거면 당장 어학당으로 가서 한국말을 더 공부하고 오라 하셨어요. 그런데 저는 입학 면접시험에서 일등을 했고, 대학에서도 어학당 수업을 더 이상 들을 필요 없이 학부 입학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어느 날 교수님은 전체 학생들 앞에서 중국 학생들이 집안은 좋은 데, 머리가 나빠서 한국에 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나중에 대학원 입학 지원에 대한 추천서가 필요할 때, 중국인 학생들에게는 절대 써 주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저는 매우 큰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데 다른 과 교수님들도 중국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나는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가 멍해짐을 느꼈다. 한국인으로서 이 상황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리며 이해를 시켜야 할지도 매우 난감했고, 이 학생의 쓰라린 심정이 사뭇 이해가 되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것이 비록 소수 교수자들의 오만한 우월의식과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미성숙하고 폭력적인 교육자의 발언이 한국학생들의 의식에도 통째로 뿌리를 내리게 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 중국인 학생은 한국학생들 또한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제가 길을 지나가면 중국인은 더럽다고 제가 들을 수 있게 욕을 했어요. 이 상황은 제가 졸업을 할 때까지 2년 동안 계속 됐어요. 한국어가 아닌 영어 수업에서도 무시를 당했는데 영어 발음이 좋은 편인 저를 기분 나쁜 표정으로 쳐다봤어요.” 이 학생은 한국어를 못해도, 영어를 잘해도 학문 공동체 내에서 가차 없이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이 학생이 중국이 아닌 서양에서 온 백인 영어 원어민 유학생이었어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을까. 나는 이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문화 사회를 위한 우리의 시민의식 수준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 인류의 평화로운 공생과 이득을 지향하며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해야 하는 학문 공동체인 대학에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인종 차별주의적인 교육자의 발언과 태도, 이런 위험천만한 교육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학생들에게 답습되는 국내 대학에서 외국인 유학생들, 특히 아시아 출신 유학생들은 방황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국인 학생의 한국어가 향상된 것은 자기 말을 관심 있게 들어 주었던 또 다른 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매우 다양한 손님들을 만났다고 한다. 거기에서는 어떤 누구도 자신의 불완전한 한국어를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 그 사람들과 나눴던 이야기가 지금 자신의 한국어를 향상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이 학생은 정작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싶었던 대학에서는 무시를 당했다. 그러나 대학 밖의 실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이 아닌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한국어 실력을 향상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학생은 한국어와 학문적 동기가 없거나 열정이 부족한 소극적인 학습자가 아니었다. 한국인들의 냉정한 반응과 차별적 태도는 한국어와 한국문화, 나아가 학문에 대한 동기와 열정마저도 식게 할 수 있다. 대학에서 요구하는 한국어 능력 시험을 통과해 입학을 했으나 대학 내에서 합법적인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당혹스럽다. 부당한 이유로 소외되고 방황해야 하는 이런 유학생들의 시련은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우리의 다문화 사회의 일면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유치하기 위해서만 애쓰는 대학은 이들을 위해 과연 어떤 관심을 갖고, 지원해주고 있는가. 외형적인 지원 정책보다, 그들이 실제 대학에서 어떤 생활을 하며 어떤 고충을 겪고 있는지 그들의 목소리에 한번쯤 귀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 반성해 볼 때이다.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선도하는 대학에서의 모습이 이래서는 안 된다.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에 대한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인식과 태도가 성찰 없이 지속된다면, 성숙한 다문화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들의 불완전한 한국어가 그들의 지적 능력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충분한 잠재능력을 가진 유학생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들에 대한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우리와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존중 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도 학문 공동체뿐만 아니라, 인류사회를 더 풍요롭게 할 자질과 가능성이 누구 못지않음을 인식해야 한다.요즘 일본 우익세력의 무모한 행태를 보면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다. 상식과 진리는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평화로운 공생을 위한 다문화 사회, 모두가 복된 지구촌 시대, 더불어 잘하는 인류사회의 건설과 같은 요란한 구호가 진실도 사랑도 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꽹과리 소리는 아닌지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이 구호만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가뜩이나 유학생활로 힘들고 외로운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고 배려해야 한다.  박성원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5-08
  • 의식의 사물화와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
    의식 바깥의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온전한 인간 존재, 이성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인정 없이 어찌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없는 인간은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 봐야 한다 ▲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의식 안에 들어 온 세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다. 사물의 본성을 띤 의식은 타자의 언어와 정보에 의해 지배당한다. 사물은 지배할 수 없고 지배당하고, 지배자의 처분에 맡겨지듯이 자신을 자신인 채로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스스로, 자처해서 의식을 사물화하고 있다. 의식을 사물화 한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무엇일까? 의식은 사물과는 별개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지각한다. 사물은 인간에게 있어서 도구적이고 물질적이다. 사물의 사물성을 논한다 하더라도 사물 안에 의식이 내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생각․판단․지각하는 주체적인 이성의 기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 바깥에 있는 사물은 분명히 의식과의 연관성에서 전혀 주체적이라 말할 수 없는 의식과 떨어져-있음이라는 존재론적 지평에만 속해 있다.그렇다면 ‘의식의 사물화’는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식이 더 이상 사유하는 역할을 포기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의식은 이제 물건이나 도구에 지나지 않는 임의적, 수동적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아가 의식은 정지된 채 있음을 의미한다. 사유하지 않는 1차원적 인간, 그러면서 동일하게 사물 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인간은 의식의 작용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 여기서 자기는 의식이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사유를 통해 의식 안에 들어 온 세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할 수 없다. 사물의 본성을 띤 의식은 타자의 언어와 정보에 의해 지배당한다. 사물은 지배할 수 없고 지배당하고, 지배자의 처분에 맡겨지듯이 자신을 자신인 채로 소유할 수 없다. 자신의 비존재적 실존의 상태에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은 타자를 자신으로서 확인하지만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 연유로 의식이 사물화 되어 버린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사물이 된 것도 모르면서 잡담(한담/객설)을 하며 살아간다.우리가 무심결에 바라보는 사물, 대상, 사건, 심지어 사람조차도 사물화 된 형태로서의 의식으로 바라본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 교육 등은 우리 자신의 의식을 사물화 하도록 강제한다. 엉겁결에 담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존재자가 시간의 무한한 퇴락으로 빠져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무심코’, 즉 자신 스스로가 의식의 사물화가 된 것을 모르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인식은 책임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면 인식조차도 이성의 결여나 다름이 없다. 의식의 결여된 상태는 의식의 사물화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렇듯 의식의 사물화와 의식의 결여는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그것은 타자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항상 무엇을 향한 의식으로서 바깥 실재에 대한 배려와 관심 없이는 의식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이는 “내용 없는 사상들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들은 맹목적이다.”(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KrV., B75)라는 칸트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의식 바깥의 대상에 대한 배려가 없이는 온전한 인간 존재, 이성적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타자의 인정 없이 어찌 어떻게 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인정과 배려가 없는 인간은 의식이 결여된 존재로 봐야 한다. 게다가 자신의 의식조차 대상화, 물질화시켜서 비생명적인 사물성으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 국가와 사회 곳곳에서 평균 인간, 평균 문화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의식이 사물화되고 심지어 의식이 결여됨으로써 인간 현존재는 하나의 사물처럼 규격화, 수량화, 수치화되고 만다. 현존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모두 동일화되고 그에 따른 인간의 문화 또한 획일화된 채 또 하나의 계급 구조와 권력을 갖게 된다. 평균 인간, 즉 평균적인 현존재는 막연한 불안과 현대 기계 문명(현대 물질문명)에 대한 공포로 자신의 의식을 사물적인 것에 의존하고 거기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 순간 현존재의 의식 작용은 주체적인 자의식의 활동과 판단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타율, 타자적 의식에 동조하고 그에 의해서 조작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재는 자신의 의식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사물적인 것에 저항하기보다는 사물적인 것이 갖고 있는 사물성에 끌려가고 만다. 현존재의 의식과 의지, 삶의 주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오로지 한담(閑談)거리, 공담(空談, leeres Geschwätz)거리의 삶만을 끌어안고 무게가 있는 삶의 진지함과 진정성에는 눈을 가린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물적인 것과 사물성을 비판하기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사물이 되어가고 있는 현존재의 의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있어야 한다. 더불어 그 의식을 사물화시키는 사물적인 것의 구조와 사물적인 것을 포함하는 세계 일반에 대한 엄밀한 반성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의식은 여전히 의식이 아니게 되며, 삶은 가벼운 일상의 차원으로 전추하여 거슬러-나아가지-못하는 의식-없음, 이성-없음이라는 현존재 그 자신의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삶이 가벼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삶과 연관된 모든 사건과 현상에 대해서 한낱 빈-이야기[공담]로 일관하는 시원을 의식의 사물화라고 말했다. 의식은 침묵[말-없음, 말하지-않음]을 모르며 시끄러운 소음과 자질구레한 소리, 원치 않는 소리에 빼앗겨 순수한 의식과 순수한 생각이 떠오를 틈이 없다. 옛 말에 지과필개(知過必改, 허물을 알게 되면 그것을 반드시 고쳐야한다) 혹은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어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고치려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라 했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의미하게 떠드는 소리가 아닌 의식이 부르고, 의식이 생각하는 이성의 회복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때가 아닌가 싶다.김대식 박사 / 본지 편집자문위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5-08
  • 통역의 지혜와 묘미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오늘은 다양한 언어의 다양한 의사전달 기능을 골고루 맛본 날이다. 세 언어(한국어, 불어, 영어)가 한 데 뒤섞여 불평하고, 비난하고, 설득하고, 호소하고, 협박하고, 용서를 구하고, 합의해야 했던 날이다. 이 언어들 사이에서 가능한 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를 쓰면서 말이다. 남편의 손가락 골절 수술 결과가 좋지 못해 한번쯤은 병원에 가서 환자의 권리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려고 벼르고 있긴 했었다. 남편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영어가 미숙한 한국인 의사에게 자신의 불만을 전달하며 환자의 권리를 찾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인 남편과 보호자인 나는 영어, 불어, 한국어를 삼각 구도로 섞어가며 서로의 의견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전달에 애썼다. 불어 악센트와 고조된 감정이 뒤섞인 남편의 영어를 한국인 의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젊은 한국인 의사는 매우 난처한 이 상황에서 남편을 보며 영어로 설명하며, 설득을 시도하다가 중간에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은 다시 나에게 한국말로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럼, 나는 다시 이 상황을 불어로 남편에게 전하고, 남편은 다시 흥분된 감정을 나에게는 불어로, 의사에게는 큰 몸짓을 섞어 영어로 표현했다. 세 사람 사이에는 이미 팽팽한 긴장감과 안타까움이 감돌았고, 세 언어 또한 고조된 감정의 날개를 달고 작은 진료실 안을 종횡무진 했다. 한 사람의 말이 뱉어지자마자 나와야 할 상대방의 반응은 이 상황에서는 5초 정도씩 뒤로 후퇴되어 있었다.  나는 한국어가 능통하지 못한 외국인 남편과 사는 탓에 이러한 상황에 종종 부딪칠 때가 있다. 보통 내가 나서서 개입을 해야 하는 상황은 으레 유쾌하지 않은 일일 때가 많은데 바로 오늘 같은 날이 그렇다. 오늘도 사건 이후에 몰려오는 육체적, 신체적 피로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늘 그렇듯이 두 개(한국어, 불어) 또는 세 개의 언어(한국어, 불어, 영어)가 등장을 하고, 나는 여러 언어나 두 진영의 중간에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며 의미와 감정까지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남편의 입장을 옹호해야 할 때가 많지만, 가끔은 중간자적인 입장에 서 생각하게 될 때도 있다. 이렇게 중립적인 자세로 양쪽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서로의 입장을 감안하여 말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격한 감정적 대립을 완화시키게 된다. 사실 남편의 불만 섞인 비난을 다 들어야 했던 그 젊은 의사는 남편의 수술 집도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의사에게 비난을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이 사실 나에게는 매우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감당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순간적으로 뼈저린 회의를 할 것 같은 염려도 되었다.   나의 중립적 통역관 역할은 가끔 빛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이다. 남편의 격한 감정 표현이 나를 한번 거치게 되면 좀 더 완화된 한국어로 의사에게 전달이 된다. 의사가 한국어로 하는 황당무계한 변명도 나의 귀와 머리를 통해 좀 더 설명적인 불어로 뒤바뀌어 남편에게 전달된다. 이렇게 되면 양쪽 진영의 격한 감정과 긴장은 훨씬 누그러지며 좀 더 느슨한 분위기가 된다. 이런 나의 중립적 역할을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완결시키면 다행이지만, 가끔 한국말을 이해하기도 하는 남편은 자신의 편이 되지 않는다며 비교적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나를 나무라기도 한다. 오늘 사건은 세 사람 모두를 충분히 지치게 하는 힘든 일이 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 언어의 공존 덕택으로 이 긴장되고 격한 상황은 좀 더 느슨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이런 다행스러운 결과의 도출에는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했던 나의 통역관 역할도 한 몫 했다고 자부한다. 요즘 내 아들도 수영장과 태권도장에서 프랑스 친구들과 한국인 강사 사이에서 통역관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 아들에게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슬기롭게 잘 대처해 원만한 길을 잘 제시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박성원 박성원은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30
  • 문화적 발전을 경제적 결실로 승화하자
    “100년, 달성 꽃피우기”를 위해 행복한 질주를 쉼 없이 계속할 것입니다 문화나 관광 상품은 물론, 산업의 전반적인 분야에도 최선의 지혜를 모아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김문오 대구광역시 달성군수 ‘제16회 비슬산 참꽃 문화제’는 어떤 행사인가요?김문오 - 비슬산 참꽃문화제는 14회까지는 ‘비슬산 참꽃제’라는 이름으로 열렸습니다. 15회 때부터 ‘참꽃문화제’로 명명하고 행사를 확대하여 다양한 문화체험까지 만들어 보고 즐기는 행사로 많은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달성군 홍보관을 새롭게 설치하여 군민은 물론 찾아오시는 외지 손님들께도 달성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축제가 진정 축제로서의 장을 제공하려면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모두가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기획 의도에서 지역의 문화 예술 단체나 관련자들이 동참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민․ 관이 함께 만들어가며 보고 즐기고 누리는 축제가 된 것입니다. 봄철에 꽃과 함께 한바탕 어울리는 군민의 축제요, 더 나아가 오시는 모두가 하나 되는 화합과 어울림의 국민적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14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축제로 발돋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하고 있습니다.군수님께서 문화와 관광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계신데요. 어떤 배경과 계획에서이신가요?김문오 - 문화와 관광은 인간의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안정과 기쁨이 없다면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가치마저도 흔들리게 됩니다. 문화적 안정과 여유 가운데 보고 듣고 즐기는 관광이 어우러지면 많은 창의적 발상이 촉발되어 문명적 진보로 이어진다고 봅니다. 종래 이것은 과학기술로도 꽃피게 되는 것이고, 경제적 넉넉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100년의 유산을 뜻 깊게 온고지신(溫故知新)하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백서발간, 향토문화유산 기록화 사업, 상징조형물 건립, 대견사 중창사업, 꿈 프로젝트 사업, 기념 숲 및 역사인물 동산 조성, 100대 명품 경관조성 및 화보발간, 학술대회 개최, 다큐멘터리 제작, ‘달성 잊힌 유적의 재발견’ 사업, 종합예술제 개최, 100년 달성 기념식 개최 등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 임동창과 함께하는 99대 피아노콘서트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가 들어온 곳이 달성의 사문진 나루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김문오 -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난해 사문진 나루터 자리에서 99대 피아노에 의한 장엄한 콘서트를 성황리가 마쳤습니다. 올해는 100대의 피아노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놀라운 콘서트에서 감동을 누리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쁩니다. 이곳을 피아노 공원으로 조성하는 것과 함께 화원읍 본리리 마비정마을을 전국적인 유명벽화마을로 조성하였습니다. 이제는 바야흐로 문화 콘텐츠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아닙니까. 이 문화 콘텐츠의 조성으로 오지에 불과했던 이 지역이 집중 조명을 받는 관광지로 변모 했습니다. 저는 우리 달성군을 명품관광지로 만들어 국내뿐만이 아니라, 외국에서도 관심이 집중되는 도시로 만들어내기 위해 불철주야 연구하며 하나하나 실행에 옮겨나가고 있습니다.많은 지역 축제들과의 차별화된 히든카드(Hidden Card) 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김문오 - 지역 축제라는 바탕, 즉 군민들과의 행복한 한마당이 기본입니다. 이 토대위에 외지인들과 외국인들을 유치하기 위한 기획을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대구에는 주한미군들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가족들과 친지들을 초청하게 됩니다. 아울러 대구와 근교에는 여러 대학교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유학 중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도 알리게 하여, 국내외 외국인들에게도 이 축제를 홍보하고 있습니다. 올해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반응을 조사하여 2014년에는 본격적으로 외국인 유치를 위한 프로그램을 도입할 계획입니다.코레일과 함께 관광열차 상품을 개발하여 운행할 예정에 있습니다. 이것은 코레일의 전국 역사(驛舍)와의 네트워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해서, 이 축제의 홍보에 좋은 효과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보고 즐기고 누린다’는 차원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부스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찾게 되는 부모님들에게는 관광의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드리게 될 것입니다. ▲ 제16회 비슬산 참꽃 문화제 축제에 오시는 분들이 누리시게 될 행사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김문오 - 비슬산에는 30만평의 참꽃군락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참꽃의 진수를 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벤트보다도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참꽃의 장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퍼포먼스가 펼쳐지게 됩니다. 올해가 2013년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개막식 당일 2013인분 참꽃 비빔밥을 준비하여 관람객들에게 제공할 예정입니다.개막축하공연, 백년맞이 콘서트, 태권무갈라쇼, K-pop 콘서트, 참꽃 가요제, 판타스틱 콘서트, 코믹 넌버벌 콘서트, 특산물경매, 칵테일퍼포먼스, 달성 효 콘서트, 도전 100곡 등이 있을 예정입니다.참꽃 축제 플래시 몹, 대구지역 대학생들의 공연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 선생님의 사회로 노래자랑도 펼쳐지게 됩니다. 국민가수 인순이와 함께하는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며 화합의 축제 한마당을 만들어낼 예정이기도 합니다.부대행사로는 대견사 중창 개토제, 꽃꽂이 전시회, 참꽃분재전시, 특산물판매장, 먹거리 장터, 대견사 기와불사, 전통차 시음회, 참꽃 제 시낭송회, 참꽃 제 백일장 시상식 등이 열리고, 체험행사로는 LED 크리스탈 플라워전시회, 한지‧ 도예체험,  천연 염색체험, 참꽃 탁본 찍기, 네일아트, 캐리 커쳐 체험, 참꽃 양초․비누 만들기, 참꽃낚시, 소망나무 메시지 달기, 스탬프랠리 등을 실시할 계획에 있습니다.‘비슬산 참꽃 문화제’의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축제로의 발돋움과 세계적 축제화를 위한 계획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김문오 - 인위적인 공연을 중심으로 하는 축제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과의 조화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장점이기도합니다. 개화시기를 잘 맞추어서 자연과의 극대화를 이루어내야 합니다. 분홍과 녹색의 조화는 어떤 퍼포먼스도 불가능한 천연이 만들어내는 조화입니다. 여기에 사람이 함께 하는 어울림은 어떤 것에서도 표현해내기 어려운 감동을 자아낼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세계적인 축제로의 무한한 잠재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미래학자 다니엘 핑크(Daniel H. Pink)는 예술성, 공감능력, 통찰력과 같은 우뇌능력이 중시되는 ‘관념화의 시대(Conceptual Age)’가 왔음을 강조했습니다. 다니엘 핑크가 주장하는 ‘하이컨셉(high-concept)·하이터치(high-touch) 시대에 필요한 6가지 조건인 디자인(design), 스토리(story), 조화(symphony), 공감(empathy), 놀이(play), 의미(meaning)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슬산 참꽃문화제’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이번에는 참꽃과 더불어 서브 주제를 선정하여, 참꽃과의 조화, 공감, 스토리, 놀이, 의미를 아우르는 디자인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과도기적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축제 속에 축제라는 개념으로 그린 사이언스 페스티발, 달성향토전통음식경연대회 등 과학과 음식·환경을 주제로 축제의 내용을 깊고 넓게 만들어 가려고 기획하고 있습니다. ▲ 제16회 비슬산 참꽃 문화제 행사의 참여도와 경제적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김문오 - 참여는 단순한 홍보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관광이라는 큰 줄기와의 연계가 필요합니다. 관광이라는 인프라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코레일과의 연계를 통해 ‘비슬산참꽃열차’ 라는 상품을 개발하였습니다. 철도는 전국은 물론 외국 관광객들과도 손쉬운 연결이 가능하게 합니다. 대구까지 연결된 철도는 행사장까지의 셔틀 서비스로 이어지게 됩니다.이때 관광객들에게는 엽전 기념품을 제공합니다. 물론, 이것은 축제장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관광이라는 요소에 들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경험과 즐거움을 안겨줄 것입니다. 또한, 대구광역시의 협조를 통해서 관광객들에게 도시락을 지원하게 됩니다. 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식당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평일에 지정 여행사를 통해 축제장에 오시는 관광객들에게는 도시락을 제공한다는 계획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소나마 관광객들의 평일과 주말 분산효과에도 영향을 미치리라고 봅니다. 2012년 ‘비슬산 참꽃문화제’에 오셨던 관광객은 20여만 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올해에는 25만 명 이상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비슬산 참꽃 군락지 바로 옆에는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일연스님이 주지로 기거하셨던 대견사가 2013년 3월 1일 중창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달성군 개청 100주년을 맞는 2014년에 완료될 예정입니다. 비슬산 아래에 위치한 테크노폴리스에는 DGIST(대구경북과학기술원)가 있습니다. 대구 국립과학관도 5월중으로 개관될 예정입니다. 향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의 일부 학과도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진행이 복합적인 발산력을 가지게 되면 어떤 대도약(Quantum Jump)이루게 되는 시점이 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역의 경제에도 큰 동력을 제공하면서, 여러 분야의 동반성장을 견인해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와 같이 문화나 관광 상품은 물론, 산업의 전반적인 분야에도 최선의 지혜를 모아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달성군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모아 곳곳에서 잠재력을 발산하고,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는 일환이라고 봅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런 노력을 할 때, 우리는 국가적인 시너지를 창출하며 남다른 도약을 이룰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   ▲ 100년달성기념사업자원봉사단봉사활동(100년꽃마차공연 2012년 10월 23일~11월 8일) 군수님의 비전과 소망은 어떤 것인가요?김문오 - 군수에 취임하고 지난 2년여 동안 저는 달성에 젖어서 달성을 꿈꾸며, 군민들과 함께 호흡하는 보람과 행복 가운데 여기까지 와 있습니다. “달성을 알면 꿈을 갖게 되고, 달성에 오면 꿈을 꾸게 되고, 달성에 살면 꿈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100년, 달성 꽃피우기”를 위해 행복한 질주를 쉼 없이 계속할 것입니다. 제가 재임하는 시기는 물론, 제가 살게 될 시기를 넘어 미래 100년의 동력을 만드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하나 구체화되고 가시적인 효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만 군민 모두와 함께 미래 100년을 준비하며, 오늘을 행복하게 만드는 이 일이 저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비전이고 소망이 아니겠습니까.‘비슬산 참꽃문화제’는 이런 동력을 만드는 잔치며, 행진의 서막을 알리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볼거리, 즐길 거리, 먹 거리를 조화롭게 창출하는 풍요한 달성이 열리고 있습니다. 역사와 문화, 관광과 과학이 어우러진 살기 좋은 달성, 꿈을 갖게 되고, 꿈을 이루게 되는 복된 달성을 이루는데 모두의 힘과 의지를 모아 아름다운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 면면히 흘러온 저력을 오늘에 새롭게 꽃 피우고 미래 100년을 행해 힘차게 나아가는 우리 달성군의 모두에게 아낌없는 격려와 힘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김문오 / 달성군수대구 달성 화원초등학교 졸업(1962), 대구 경상중학교 졸업(1965), 경북대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졸업(1968),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1973), 대구 MBC 보도·경영·편성국장· 뉴스데스크 앵커, 대구 MBC 미디컴 대표이사,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대구 산악연맹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대구 축구협회 이사, 경북대학교 법대 동창회장, 경북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제18회 대구시 문화상(언론부문) 수상, 한국방송대상(지역언론부문) 수상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3-04-28
  • 영어습득의 새로운 안목
    필요에 따른 의사소통적 바람에 부응하는 편안함에서, 만나고 부딪히면서 점차 확대해 나가는 학습적 방법이 필요하다 ▲ 우리는 현 시점에서 영어권 원어민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니면 세계화 시대 흐름에 맞춰 전 세계인과 교류하기 위한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연예인들이 가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하지만 발음이 지나치게 한국적이라든가 문법과 어휘가 조금만 표준에서 어긋나기라도 하면 즉시 주변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하는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정작 그 외국인은 내용을 다 이해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서 한국식 영어인 콩글리쉬를 하면 영어에 대한 언어 지식이 매우 부족한 언어학습자로 낙인 찍혀 세계 시민이 되기에 부족한 조건을 갖춘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럼, 우리의 영어 학습의 목적은 단지 영어 원어민과 의사소통하기 위한 것인가. 그래서 매우 표준화된 미국, 영국식 영어를 학습하고 사용해야만 하는가. 이 규범에서 벗어난 영어는 국제사회에서 자격이 없는 것인가. 누군가의 콩글리쉬를 들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영어로 말할 때, 위축이 되는가.  남편의 일 때문에 홍콩에 거주했을 때가 있었다. 난 내심 아이의 영어교육 문제 해결과 나의 영어 실력 향상에 유익을 얻게 될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었다. 영국 학교가 제법 많은 홍콩이라면, 영국 원어민이 직접 가르치는 우수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을 것이며, 아이와 나도 제대로 된 영국 영어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아이를 유치원에 보내야 하는 시기가 됐을 때, 대부분의 영어 유치원 교사들이 아시아 출신인 것을 알고 적잖이 실망했었다. ‘유치원 학비가 얼마인데 어떻게 인도, 홍콩, 필리핀 교사한테 내 아이의 영어 교육을 맡겨.’ 난 솔직히 내 아이가 미국이나 영국 백인 원어민 교사가 아닌 아시아 교사한테서 영어로 교육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제대로 된 외국어 학습이라면, 그 나라의 원어민에게서 배워야 가장 효과적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반 동안 아시아 교사 밑에서 교육을 받은 아이의 영어실력은 예상보다 빠르게 향상되었고, 이 경험을 통해 나의 고정관념은 어느 정도 누그러질 수 있었다.   내가 홍콩에서 살았던 곳은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홍콩 사람들보다는 외국인들이 더 많이 거주했던 작은 ‘지구촌’이었다. 상권이 조성된 장소 주변의 큰 광장에는 주말이면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서로 만나 교류하는 장이 열리곤 했다. 여기에서도 세계 공용어인 영어는 세계인의 관계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모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우리 식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표준화된 영어를 사용했다고 말할 수 없다. 홍콩, 인도, 필리핀, 일본, 말레이시아, 브라질,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매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그들은 각기 그들의 방식으로 영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표준화된 영어 원어민의 발음, 문법, 수준 높은 어휘 사용은 기대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들은 모국어인지, 영어인지 모를 그들 방식의 영어를 사용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친목을 도모하였다. 그 동안 미국 영어에만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처음에는 이런 상황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들의 영어를 이해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차차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핀 사람과는 그들 방식대로 장문보다는 단문을 주로 사용해 대화를 했다. 홍콩 로컬시장이나 식당에서는 완성된 문장보다는 주요 단어 중심으로 말해야 그들과 소통할 수 있음을 터득했다. 나는 홍콩에 거주하면서 기대했던 영국식 영어는 배워 오지 못했지만, 여러 각국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들의 영어 스타일에 맞춰 말할 수 있는 전략을 자동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나의 이런 경험은 ‘표준화된 영어’와 ‘영어 원어민처럼 말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우리가 영어를 학습하는 목적이 단지 영어권 원어민들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세계적 교류가 활발한 요즘, 우리는 비원어민 영어화자들과 사업을 진행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사교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영어권 원어민들의 모국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아니면 세계화 시대 흐름에 맞춰 전 세계인과 교류하기 위한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배워야 하는지 한번쯤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영어교사의 자질에 관계없이 백인 영어 원어민 교사가 선호되고, 콩글리쉬를 하면 가차 없이 표준화된 미국영어의 잣대로 우리의 영어 능력이 판단되는 지금의 풍토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제는 영어 지식을 학습해 좋은 시험 점수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영어적 해득과 작문, 외교나 학술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걸맞은 학습을 하고 필요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실생활에서의 다양한 국적의 언어 화자와의 의사소통을 꿈꾸며 영어를 학습한다면, 기존의 경직된 학습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이 세상에 완벽한 구사능력이 선행되는 언어적 습득방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필요에 따른 의사소통적 바람에 부응하는 편안함에서, 만나고 부딪히면서 점차 확대해 나가는 학습적 방법이 필요하다. 이렇게 된다면, 좀 더 덜 위축되고, 더 여유 있는 마음에서 언어를 습득해나가는 행복한 영어 학습자가 되지 않을까.박성원 박성원은 삼성인력개발원과 국, 내외 대학의 한국어 교육기관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해 왔다. 유럽인과 결혼해 다문화 가정에서 다문화, 다언어를 실제 공간에서 체험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다문화-다중언어를 위한 언어문화운동을 기획하고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28
  • 백년의 유산 온고지신(溫故知新)
    달성군 100년을 이어 온 지금, 이 역사를 발판으로 미래의 비전에서 오늘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 김문오 대구광역시 달성군수 2013년도 4개월이나 흘러가고 있다. 떠들썩했던 새로운 천년의 출발도 벌써 13년이 지나고 있다. 100년을 1세기라고도 하니 인류는 스물한 번째의 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그저 지나가는 세월쯤으로 무의미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지난 100년은 향후의 100년을 조감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산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 흐름을 주도해 갈 수 있느냐는 것이 한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예컨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현실이 과연 지금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종대왕의 애민사상과 과학기술적 비전을 더욱더 발달시키는데 주력했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상태는 어떠했겠는가. 쓸데없는 가상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역사학자나 미래학자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판단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도는 예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과거 일본 제조업의 상징이었던 소니(Sony)가 맥없이 무너졌다. 1946년 창업 이래 첨단제품을 쏟아내며 무섭게 질주했던 소니의 침몰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는가. 사진과 필름의 대명사와도 같았던 코닥(Kodak)은 1881년 설립 이래 세계인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기업이다. 한 때는 미국 필름 시장의 90%와 카메라 시장의 85%를 점유하며, 14만 명을 고용했던 기업이다. 이런 이 기업이 무너지는 결정적인 계기는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irony)하게도 디지털 카메라가 1975년 12월 코닥의 기술자 스티브 새손(Steve Sasson)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현재에 안주하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경영진이 이를 무시한 결과는 그로부터 37년 후인 2012년의 첫 달을 못 넘기고 파산보호를 신청하도록 만든 것이다. 핀란드의 노키아(Nokia)는 한 때 정부의 예산보다도 많은 매출을 기록하기도 했던 기업이다. 세계 휴대폰 시장의 40%를 노키아(Nokia)가 점유했던 적도 있다.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했던 막강한 이 기업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스마트 폰에서 뒤쳐진 것이 원인이 되었다. 세계 1위라는 자만심으로 안주한 탓에 국가적으로 고통을 분담해야하는 비용을 치르고 있다.  ▲ 달성군 개청 100년 맞이 기념식(2013. 2. 28, 군청 대강당)  이런 사례들을 살펴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2013년 달성군은 역사 100년을 맞았다. 2013년을 9개 읍·면 19만 군민과 함께 하는「100년 달성의 해」로 선포하고, 군민 모두가 하나 되고 화합하는 계기로 승화시켜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100년 달성 기념사업을 통해 충효와 전통의 고장인 달성군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고 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기념사업을 통해 달성군민 전체가 하나 되는 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이다.지난 2월 28일에는「달성군 개청 100년 맞이」기념식, 3월 1일에는 비슬산 관광명소화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는 대견사 중창 기공식, 3월 4일에는「달성군 개청 100년 맞이」직원 결의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생색내기를 위한 보여주기식 행사는 말 그대로 전시행정일 뿐이다. 전시행정이 아닌, 진실이 되려면 군민의 삶을 살피는 일이어야 한다. 지난 역사의 연장선에서 오늘 우리의 행복과 지속 가능한 발전이 내 자식과 자식의 자식을 이어가며 상생하고 확산되도록 토대를 닦는 일이 되어야 한다. ▲ 대견사 중창 기공식(2013. 3. 1, 대견사지) 달성군은 1914년 3월 1일 대구전역에 해당하는 대구부 외곽 16개 면을 관할하면서 출범하여 2013년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에 발맞추어 달성군에서는 여러 가지 100년 달성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사업의 근간을 이루는 100년 달성 기념사업 조례 제정을 시작으로 군민이 참여하고 알찬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100년 달성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달성의 뿌리를 찾기 위해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100년 달성뿌리찾기’ 자문위원회도 구성하였다. 지난해에는 ‘달성뿌리찾기’ 고지도 전시를 시작으로 옛 사진 전시, ‘옛 신문․사진으로 보는 100년 달성’ 책자도 발간하였다. 달성군 홈페이지에는 100년 달성 역사 자료실을 개설하여 지난 100년의 역사를 재조명하도록 돕고 있다. ▲ 달성백서 발간위원회 회의(2012. 11. 19, 군청 상황실) 이 사업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자원봉사 단원 400여 명을 공개 모집하여, 2012년 7월 5일 100년 달성 기념사업 자원봉사단 발대식을 군청 대강당에서 성대히 개최했다. 이날 자원봉사단 발대식에는 KBS 전국노래자랑 사회자인 송해 선생을 100년 달성 기념사업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송해 선생의 교양강좌도 개최했다.자원봉사단원은 달성군 개청 10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각종 행사의 봉사는 물론이고 달성군을 널리 알리는 홍보대사의 역할을 충실히 할 계획이다. 달성군 역사 100년을 기념하는 것은 단지 행사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100년의 유산을 온고지신(溫故知新)하여 더욱더 행복한 오늘과 후손에게는 아름답고 지능 가능한 내일을 물려주는데 의의가 있다.2013년은 달성을 토대로 정치적 역정(歷程)을 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해이기도 하니, 달성군 역사 100년의 의미와 어찌 깊은 연관이 없다고 하겠는가. 앞서 소니(Sony), 코닥(Kodak), 노키아(Nokia)와 같은 기업의 영욕을 통해 반면교사(反面敎師)를 삼고자 했다. ▲ 달성군 100년 역사와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는 한시(漢詩) 원론적인 수사(修辭)로서가 아니라, 정치발전은 곧, 민생이다. 민생이라는 것은 서민, 중산층이 경제의 튼튼한 허리가 되어 행복하도록 일자리를 만들고, 걱정 없는 삶을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한 고민과 노력이 위정자의 존재적 가치요, 정체성이다. 앞서 언급한 세종대왕의 애민적 따뜻함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창조적 내일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된다. 과학기술, 골목상권, 중소기업, 대기업, 농어촌 모두의 상생을 위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다산(茶山)의 목민정신과 과학적 사고를 본받아, 군민들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지도록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달성군 100년을 이어 온 지금, 이 역사를 발판으로 미래의 비전에서 오늘을 창조해 나가야 한다. 지도자의 진정한 힘은 모두의 다양한 역량을 살리며, 그것을 하나로 모아 역사의 연장선에서 오늘의 행복 살피고 내일을 견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김문오 / 달성군수대구 달성 화원초등학교 졸업(1962), 대구 경상중학교 졸업(1965), 경북대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졸업(1968),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1973), 대구 MBC 보도·경영·편성국장· 뉴스데스크 앵커, 대구 MBC 미디컴 대표이사,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 대구 산악연맹 자문위원회 부위원장, 대구 축구협회 이사, 경북대학교 법대 동창회장, 경북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제18회 대구시 문화상(언론부문) 수상, 한국방송대상(지역언론부문) 수상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3-04-22
  • 대립과 모순의 시대를 바라보며
    누구나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 그들은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우리는 자꾸 아프다. 자신을 가감 없이 표현해낼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더 많이 아프다. 작년에 싸이(PSY)가 ‘강남 스타일’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에 친형처럼 따르던 가수 김장훈과 사이가 나빠졌다는 기사가 등장했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두고 양측 간의 공방이 계속될 때, 김장훈은 싸이의 공연장을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둘은 함께 소주잔을 들어 러브 샷을 했다. 둘이 서로 밉다고 으르렁댔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어느 모습이 진심이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밉다’ 혹은 ‘좋다’는 내면의 목소리에 솔직하게 반응하는 김장훈은 정말 멋진 야성의 삶을 살고 있다.사실 사랑과 미움은 대립한 감정이 아니다. 사랑한다고 마음먹음으로써 미움을 다 제거할 수 있을까? 아들이 문을 꽝 닫고 나가면 밉다. 그러나 사랑하니까 밉다. 미운 만큼 사랑도 깊어진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는 감정이다.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건강은 질병과 대립한 것이 아니라, 질병과 더불어 ‘불편하지 않게’ 살아가는 상태라고 했다. 개인마다 편차가 있으나, 질병을 통해 건강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니 다 알 수도 없는 질병을 제거하는 데에만 몰두하지 말고 보듬고 가는 것도 중요하다. 표준적인 측정치로는 문제가 없어도 내가 아프면 아픈 것이다. 겉으로는 아파도 내적으로는 평안을 지키며 살 수도 있다. 우리는 일관적이지 못한 내 안의 모순과 변화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그 차이의 틈새와 타협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극단의 대립과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허식에서 벗어나 살 수 있다.지금도 인류는 여전히 불안과 위험의 시대를 살고 있다. 한국 사회에도 느림과 성장, 좌편과 우편의 담론이 늘 공존하고 있다. 이런 영향을 거부할 수 없는 자아가 복잡하고, 변화하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상태가 분열되지 않았다면, 그건 자신의 역량 덕분이 아니라, 그저 행운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솔직히 나와 이웃이 자존감을 지키지 못할 만큼 휘청거릴 때, 우린 각자 어떻게 반응했는가? 악착같이 돈을 더 벌거나 정보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기에 바쁘지 않았나? 술이나 마시고 편을 갈라서 쓸데없는 소문을 만들어내며 살지는 않았는가? 국내외 여러 지표를 보면 우린 분명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안을 생각함에 있어, 어문계열 교수인 나의 연구 영역적 한계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이나 말로 자신의 대립적이고 불안정한 정체성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이야기하고 싶다. 내러티브 언어로 자신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대립의 인생에 직면하게 된다. 찌르고 찔리는 고슴도치적 세상 담론에서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내가 속한 영어영문과 학생들을 보자. 영어를 모방하면서, 영어 원어민과 같은 유창성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열등감을 갖는 학생들이 있다. 한국은 다문화 공동체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관용적으로 품어, 모국어와 자국 문화의 가치관을 잃지 않는 통문화적(通文化的) 복수언어 사용자의 정체성을 가질 법도 하다. 그러나 영어가 싫지만 억지로 공부하고, 잘한다고 칭찬받으면서도 부끄러워한다. 아니면 다 포기하고 영어에 관한 특정 문화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학생들도 있다. 물론 그들만 탓할 수는 없다. 맥도날드화된 교육과정 안에서 원어민-비원어민, 유창성-정확성, 교사-학생, 맞다-틀리다 등을 대립적으로 구분하며 살아왔으니, 갑자기 언어의 다양성과 문화적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공존하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쉽겠는가.평범한 한국인이야, 영어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어를 전공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자신만의 모순과 긴장을 무장해제시킬 여유를 갖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곳에는 늘 목표, 진도, 시험 등으로 잘게 쪼개져 있다. 여분의 텍스트로 자신만의 유별함을 한가롭게 품을 수가 없다. 자로 재는 듯한 측정의 시대에는 생활과 통합의 언어는 성과와 분석의 대상일 뿐이다. 겨울이 지나고 시험의 계절이 한풀 꺾였다. 그러나 다시 찾아올 공무원시험, 수능시험 등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학원은 여전히 북적인다. 편입 시험도 준비해야 하고 입사 전쟁도 시작된다. 그 모든 길목에서 언어의 능숙함에 대한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수험자는 잘게 쪼개진 대화문이나 지문을 빠르게 이해하고 답을 찾아야한다. 공교육에서도 시험 준비를 하고, 다시 사교육으로 가서 문제 풀이를 한다. 과연 그곳에 자신의 이야기를 찾을 수 있고, 못난 자아를 보듬어 주며 타인을 관용적으로 품을 수 있는 생명의 언어가 있는가? 그들은 너무나 위생화된 언어를 공부하느라,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지 못한다. 누군가와 한가롭게 고통과 희망의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한다. 러브레터를 마음 설레며 써보지도 못한다. 스펙이 완성되고, 결혼을 하고, 좋은 기업에 취업을 한 다음엔 과연 자신의 모순적인 삶을 내러티브로 풀어갈 수 있을까? 그들은 분명 내면의 대립과 사회적 갈등을 만나게 될 터인데, 그땐 그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낼까? 우리는 자꾸 아프다. 자신을 가감 없이 표현해낼 언어를 배우지 못해서 더 많이 아프다.신동일 박사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16
  • 혼내는 오디션, 눈물 쏙 빼는 몰카방송
    제발 너무 진지하지 말자자꾸 윽박지르지 말자언어의 진지함, 위계성, 전문가의 규범에 우린 지쳐가고 있지 않은가  ▲ SBS 일요일이 좋다 - K팝스타2  화면 캡처 악동뮤지션의 우승! 난 오디션 방송을 즐겨 본다. 그곳에 나온 참가자들이 노래도 참 잘하지만, 꼭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처럼 보이기도 해서 볼 때마다 언제나 유쾌하다. 그런데 방송이 후반부로 갈수록 우승, 경쟁, 탈락, 생존의 말이 넘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난 방송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경연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심사위원 쪽에선 심각한 표정으로 엄숙하게 말을 전하고 참가자들은 그만큼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TV 화면을 가득 채운 심사자들이 어쩌다 웃을 때면, 시청자들도 함께 웃게 되고, 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면 시청자들도 함께 심각해진다. 시선의 권력, 언어의 위계에 시청자도 참가자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긴장, 피로, 압박감, 눈물을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으면 서바이벌 게임의 오디션 방송 자체가 불편해질 때가 있다. 어느 방송이든 누군가를 매주 탈락시키고 보따리를 싸서 숙소를 나가게 한다. 그러나 경연이 끝날 때까지 함께 계속 생활하며 어울리게 한다면 어떨까. 이런 과정에서 서로 더 친해질 수도 있고, 붙든 떨어지든 서로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다음 경연을 준비하는 동료를 도울 수도 있고, 공연의 조연으로 참여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해야 축제 같은 공연을 준비하고, 떨어져도 눈물이 덜 나는 오디션으로 기획되지 않을까. 결국, 누가 1등이 되던 생존하지 못했다고 한 명씩 쫓아내지만 않으면, 진심으로 서로 축하하고 축하받는 더 훈훈한 관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방어적이 될 수밖에 없는 서바이벌 게임의 방송문화가 참 안타깝다. 우린 올림픽 때도 국가 간 순위 경쟁에 너무 심각해져서, 타문화를 흥미롭게 바라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우리 자식에만 너무 집착해 있으면, 다른 집 아이들과 유쾌하게 놀 시간과 공간을 놓치게 된다. 경쟁에 몰입하며 놀지 못하는 문화는 점점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있다. 몰카(몰래카메라)방송도 불편하다. 특히 선배들이 작당해서 후배를 매몰차게 꾸짖고 어쩔 줄 모르는 후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장면은 보는 사람도 안타깝고 긴장된다. 결국 몰카라고 밝히면 후배는 긴장이 풀려 울먹거리는 경우가 태반이고, 주위에서는 웃고 달래게 된다. 방송이야 모두가 유쾌하게 웃으며 마무리하지만, 그럴 때마다 난 ‘혼내고 곤혹에 빠뜨리는’몰카 방송에 누가 즐거워할지 의아해진다. 만약 그런 방송을 보는 것이 유쾌하다면, 그는 아마도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언어 질서 안에서 편리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 게다. 몰카에서는 즐거운 일상이 드러날 수 없겠는가. 그렇게 온 국민 앞에서 혼을 내고 눈물을 쏙 빼야 할까. 언어를 인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 언어를 통해 엄격한 위계와 규범성이 강조되는 곳, 아버지, 사장님, 선배님이 심드렁하게 앉아 있고, 그래서 무섭고 긴장되는 중에 눈물이 펑펑 나는 곳에선 늘 타인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법을 강조한다. ‘혼내기’ 몰카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위계적이고 엄숙한 언어 공동체를 내면화시키고 있다. 제발 너무 진지하지 말자. 자꾸 윽박지르지 말자. 언어의 진지함, 위계성, 전문가의 규범에 사실 우린 지쳐가고 있지 않은가. 우리도 모르게 그와 같은 문화를 일상에서 흉내 내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문화 권력이 우리의 삶을 압박하도록 계속해서 허용한다면, 개인의 실존은 더 엄격하게 측정되고 위계적으로 고정될 것이다. 놀겠다는 사람은 잘 놀게 자리를 마련해주자. 꾸짖을 거면 시간을 두고 구체적으로 뭘 좀 즐겁게 가르쳐보자. 유쾌하게 가르치며 배우고 사랑하는 모습을 시청자들이 더 볼 수 있다면 혼내는 분위기라고 해도 덜 민망할 것이다. 삶이 축제이고 선물이라면, 방송에서도 축제적인 경연, 일상 속에서의 축제를 보고 싶다. 가수 싸이(PSY)의 시청공연이 기획될 때, 내 건 첫 타이틀이 ‘글로벌 석권기념 서울시민과 하는 공연’이었다. 이 제목을 보면서 놀 생각이 드는가? ‘글로벌을 석권했다, 또는 계속 석권하겠다’는 자세라면, 이미 흥은 깨지는 것이고 싸이(PSY)도 더는 놀 곳이 없지 않겠는가? 그냥 놀자. 유쾌하게.신동일 박사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본지 편집자문위원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3-04-0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