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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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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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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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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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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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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한국철학에 대한 온고지신
[타임즈코리아] 함석헌의 한국철학이 씨알을 위한, 씨알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메타(meta) 함석헌의 한국철학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함석헌식의 철학입니다. 머물지 않고 흘러가면서 개혁함이 필요합니다. 함석헌도 시대의 아들이라는 겸허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함석헌의 철학이 정체되고 과거의 박제물이 되어버린 듯한 것입니다. 유학자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에서 옛날 어진 사람들의 전해지는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천지가 한 세대의 사람들을 낳아 그 세대의 일을 감당하도록 한 것이지, 다른 세대로부터 재능을 빌리도록 한 것이 아니다”(天地生一世人, 自足了一世事, 非借才於異代, 今之賢者). 씨알의 능동성과 저항, 그리고 맨 사람을 역설했던 함석헌의 정신이 오늘날처럼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로 바뀐 적이 있었을까요? 씨알은 정치의 주권자요 창조적인 존재입니다. 씨알은 한 국가의 통치 대상이나 정치전(政治戰)의 수단이 아닙니다. 씨알은 자주적인 이성으로 사태를 판단하는 능력을 갖춘 존재입니다. 씨알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존재로서 사회와 정치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명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이상희, “위기적 상황과 대중조작 기술”, 사상계, 1970년 1월호, 19-21). 따라서 함석헌의 한국철학 연구자들은 오늘의 시대적 삶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창의적인 자세로 연구하고 비판적 태도와 함께 열린 마음으로 변화와 발전을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잘 알다시피 ‘철학’(哲學)은 일본사람 서주(西周)가 Philosophy를 번역한 개념이지만,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 보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협의와 합의, 그리고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공속의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이철승, “머리말. 한국에서 철학하기”, 위의 책, 6-7; 김교빈, “우리철학의 길”, 위의 책, 385-400). 함석헌의 한국철학이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그의 삶과 사상을 철학화 하는 엄밀한(streng) 과정에서는 꼭 이를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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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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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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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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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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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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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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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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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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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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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 가시적인 문자와 기호의 겉-뜻과 겉-살핌이 마치 독실한 신자의 표상인 것처럼 자위하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 광고 문자, 이미지, 선전 문구 등 현대사회의 문자와 기호 또한 의도된 이데올리기로 사람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조작하고 있다. 근원적인 문자(Urschrift)는 주체의 행위 이전에 주어진 시원적 사유의 가능적 표현이다. 자크 데리다(J. Derrida)가 “모든 표현 수단들은 기본적으로 문자”라고 말한 것은 신에 대한 표현조차도 인간의 언어 전달 수단인 문자에 있음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함석헌은 문자로 이루어진 성서의 속뜻을 읽어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글자에 붙잡히지 말고 그 산 속뜻을 읽어내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7쪽). 문자는 기호로서 일정한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고 있다. 문자는 의미의 표현수단이고 대상 자체를 표상하여 바라보게 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종교는 문자 자체를 숭배하거나 신성시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자로서의 기호조차도 신의 언표라고 믿기 때문이다. 문제는 신의 자기 계시성이 문자에 갇히게 되면, 그것이 뜻하는바 다양한 해석은 불가능하고, 결국 해석의 단일성(해석학적 전체주의)이라는 폭력에 의해 신의 해체와 신의 왜곡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기호와 기호, 문자와 문자 사이의 틈을 열고 밝혀서 신의 자기 본래성과 참 뜻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불교의 경우 그것을 탈피하기 위해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면서 그것의 속-뜻으로 바로 들어가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도 경전이 문자에 얽매이는 손실을 줄이고자 해석의 가능성을 놓고 논쟁해왔다. 이와는 달리 유독 그리스도교만큼은 문자, 즉 자구에 매달려 그것이 지닌 본래적 함의를 호도하고, 심지어 그 문자와 음성적 발화까지도 특권층만이 향유하도록 함으로써, 그 해석학적 논의는 닫히고 말았다. 이와 같은 전통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어서 일정한 계층 혹은 계급집단의 발화와 해석의 독점권은 많은 신자들의 신앙과 사고, 행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독점계층조차도 문자와 기호에 매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주체는 문자 너머에 있는 속뜻을 파악하고 신의 자기 계시의 넉넉함, 자유로운 체험, 신의 관대함을 말하기보다 문자나 기호를 반복함으로써 신에 대한 자유로운 유희(Spiel)와 상상력(Einbildungskraft)을 방해·제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기호와 문자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광고 문자, 이미지, 선전 문구 등 현대사회의 문자와 기호 또한 의도된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이성과 상상력을 조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말하고 있듯이, 속-뜻으로 들어가야 한다. 겉-뜻은 문자와 기호의 외양에 불과한 것으로써 주체적 사고의 겉-살핌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그것은 임의적이고 단의적인 문자의 음성적 발화수단이자 지시인 것이다. 겉-뜻, 겉-살핌을 벗어나서 기호와 문자, 음성을 해체할 때 새로운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다. 해석(exegesis)은 일면 종래의 겉-뜻을 해체하고 속-뜻으로 들어가는(eisgesis)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로운 상상력은 문자를 떠나 초월적 존재를 만나게 된다. 이른바 변하는 것(기호, 문자)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속-뜻, 진리),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변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진리란 지축이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물결은 늘 뛰놀면서 바다는 언제나 평한 것처럼,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물결이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언제나 변함없는 수평을 가질 수 있듯이, 진리도 쉬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마음을 불살라 열과 빛을 내잔 하늘 닿는 굴뚝이다”(함석헌, 위의 책, 8쪽). 변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즉 진리를 만나게 된다. 진리를 나타내려면 표현수단이 있어야 한다. 문자와 기호는 진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는 불완전한 표현수단이다. 표현수단이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고 문자와 기호가 진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진리를 지시하고 있는 진리 수단이요, 진리의 한 측면이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것이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것이다. 문자와 기호, 음성(적 발화)은 시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함석헌은 근원적인 문자 혹은 근원적인 목소리를 말한다. “성경은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이기 때문에 그 첨 형성이 없어지도록 키워내야 한다”(함석헌, 위의 책, 9쪽). 성서는 양식이라기보다 산 씨알이다. 씨알로 알아듣고 그것을 맨 처음의 음성과 문자로 인식해야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속-뜻이 내게 들어와 나를 산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차이는 맨 처음의 기호와 문자를 자유로운 유희와 상상력에 따라 신을 그려내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신앙적 금기 사항이기도 했다. 신을 형상화하거나 신과 같이 될 수 없는 터부는 오래 전 신화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금기는 초월적 신비의 욕망과 신과의 일치의 갈망을 가능케 하는 일정한 경계이기도 했다. 상상력으로 들어가는 순간 신은 문자와 기호를 넘어서 새롭게 산출되는(Produktive) 형상이요, 기억·연상되는 형상(reproduktive)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려면 문자를 탈마법화(탈주술화)해야 한다. 문자나 기호를 신의 전부라고 착각하면 건강하지 못한 광기에 사로잡힌다. 성서가 산 씨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것(속-뜻)을 자양분 삼아 인간이 살게 된다면, 맨 처음의 목소리는 결국 진리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성서의 속-뜻이 체화될 때 로고스는 문자나 음성에 그치지 않고 형상이 된다. 맨 처음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속-뜻의 사람이 되는가, 안 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시적인 문자와 기호의 겉-뜻과 겉-살핌이 마치 독실한 신자의 표상인 것처럼 자위하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또, 그렇게 발언하고 교육하는 성직자들이 있다면 자신의 행위가 신의 부재와 신과의 멀어짐을 조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문자가 모든 것의 표현수단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문자를 해체구성하지 않으면 호교론에 빠지거나 아전인수적 오류에 매몰된다. 문자 합리주의나 근본주의적인 죽은 문자주의, 문자 토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문자와 기호 이면의 산 속-뜻을 읽으려고, 살아 있는 정신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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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적인 문자를 찾기 위한 해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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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정치는 없다!
-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 ▲ 목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분투적인 몸부림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약속은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든다. 반면에 있는 것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거짓이고 속임수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적 언어와 문자 이면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것을 습관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자는 물신숭배의 해독 불가능한 기호를 문자화, 언어화한다. 문제는 물신숭배와 권력의 관계성이다. 민주주의와도 전혀 관계가 없는 물신의 거짓 기호를 독해하지 못한 백성의 무지는 엄청난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목자에게는 이 무지와 거짓에 대해, 백성들을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의 창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말과 글이 서로 맞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세종대왕)가 이것을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쉽게 익혀 편히 사용하기를 바란다.” 567년이 지난 지금에 보아도 어떻게 이렇게도 백성을 사랑한 성군이란 말인가! 귀하고, 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은 권력자들에게서 발언된 말과 기호가 거짓인데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다. 다음은 함석헌의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힘의 숭배, 돈의 숭배를 그만두는 일이다. 오늘 세계를 이렇게 만든 것은 군국주의, 제국주의, 산업주의의 국가관이다... 큰 배가 지나간 뒤에 작은 배가 그 물결을 겪듯이 앞서 해먹고 간 힘 숭배 돈 숭배자들이 일으키고 간 죄악의 결과를 당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형편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앞의 것을 따라가려 부국강병만 외고 있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양심이 예민하고서 소위 강력한 목자 될 수는 없다. 성인들이 정치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소위 지도력이란 결국 자기 생각을 남에게 요구하는 일이다. 인간의 정신연령이 낮은 때는 그럴 수 있었다. 이제는 이미 그것이 사회악의 근본인 것을 안 시대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는 아니 된다... 제법 진리 비슷하면서도 모든 사회악을 만들어내는 근본이 소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내세워서 하나의 이기심으로 인해 모인 단체 위에 씨로 하여금 거짓으로 꾸며 따라가게 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 5, 한길사, 1984, 143쪽). 공리주의적 발언과 마치 신의 친필인 양 공언된 문자는 백성에게 강요, 강제, 요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것이 약속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약속은 이성의 자기 신뢰를 통한 인간 이성의 자기 발언과 인격의 확신과 확증이다. 그래서 약속은 개인에게는 신념과 성실의 문제, 타자에게는 믿음과 희망의 문제이다. 신의 약속을 철썩 같이 믿은 백성들은 그 약속의 언저리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얹어놓고 기다린다. 약속은 다만 희미한 흔적이나 아물거리는 기억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표현이며 실현과 책임이다. 그렇다면 목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분투적인 몸부림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실현하지 못할 약속이면서도 목자라고해서 언어화하고 의식적으로 실행가능하다고 백성들에게 호언장담하는 독선은 그야말로 흔적도 없는 음성의 찌꺼기나 다름이 없다. 약속은 자기 자신과의 문제이자 타자와의 관계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약속은 이미 세계 내부적인 의미와 세계 구성적인 의미 그리고 백성의 마음과의 관계에서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공유된, 공통된 구원의 공공성이다. “참 지도자는 내가 한다는 의식이 없다... 자기를 믿고 자기가 위대하여 모든 것을 독점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될수록 모든 사람의 스스로 하는 것을 막고 자기 것만을 억지로 내세우려 한다. 그러므로 선전하고, 달래고 강제하고 속이는 것까지 꺼리지 않는다. 사람은 깊을수록 조용하다”(함석헌, 위의 책, 145쪽). 왜 목자는 모든 일을 자기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 분명히 목자는 기적을 일으키는 만능의 기계적 신(deus ex machina)이 될 수 없다. 목자에게 필요한 소양은 이성과 합의, 소통과 경청이다. 그러한 바탕에 서 있는 목자라야 군림, 독재, 독선, 위선이 아닌 섬김과 배려의 참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 “거짓 목자는 다스리는 자요, 지배하는 자요, 사람을 폭력을 써서 몰아치는 자지만, 참 목자는 가르쳐주는 자요, 같이 짐을 져주는 자요, 받들어 섬기는 자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하는 자다”(함석헌, 위의 책, 144쪽). 가시적 혹은 비가시적 정치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독단에 치우친 목자는 백성의 짐을 지고 가는 듯하지만 실상은 백성의 눈을 가리고 짐을 지게 하는 사람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실체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두터운 장막 뒤에 감추어진 진짜 실체를 모르는 미욱하고 연약한 백성은 보이는 것만이 참이라 믿으면서도 왠지 모를 불안을 느낀다. 그럼에도 정치 경제적 모험이나 실험을 모르는 백성들의 소박함은 형이상학적 가치나 이상도 중요하지만 국가가 계도와 계몽을 통해서 자신들의 짐을 나누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목자는 자신의 말과 문자 속 약속들의 위선과 거짓을 참으로 세우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세상을 밝게 만들려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한다. 약한 국민일수록 그렇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가물거리는 등잔도 끄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다... 마음이 맑으면 맑은 것을 뵈고 마음이 흐리면 흐린 것이 뵌다. 그렇건만 생각 없는 마음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모른다...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함석헌, 위의 책, 146쪽, 148쪽). 목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전체를 조망하고 영원을 바라볼 수 있는 진정성과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백성을 위한 마음이 없다는 것은 결국 생각 없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음과 생각을 다듬고 자신의 왜곡된 흔적은 지우고, 약속한 흔적들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는 목자가 백성들로 하여금 축제의 춤을 추게 할 것이다. 백성들 또한 과거의 감상적 정치의 화신을 지금의 목자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거짓 목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경험적 인격자라면 그러한 정치적 상징과 정치적 존재자에게 순종의 파토스를 드러낼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정치적 오류라면 오류요, 정치적 오염이라면 오염이다. 백성 스스로의 정치적 무의지와 무능력을 거기서 드러내고자 하는가? “오늘의 인류는 스스로 문명인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보기 싫고 듣기 싫은 더러운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은 소위 목자라는 소리다. 물건이 더러우면 사람의 몸을 더럽힐 수 있고 일이 더러우면 몇 사람을 상처 낼 수가 있으나 소위 목자라 하는 것이 잘못되면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까지, 일부분의 사람만 아니라 나라나 인류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거짓 목자의 시대다. 스스로 문명이라 자랑하느니만큼 그만큼 도리어 어둠이요 야만적이다. 그러므로 현대를 건지는 길의 중요한 하나는 우리 속에 품은 목자의 모습을 밝히는 일이다. 요새를 오염의 시대다 공해의 시대다 하지만 오염 중에서도 가장 더러운 오염은 그 그리는 목자의 모습으로 인해 되는 오염이다”(함석헌, 위의 책, 139-140쪽). 정치 없는 백성은 있을 수 있지만, 백성 없는 정치는 있을 수 없다. 노자(老子)는 배부르고 등 따뜻해도(鼓腹擊壤) 군주가 누구인지 모르게 하는 정치를, 맹자(孟子)는 정치 행위의 근본에 백성을 두는 민본정치(民本政治)를 외쳤다. 고금을 막론하고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정치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백성에 대한 정치적 불감증에 걸리다 못해 잔인한 정치적 축제를 즐기는 목자와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백성을 위한 성스러운 흔적은 정말 비어 있는(vacuus) 것일까?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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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떠나서는 어디에도 정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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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미화 비판과 비폭력적인 평화
- 비폭력적 평화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행복은 꿈꿀 수도 없다. ▲ 어떤 명분을 댄다고 하더라도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악이다. 전쟁은 또 하나의 정치 형태라는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와 같은 논리를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댄다고 하더라도 평화를 유린하고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전쟁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전쟁으로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인권을 빼앗고 목숨까지 앗아가는 것은 합리화가 전혀 불가능한 죄악이다. 따라서 전쟁은 메모리얼(memorial), 즉 기념이나 기억이 될 수 없다. 비록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기에 오늘에 되새기고 반드시 그와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않도록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메모리얼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극복하지 못하는 반복적인 트라우마나 폭력 콤플렉스를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더군다나 전쟁이 일어난 것도, 폭력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지속적으로 되새김질하여 그 아픈 상흔을 건드리면서 전쟁 경험자와 비경험자 사이의 간극을 심화시키는 일은 건강한 정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전쟁 후 스트레스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이고, 그것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와 같은 일에 지극히 안일한 태도를 갖고 있다는 냉엄한 채찍질이나 혹독한 꾸지람과도 같은 것이기에 동일한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이념적 체계라도 완벽하거나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념으로 인한 뼈아픈 상처와 고통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 이념은 악이다. 정치는 이념의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파고들어서 편을 가르고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선악의 기준과 정의를 제멋대로 떡 주무르듯 한다. 정전 협정을 체결한 지 수십 년이 지났건만 전쟁에 대한 메모리얼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메모리얼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강요되는 선전을 학습하게 된다. 전쟁을 미화하고 참전자를 전쟁영웅으로 추켜세우는 국가적 행사는 도를 넘어선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애국심이나 국방에 흠집을 내는 비국민(?)으로 낙인이 찍힌다. 로빈 마이어스(Robin R. Meyers) 목사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전쟁을 미화하고 군인들을 신성한 존재로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미디어 산업은 어디에서나 인기가 있다... 예수님의 처음 따르미들과는 달리, 오늘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곧바로 우리의 “제복을 입은 용감한 젊은이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들은 참된 양심적인 반대자들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군인들에게) 감사할 줄 모르며 비애국적인 존재들로 간주된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74쪽) 따라서 이제는 비폭력적인 평화가 바로 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그냥 평화가 아니라, 비폭력적 평화다. 로빈 마이어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것이 종교적 정신, 즉 그리스도교적인 정신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폭력은 기독교인들을 위한 선택사항이 아니다. 비폭력은 본질에 속한다. ....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체제변혁적인 것처럼, 그 특성은 미래의 교회를 위해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본질이다.”(Robin R. Meyers, 김준우 옮김, 언더그라운드 교회, 한국기독교연구소, 2013, 181쪽) 비폭력이 예수의 정신이었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적 근간이었다는 사실만으로 비폭력적 평화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며, 전쟁에 대해서 응징으로 맞서지 않고, 테러에 대해서 보복으로 맞서지 않는 소극적(동태적) 평화에서 아예 상대를 끌어안는 적극적인 평화가 필요하다. 지금의 평화정책은 사실 평화정치의 구현이 아니라, 내가 의도하는 노선과 정치, 전략을 용인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면 반평화적 축으로 단정 짓는 것이다. 함석헌은 상대의 양심을 일깨워서 무기를 내려놓고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비폭력의 비결이라고 말한다(함석헌, 함석헌 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25쪽). 모두가 평화로운 세계가 되려면 무기를 내려놓고, 인권을 짓밟는 행위를 멈추고,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 나아가 보다 더 근원적으로 그런 감정과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타자의 내면으로 들어가 ‘아니오’(안 돼)라고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평화주의자라면 자기희생은 본래부터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싸우는 것은 저쪽을, 사회의 약한 것들은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저들이 나의 이웃이기 때문에, 우리와 한 몸을 이루는 한 지체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어리석은 자라도 버려서는 아니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는 싸움입니다. 사랑의 싸움이기 때문에 첫 번에 잘못하면 그 잘못한 것을 말해줘야 하지요. 안 들으면 들을 때까지 해야지요. 죽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죽인다면,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죽이는 내가 먼저 죽어버립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88-89쪽) 평화는 ‘자기희생’이 뒤따른다. 폭력, 전쟁, 테러, 비난 앞에 저항하는 개별적 존재의 자발적 희생 없이 평화가 구현되지 않는다. 그 희생이란 궁극에는 죽음일 수도 있다. 자기의 죽음으로 평화를 구현한 예수의 희생처럼, 우리도 폭력, 전쟁, 테러에 대한 잘못을 말하고 또 말하면서 사랑의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 언어와 행위로 인해 타자의 양심을 깨운다면 “전체를 건지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함석헌, 위의 책, 89쪽)이라는 함석헌의 말처럼, 나도 타자도 함께 살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궁극의 평화는 어느 개인만의, 어느 한 나라만의 평화가 아니라 전체의 평화, 전체의 자유, 전체의 사랑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평화 때문에 전쟁을 하는 것이라는 명분은 용납될 수가 없다. 최소한 침략에 의한 방어 목적의 전쟁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전쟁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평화가 될 수가 없다. 반면에 평화는 살림이다. 평화는 생명이다. 그런데 평화를 강조해야 할 시기에 전쟁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역설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서 전쟁을 미화해서 정치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쟁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아니 그들의 이성과 육체는 남용, 오용, 사용되었다. 뜻 없이 백성들만 고통과 죽음을 겪었다. 이제는 평화를 위해서 저마다의 희생을 해야 한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전쟁은 나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내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피할 수도, 도망을 칠 수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쟁은 곧 나의 선택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나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선택할 수가 있다. 나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수가 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나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폭력적 전쟁이냐, 비폭력적 평화냐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언어이자 자유요, 결단이자 이성이다. 비폭력적 평화, 그것은 결코 추상적 현실이 아니다. 그로인해 앞으로 국가의 평화, 녹색의 평화, 종교의 평화가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폭력적 평화가 확보되지 못한다면 인간의 자유와 미래,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바람직한 삶의 행복은 꿈꿀 수도 없다. 비폭력적 평화를 지켜내지 못한다면 인류는 영원히 동물적 본능의 투쟁과 다툼, 그리고 싸움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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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미화 비판과 비폭력적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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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없는 사랑을 하는 인간
- 다함은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실천들, 즉 교리나 신념(신앙), 혹은 이론보다 우위에 있는 인류 보편적인 실천에서 나타난다. ▲ 다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괸다는 것,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에서 온 몸, 온 맘, 온 정성을 다해서 신을 섬기고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 근거 혹은 초월자를 향해서 다함이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리라. ‘다하다’는 것은 곧 완성했다, 성취했다, 끝인 그것으로서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인데, 그야말로 전적투신이다. 성서는 그렇게 말한다. 마음, 정성, 힘(마음, 목숨, 뜻; heart, soul, mind; kardia, psyche, dianoia)을 다하여 섬기라고(신명 6,5; 마태 22, 37). 그만큼 전심전력, 전력투구하여 실재(Reality)를 섬기라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했으니까 수년 동안 철저히 해봐야 돼. 철저히. 좌우간 내 있는 힘까지 다해야 돼. 그래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몸을 다해서 해봐라. 그 ‘다’라는 말이 무서운 말이에요. 건성으로 다다, “하나님 아버지, 간절히 빕니다. 우리 몸과 맘을 다해서 드린 기돕니다.” 천만에! 나는 그런 기도는 못해요. 다가 어디? 다란 끝이 없어요. 맹자도 진기심자(盡己心者)는 지기성(知其性)이라, 제 마음을 다한 사람은 바탕을 안다, 지기성(知其性)이면 지천(知天)이라, 제 성품을 알면 하늘도 안다고 그랬어. 그런 거 다 굉장히 어려운 밑천이 먹은 거, 체험한 거예요. 그러니 그 진짜가 어떤 거냐? ‘다한다’는 게 어떤 거냐?... 네 속에서 네 혁명이나 어서, 네가 새 사람이 되도록 어서, 그럭하면 아마 이 민족이 살 길이 있겠지”(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48-49쪽). 함석헌은 애초에 이것이 매우 어렵다고 시인한다. 그러면서 ‘다한다’는 것을 인간 안에서의 혁명, 인간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방향을 일러준다. 다한다고 하는데 다한다는 것은 결국 각 개인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혁명,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근본적 열정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다한다’(enden, leisten, sorgen)는 것은 마음의 혁명, 새 인간의 혁명 아니고서는 안 된다. 존재근거를 발견하고, 그 존재를 자신의 삶에 전부로서 인식하고, 삶으로 체현(embody)하는 것은 설렁설렁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서 근본적인 마음이 하늘의 명령으로 불일 듯 거듭나지 않고는 절대 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함이 있는 존재라고, 다하고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에 대한 표본을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 Rahner)의 말대로,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이고, 사람들은 ‘되어 가는 그리스도’다.”(길희성, 길은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휴, 2013, 135쪽). 그리스도는 ‘다 된 인간’이다. 다시 말해서 다함으로서 다 된 인간이다.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다함으로써 자신을 봉헌한 것이 인간으로서의 완성, 다 됨, 완전히 됨, 온전한 됨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인간은 그저 ‘다’(완성)를 향해 되어 가는 인간이다. 완전한 존재(be)로서 초월적 실재에게 다가서고(coming) 있는 중이다. 이렇게 완전한 존재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성인은 완전한 존재 가능이다. 완전한 존재는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라면,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다함이 있는 존재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들이 성인이기 때문에 그들은 완전한 존재 가능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의 세계에서 말하는 참나란 우연적 산물인 개인의 특성이나 재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참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타고난 본연의 인간성 자체다... 성인(聖人)이란 곧 참사람을 일컫기 때문이다... 성인은 별다른 존재가 아니라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다. 인간의 인간성을 제대로 자각하고 실현한 존재다”(길희성, 위의 책, 39, 134쪽). ‘가장 인간다운 인간’, ‘인간의 인간성을 자각한 존재’, ‘참사람’은 초월적 실재에 대해서 다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표상이다. 다함은 자신의 내적인 마음의 혁명을 이루어 참나를 깨달은 새로운 인간의 행위이다. 그렇다면 그 다함의 궁극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독과 침묵이다. 자신의 내면적인 고독과 침묵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은 인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월적 실재가 들어설 시공간을 주기 위함이다. 다함의 행위는 나를 위한 행위는 없고 오직 초월적 실재를 위한 삶만이 있기 때문에 고독과 침묵은 영성의 필연이다. “영성과 고독이 함께 간다면 영성과 침묵도 떼려야 떼기 어려운 짝을 이룬다... 고독과 침묵은 같이 가며 자발적 고독은 자발적 침묵을 위함이다... 생각은 홀로 하는 말이고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은 생각마저 멈추는 무념의 경지까지 나아가야 한다”(길희성, 위의 책, 195쪽). 생각을 멈춰야 초월적 실재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 실재는 생각이나 사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생각하면 할수록 실재에 대한 깨달음에는 방해가 된다. 따라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생각한다가 맞을 것이다. 생각은 자신에게서 피어나는 깨달음이어야 하는데, 자칫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을 함으로써 편견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함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해보면 다함이 되기 위해서 나의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 단지 생각의 흐름을 관찰하고 종국에는 생각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초월자의 뜻, 초월자의 마음, 초월자의 사랑으로 일념이 되어야, 무념의 상태에서 다함이 가능하다. 그래서 고독과 침묵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고독과 침묵은 자기 심연(실재)과의 대면을 가능케 하고 초월적 실재가 머무는 장소(locus)를 확보할 여지를 준다. 말하고 또 말하는 데 익숙하고 이제는 그 말 안 함이 오히려 병리(질병)가 되어 버리는 사회에서 고독과 침묵은 단순히 치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인생에서도 다하고 더 나아가서 완전한 존재, 초월적 존재에게도 다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이 다함의 구체적 삶의 형태 혹은 신앙 형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정의, 평화, 사랑, 자연 등으로 나타난다. 길희성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다원주의자들 가운데는 이론이나 사상의 차원보다는 실천의 차원에서 다원주의론을 펴는 사람도 있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에 따르면, 종교의 궁극적 일치는 어떤 종교적 경험이나 교리, 사상 또는 궁극적 실재에서보다는 정의와 사랑 같은 실천적 차원에서 찾는다... 정의, 평화, 사랑, 자유, 해방, 자연, 인간의 복리라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구원의 이상 앞에서 과거나 현재 존재하는 종교는 모두 불완전하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보다 사랑의 우선성을 주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사랑이 진리다”(길희성, 위의 책, 177-180쪽). 다함은 모든 종교를 뛰어 넘는 실천들, 즉 교리나 신념(신앙), 혹은 이론보다 우위에 있는 인류 보편적인 실천에서 나타난다. 실재에 대해서 다함은 실재 안에서 포괄하고 있는 진리, 곧 사랑이 전부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다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 괸다는 것,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교설, 교리, 신학도 필요하지 않다. 다함. 그 끝을 보았는가? 그 끝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사랑하라!’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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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없는 사랑을 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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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존재의 삶과 바르게 사는 인간
- 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적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종래에는 자기의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지 않는 정치는 없을 것이고, 역으로 정치 없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말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말을 잘못 사용하면 오해와 갈등, 세계 이해의 불가능성, 상호 소통 불가능성 등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언어가 갖고 있는 불확정성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말 혹은 언어란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면서 인간의 사유를 형성하고 삶을 창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이규호, 말의 힘, 좋은 날, 1998, 58-60쪽) 이러한 언어철학적 의미에서 본다면, 정치적 상황에서 말이라는 것은 맥락과 소통이 중요한데, 정부나 정치가들이 하는 말을 유심히 살펴보면 전혀 맥락과 맞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다. 맥락과 맞지 않는다는 말은 소통이 안 된다는 말도 된다. 말(기표)은 퍼뜨리되 의미(기의)는 헷갈리고 조작되는 말들을 자꾸 발언한다. 말은 적게 하되 국민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따금 복지, 행복, 국정원, NLL, 종북, 역사의식 등 정부가 쏟아내는 말들은 말의 파시즘, 즉 언어의 전체주의화, 과거 정권으로의 회귀를 연상하는 것들이다. 이 사회는 행복하지 않으면 불행하다는 이상한 논리에 빠져서 대부분의 책, 강연, 강의 등이 행복과 연관이 되지 않으면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말의 파시즘, 정서의 파시즘, 과거 정부가 이루지 못한 미완의 파시즘을 완성하려고 하는 것일까? 복지라는 것도 그렇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지가 단순히 물질적 복지만을 말하는 것이 분명히 아닌데도, 우리는 물질적 복지의 양을 늘리면 그것이 곧 복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민주주의는 국민 혹은 민중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에 균형을 맞춘다는 것쯤은 상식이다. 최장집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필자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민중(people)의 광범한 정치참여에 의한 공적 결정과 그 결정을 집행하는, 일련의 규칙 또는 제도를 가지며, 이를 통하여 그것은 정치의 영역에서 민중의 권력으로 표현되고 사회의 영역에서 민중의 물질적, 문화적, 정신적 삶의 질적 고양이 담보되는 정치적 체계를 말한다.”(최장집,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한길사, 1993, 4쪽)따라서 민주주의의 복지는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르프(R. Dahrendorf)가 말하는 정치적 참여와 과정, 정치적 기회와 통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사회적 시민권에서 물질적 급부(provisions)만 강조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물질적 급부를 통해서 복지와 사회보장을 확대하면 사회적 시민권이 확대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측정 가능한 양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느냐에 있다기보다 정치적 삶의 측면에서 질적인 삶, 즉 ‘도덕적 자율성과 평등의식에서 기초한 삶’을 사느냐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24, 168-169쪽)그렇다면 그 질적인 삶의 척도와 근본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잘 살아보자는 것, 소위 잘 산다는 얘기 하는 것 그게 지배적인 관념인 되는 건, 그건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그리고 또 선진국에서 하는 일이지만, 그게 무조건 좋은 얘기인 줄로만 알지만은 않아야 돼. 그런데 국가에서 썩 잘 애용하는 표어, 곧잘 내세운다는 것이 “우린 복지국가 건설한다.” 난 그 복지국가란 소리 아주 듣기 싫어. 새벽이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하는 요놈의 소리가 참 듣기 싫어. 얼마나 잘 살아보겠다고 그래. 그거 얼마나 지독한 사람들이야. “바로 살아보세, 바로 살아보세”하고 가르친다면 잘 살 수 있지만,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하면 다 나쁜 놈 되고 만다 그 말이야. 잘 살기 위해서는 무소불위(無所不爲)예요. 못할 게 없어요. 잘 살기 위해선...... 그래 ‘잘’이란 좋은 의미로도 쓰이지만 나쁜 의미로도 쓰이는 거야. 그런데 그것이 아주 우리의 인생관이 돼가지고, 정부가 그걸로 일부러 고치려고 하고 있어. 서양 선진국이란 것도 역시 그런, 사회 복지라는 것, 그것만 강조해. 옛날에는 그렇지 않아요. 사람으로서 도리에 이르느냐, 아니냐.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74-75쪽)복지(wellbeing/welfare)라고 하는 것은 잘(well) 먹는 것(fare)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는 삶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다. 영어 단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being)의 문제다. 자꾸 많이, 좋은 것을 소유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가지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함석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것인가 하는 존재의 문제가 곧 복지의 본래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최장집이 염려하는 목소리를 좀 더 들어보자.“인간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한 사회의 문화적·사회적·사회경제적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위해서 개인과 사회가 동원되고 한 사회의 개인적·집단적 가치가 규정되며 그 비중에 따라 가치의 위계 구조가 만들어지는 상황이 도래했다. 인간의 가치, 민주주의의 가치, 환경의 가치, 평화의 가치가 경제 성장의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는 수단-목적의 전치 현상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해 있다.”(최장집, 민중에서 시민으로, 돌베개, 2009, 142쪽)정치의 가치 전도 현상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 인간이 정치사회적 존재라면 응당 추구해야 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인 인간이 사회적 삶을 살아가면서 가장 우선으로 두어야 하는 가치가 또 다시 “잘”이라는 근대의 경제성장으로의 회귀 속에 매몰되어 “바르게”라는 삶의 가치를 도외시한다면 정치의 본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인간 혹은 민중, 시민의 자기 권리마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민중의 정치적 행위, 정치적 삶은 국가로부터의 어떤 혜택을 받는 수혜 대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의 존재로서 바르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와 연관하여 국가는 일정한 정치적 언어로 과거 미완의 파시즘을 선전하고 선동하는 것을 멈추고 국민들에게 바르게 살도록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야 할 책무가 있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잘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그것을 국민에게 말할 수 있고 강조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함석헌이 말했던 주장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시대에도 울림이 있는 것은 그의 예언자적 외침이 잘 들어맞기 때문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의 사유가, 우리의 정치적 의식과 삶이 너무나 진부해서이지 않을까?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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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존재의 삶과 바르게 사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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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의 발화와 종교인의 이성적 신앙
- 이성을 계발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에로, 초월자에게로 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을 무신앙이나 비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인간의 믿음은 초월자의 언어를 깨닫고, 그 언어를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성서는 초월자의 언어로 되어 있는 일종의 암호와도 같다. 그것은 풀어 밝혀야 이해될 수 있는 언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초월자의 언어를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한 인식과 행위의 기능으로써 작용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자의 언어 자체와 초월자의 언어로부터 유출(emanation)되는 것 사이의 구분, 즉 무시간적인 영원성이냐 아니면 시간적 유한성이냐를 식별하는 일이다. 인간의 믿음은 초월자의 언어를 깨닫고, 그 언어를 자신의 삶의 근간으로 삼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지만 그 언어가 초월자 자체인지 아니면 초월자로부터 유출된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인은 강론자(설교자)로부터 발화(發話, utterance)된 언어 혹은 해석된 언어를 초월자의 말(logos)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서를 초월자의 것, 초월자에게 속해 있는 것으로 보는 것과 초월자의 언어가 시간적인 유한 세계에 들어와 가변적 형태의 언어가 되는 것의 차이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은 신앙에 있어서도 이성을 통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그저 성경에서 그랬다고, 그래서 무조건 받아들이는 걸로 하면 정성은 있는 것 같은데 이해 못해요. 그러니까 믿기도 해야 하지만 이해가 있어야 해요. 우리 이성으로 “아, 그렇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인간이란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라야 깊이 내 속에 들어와 내 의지가 움직이고 실행에까지 힘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치 모르고 그저 믿으라니까 믿는 거 좋지 않아요... 내게 이롭다니까 그러는 거지 도덕적으로 수긍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인 다음에는 그 점을 인간의 일을 따져야 해요... 결코 인간 이성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게 아니라 그 말이에요. 인간 이성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있어요. 아주 이치에 맞지 않고 되는 대로, 그런 게 아니에요.”(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19쪽)함석헌은 성서 혹은 해석되어진 언어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신앙인식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성서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을 수용·수긍·긍정·실천이라는 신앙적 태도, 다시 말하면 신앙의 실천이성적 행위, 혹은 도덕적 행위로 나갈 때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함석헌은 믿음을 인식(이해)과 실천(도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신앙에 이성이 요청된다고 하는 것은 초월자의 발화를 바로 신앙화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냐 아니면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실천적 행위로까지 끌고 갈 것이냐를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월자는 비상식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신앙적인 공통감각에 호소하여 모두가 그렇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어떤 신앙형식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이지 않다면 초월자도 상식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함석헌이 우리 자신의 이성을 잘 이해하면 초월자가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이러한 의미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인간이성의 성숙성과 건전성이다. 건강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이성이 상식적이라 말할 수 없고 보편적이라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초월자의 발화가 설득력이 있으려면 그 발화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의 이성이 성숙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행위가 상식이 될 수 있고 그 속에서 초월자의 발화 행위를 볼 수 있다. 발화 행위가 지각된다는 것은 곧 지각된 존재의 개현(開顯) 가능성과 더불어 그 개현으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자기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래서 초월자의 발화에 대한 인식은 인간 가능성의 인식이라 말할 수 있다. 상식(common sense)이란 인간과 그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갖춰야 할 공통적 의미, 공통적인 감성, 공동체적인 감각이며 보편성, 평균성의 잣대와도 같다. 인간 가능성이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초월자의 발화를 이성과 도덕으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이성과 도덕을 보면 초월자의 일하심, 초월자의 나타남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자의 발화, 즉 성서가 참의 실재인가 아니면 거짓의 가상인가, 존재인가 비존재인가를 판별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이성과 도덕으로도 전자임이 여실히 입명되는 것이다. 성서는 초월자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드러내 보임인데, 이것은 초월자의 발화를 이해할 수 없다면 드러내 보임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발화의 무의미함은 결국 무조건적 수용이나 무조건적 긍정이나 다름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발화 주체나 발화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몽매함이 발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성은 인식능력을 통하여 발화 주체와 발화의 이해를 필연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이성을 거부하고 멀리하는 것은 발화 주체와 발화, 즉 초월자와 초월자의 언어를 파악할 가능성을 저버리는 것이다. 발화 주체와 발화가 초월자의 의미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는 이성의 이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성은 쉼 없는 질문 가운데 초월자와 초월자의 발화와 마주서있다. 이 선험적 이성은 초월자 그 자체를 사유하고 신앙적 실천과 도덕적 실천의 가능성을 위해 발화에 대해서 이해하고 동시에 진리를 통일하고 비진리를 구별·분리한다. 또한 이성의 능력을 간파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는 종교 공동체일수록 초월자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더욱더 잘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고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성을 계발하고 그것을 통해서 신앙에로, 초월자에게로 향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을 무신앙이나 비신앙으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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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자의 발화와 종교인의 이성적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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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신앙을 통해 길을 묻다
- 지난 4일 장마철에 들어선 날씨로 비가 오락가락 하는 가운데 분당한신교회(담임목사 이윤재)에서는 이중표 목사 8주기 추모예배와 제3회 별세포럼이 열렸다. 한국기독교 선교 130주년을 한 해 앞둔 7월의 문턱에서 한국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행사이다. 참석자들은 이중표 목사를 그리는 마음들로 가득했다. 인간적인 아쉬움이나 연민이 아니라, 이중표 목사의 신앙과 지도자로서의 인격에 대한 시대적 필요가 더욱더 절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중표 목사는 세상에 없다. 세상과의 이별을 고한지 8년째가 되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생사의 이별에서도 세월은 그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어준다. 이중표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8년이 되었음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가 더욱더 생생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인가.‘최학휴 목사(광주양림교회)의 사회, 조영식 목사(김포한신교회)의 기도, 박진구 목사(전주안디옥교회)의 설교(별세의 소원), 이윤재 목사(분당한신교회)의 추모사, 별세목회원의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손창완 목사(군산세광교회)의 광고, 차창현 목사(부곡교회)의 축도’로 이루어진 추모예배에서의 모든 순서마다 이중표 목사가 외친 별세신앙의 메시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박진구 목사의 설교를 통해 바라본 이중표 목사의 별세영성은 참석자들의 마음에 젖어들었다. “별세의 신앙은 사후의 세계가 아니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하늘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칙과 뜻을 따라 사는 복된 것이다. 이런 신앙은 결코 쓰러지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추모사를 하는 이윤재 목사는 누구보다도 그리움이 역력한 모습으로 이중표 목사를 회상하며 별세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이중표 목사님의 8주기를 맞이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분의 영성을 더욱더 올바르게 이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이중표 목사님의 자리를 이어간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지만, 별세는 구호가 아니라 삶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추모예배에 이어서 김종균 목사(별세목회연구원)의 사회로 “죽어라! 그리하면 내가 살고 공동체가 산다”라는 윤성민 박사(분당한신교회, 별세목회연구원)의 발제와 이강석 박사(선교사)의 논찬, 송문식 목사(고삼교회)의 마침기도로 모든 순서가 끝났다.발제의 제목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독의 진리는 죽음과 희생을 통한 새로운 생명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인 것이다. 발제자 윤성민 박사는 이중표 목사의 생전에 분당한신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이중표 목사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다. 윤 박사는 이중표 목사의 권유와 도움으로 독일에서 유학을 하게 되었다. 윤 박사의 감회는 별세(別世)영성에 대한 연구와 실천적 확산에 대한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한 해결의 모색에서도 별세(別世)영성을 통해 그 답을 찾고자 하였다. 내외적 모든 문제는 결국 ‘자신이 죽지 않음’에서 찾고 있다. ‘자신이 죽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이다.윤 박사는 이것이 별세신앙을 외쳤던 이중표 목사의 영성이었으며, 바울, 마르틴 루터 등으로 이어진 교회사적 개혁신앙의 영성이기도 함을 강조한다. 논찬에 나선 이강석 박사는 윤 박사의 발제가 이중표 목사의 별세영성에 대해 개인적 별세와 별세의 교회론이라는 두 가지에서 조감하고 있음을 의미 있게 바라보면서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다. 발제에 대한 이 박사의 논찬은 이중표 목사의 별세신앙이 별세한지 8년이 지난 지금, 더욱더 생생하게 살아 있음에 주목하였다. 발제와 논찬은 이중표 목사가 개인적 별세신앙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로 설명했음을 상기시켰다. 첫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이라는 ‘떠남의 신앙’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옛사람에서 그리스도에게로의 떠남이라는 것이다.둘째는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새 삶의 신앙’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떠난 삶은 이미 이전의 삶과 결별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세 번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살림의 신앙’이다. 나만의 구원과 새로운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고 세상을 향하여 구원의 도를 전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별세의 교회론이라는 차원에서 발제자는 “기독교적 에고이즘”과 “교회공동체의 육(肉)”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크리스토프 블름하르트의 지적을 통해 한국교회의 위기를 조명하고 있다. 중세 카톨릭교회에 대해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개신교가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카톨릭교회적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잘 알려진 유명교회나 교단에서의 불법, 탈법이 매스컴에 그대로 노출되는 모습은 어떤 말로도 합리화하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해 있다. 개 교회적으로는 묻지마식 교인 받기 행태가 보편화 되어버렸다. 어느 보험광고 문구처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다. 무조건 받아 준다’는 것이 교회에서 새신자를 환영하는 논리이다. 물론 타 지역에서의 이사나 불가피한 이동의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라도 전후 사정과 맥락을 잘 살피며 올바른 신앙성장을 돕는 차원에서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상도의에도 못 미치는 교인 뺏기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상업 체인화적 시스템이며,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의 교회 물려주기 등도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이것은 한국교회가 마치 경영자연합회나 노동자연합회처럼 이익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골로새서 2장 8절에는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의 방법과 학문을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님을 바울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윤 박사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타락을 통해 한국교회를 조명해볼 때, 오늘 한국교회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별세신앙의 자세를 갖자고 호소한다. 윤 박사는 이중표 목사는 개인의 별세뿐만이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별세도 중요시하였음을 상기하고 별세영성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돌아가자고 힘주어 말했다.제3회 별세포럼을 마치고 교회당입구를 나서는 길에, 거지(巨智) 이중표 목사와 별세신앙을 생각하노라니, 이슬처럼 얼굴에 부딪히는 가랑비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세상과 나는 간 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는 추모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양이 가슴과 귓전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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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 거룩은 단지 종교 공동체에서 필요할 때만 읊조리는무의미한 형식 언어가 돼버린 지 오래다. ▲ 무릇 거룩과 멀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 앞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수 그것 자체’가 아닌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종교가 예사롭지 않다. 종교의 성직 지망자가 어느 종단에서는 모자라고, 또 다른 종단에서는 넘치는 기이한 현상, 수도자의 수급 위기, WCC 개최 문제를 놓고 ‘용공좌경이니, 동성애 옹호 집단이니’ 하면서 흠집 내기에 바쁜 보수 종교단체의 행태, 성직자의 성추문과 금전 문제로 인한 구속 등, 종교나 종교 성직자의 본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리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함석헌의 해법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유일의 조건은 ‘거룩’이다. 저가 거룩한 고로 저에게 가는 자는 거룩할 수밖에 없다. 저는 반드시 많은 선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남김없이 찢어서 거룩히 구별한 심장을 원한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보는 것, 하나님만이 있는 곳을 거룩한 곳이라 한다. 저 이외의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심판의 자리에서 신생하는 자의 유일의 길은 스스로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바치는 데 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04쪽)거룩은 오직 초월자만 생각하고 초월자에게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는 그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초월자를 빙자해서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좇고, 초월을 핑계 삼아 성욕과 물욕을 채우려 하고 있을 뿐이다. 초월자에게는 접근 불가한 것들을 섬기고 숭배하는 행위가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종교의 뒷골목 현실에서 거룩이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신자를 얽어매기 위한 허울 좋은 종교 언어, 강압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초월자의 거룩함은 신자의 거룩함으로 통한다. 흠잡을 데 없이 온전한 상태의 삶을 추구하라는 당위명령, 정언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수행적 언어를 퇴색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삶이 치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거룩한 삶이란 신앙 인식, 신앙 의식의 철저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 물질문명은 우리의 의식을 느슨하게 하다못해 타협하게 만든다. 실존의 절박함이 사라진 것이다. 실존의 자기 책임적 삶을 살아내고자 초월자에게 바짝 밀착된 우리의 신앙 행위는 그럴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흠집이 조금 난다고 무슨 대수랴. 거룩은 단지 종교 공동체에서 필요할 때만 읊조리는 무의미한 형식 언어가 돼버린 지 오래다. 더 이상 종교의 거룩으로 적어도 윤리와 도덕을 재단하던 시대는 지나가버렸다.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시대는 초월자마저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히 얽어매고 꽉 조여진 문명과 정보, 물질의 풍요, 과잉 건강과 여가는 거룩으로 방향 잡는 것을 가만두지 않는다. 이제는 선택의 자율성, 혹은 선택의 의지에서 ‘인간의 자유’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이것과 저것의 기로에서 인간의 자유로움을 저해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생각과 실천의 방향성이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거룩은 초월자의 온전함이자 자신의 순수 자유이다. 거룩에는 타율성이 섞일 수 없다. 그것은 자유 그 자체이며, 동시에 그 누구도 원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바로 그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의 상태이다. 그것이 타율이거나 그것이 아니라도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이어도 선택할 수 있다면 거룩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신의 속성도 될 수 없을뿐더러 신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룩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것 자체를 선택해서 살아야 할 자유이고, 그럼으로써 삶의 의미 단계가 한층 높아지는 신적 행복, 초월적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 확신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서 이루어진 신자의 마땅한 도리와 인간의 자부심을 갖고 사는 체험적 결과로서 주어진다. 거룩과 관련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성직자의 자격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함석헌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선지자의 사명은 생존하사 변함없는 우주적 권위로써 명한 것이므로 변하는 길이 없었다... 목사 중에는 영혼보다 ‘떡’을 위해 더 염려하는 이가 자못 많다. 그가 직업적 목사일지언정 참 신도의 영혼을 인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아니었다. 선지자에도 허다한 가짜 선지자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명하신 것이 아니요 자기면허 혹은 학교의 면허였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을 그들의 입에 넣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두려워 말고 외치라 11, 한길사, 1984, 319-320쪽)함석헌은 모름지기 성직자란 인간에 의해서 주어지는 면허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초월자에 의해서 부여되는 자격이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거룩한 삶, 종교적 삶의 근본적 태도와 본래성이 무너진 데에는 이 상식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이 포화상태가 된다거나, 역으로 수도자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생각이 개입된 판단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리라. 또 생각! 생각이다! 성직자의 삶이나 수도자의 삶이 신의 부르심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불편하고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순수 자유 그 자체로 접어들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성직 면허는 신의 부르심이 아닌 제도와 편리와 행정과 물질이라는 묘한 역학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거룩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불결, 부정, 오염일 뿐이다. 성직자 자신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룩함, 즉 온전함과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순수한 그것’, ‘자유 그 자체’를 선택할 때 가능한 일이다. 여기에 ‘바로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들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넘어서 그 자체 순수한 그것을 선택할 때 성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모든 것들을 놓아두고 오직 초월자만을 바라보고, 초월자만을 알기를 원하는 일념을 갖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올곧은 성직자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거룩과 멀어지는 삶을 산다는 것은 성직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어떤 사람이라도 초월자 앞에 ‘있는 그대로’가 아닌, ‘순수 그것 자체’가 아닌 삶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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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不淨)한 것은 거룩의 선택을 빼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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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의 기호(sign)와 자기 테크놀로지
- “삶은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수용자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상식적인 견해와 모자라는 지혜, 뒤떨어진 정보의 뒤범벅뿐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언어는 비유적(figurative)이다. 언어는 고유의 의미, 본질에 이르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이자 청자인 우리들은 이를 자꾸만 잊어버린다.” ▲ 원자력과 기호 언어학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로 구성되어 있다. 전자는 언어의 규칙이요, 후자는 언어의 행위이다. 개인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의 랑그는 다시 기표(시니피앙, signifiant)와 기의(시니피에, signifie)로 나눈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text)란 콘텍스트(context)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는 콘텍스트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미꽃이라는 기표는 사랑, 화해, 축하, 감사 등 그 기의가 무한히 확장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기호는 발신자보다 수신자의 콘텍스트 속에서 신뢰를 얻는다. “소쉬르의 기호학이 산출한 결과는... 우선 기호는 실체가 아니라 두 가지 차이군의 상관관계라는 것이다(곳치히). 그것은 인식의 표시기이며 표현이자 기표라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서 그 문화의 내용들의 항목들(기의, 그 내용의 형식)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그 결과 약호의 이론과 기호생산 이론이 나온다. 즉 의미화작용 체계의 이론,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이론, 심지어 대중조작 장치의 이론까지 등장하게 된다(에코). 여기에 빠진 것은 언어 그 자체가 순수한 기호가 아니라는 점, 즉 언어 역시 하나의 사물이라는 점이다. 언어는 음성, 즉 물질성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은 부분적으로 대상(object)이며 부분적으로는 기호이다.”(Marshall Blonsky, “개설: 기호학의 고민, 기호학의 재평가”, Marshall Blonsky 엮음, 곽동훈 옮김, 베일 벗기기, 시각과 언어, 1995, 24)마찬가지로 ‘원자력’이라는 언어적 개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공포와 두려움, 고통과 죽음이라는 기의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원자력이 아무리 우리의 과학기술과 문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하나 단순히 기표가 주는 이기(利器)만 좇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정부는 끊임없는 원자력에 대한 긍정적 기호를 발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기호가 품고 있는 기의의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호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기호 자체에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의사소통이 결여되어 있다면 미래를 향한 스펙터클(spectacle)한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한들 그 의미와 가치는 소용이 없을 것이다. 특히 원자력이란 핵이라는 기표적 성격을 더불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가 가진 폭력성과 의존성(편리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원자력이라는 기표는 마치 전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자연적 메시지(natural message)인 양 자신의 기의를 숨긴다. 거기에는 정부가 시각적 양식이나 상징인 엠블럼(emblem)을 통해 국민을 기만한다. 기호가 갖고 있는 이중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경고의 엠블럼도 가능하지만, 동시에 안심의 엠블럼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로써 수신자는 자신이 받은 기호를 해독하는 매우 비판적인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정부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스펙터클한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내보낸다. 어쩌면 원자력 발전소 자체가 국민들에게 일정한 신화와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면 천국이 지연될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간의 에너지 지속성, 영원한 진보(발전)라는 미명 아래 기호 발신의 에토스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게다가 국민들은 원자력이 갖는 마나(Mana)에 국민들이 쉽게 빠져들고 그 힘에 굴복하고 만다. “세계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기호라고 보는 기호학은 우리에게 모든 사실에, 그리고 가장 세속적인 사실에도 천착할 필요성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냐?”라고 물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모든 나무와 냇물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듯이 우리의 짐 꾸러미, 광고, 정치 슬로건, 자연을 대체해버린 우리의 일상용품들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드 세르토).”(Marshall Blonsky, 위의 책, 41쪽)이처럼 기호는 국민을 기만하고 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며 현상을 속인다. 원자력이라고 하는 기호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자, 개념, 표정, 그림, 매체 등에서 발생하는 편리성 이면의 위험성과 무책임성, 심지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간파할 수 있어야만 원전에 대한 신화를 접을 수 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기호학은 오늘날... 무언가를 표명하지 않는 실체, 우리를 조정하지 않는 약호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77쪽)는 사실이다. 방사능, 원전 폐기물, 핵전쟁 등 온갖 최악의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의 기호는 수신자인 우리를 조작하여 원전의 과잉적 쾌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호가 가진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기호학은 모든 기호들이 겉보기에 가리키는 것들(단어들, 이지미들, 기호들)보다는 개인들이나 그들의 지도자들이 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즉 겉보기와 내용이 다른 것, 가려져 있는 비밀 등을 간파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파워엘리트는 읽고 있다. 상업, 오락, 저널리즘, 정부 등에 포진하고 있는 강력한 거물들에게는 강한 자들을 위한 보고서와 초안들, 토론, 결정-언어, 랑가주(langage)-이 있다. 그 언어는 조용한 방에서 발화되고, 물론 치장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치장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곳에서 한참 멀어져서 온갖 화상들(그림, 텔레비전, 아름다운 필체, 잡지, 예술 등)로 승화된 것이다.”(Marshall Blonsky, 위의 책, 53, 75쪽)자크 라캉(J. Lacan)의 논리를 빌린다면 기호란 상상계(the Imaginary)에 불과하다. 의미(작용)가 아닌 가벼운 최면 상태에 홀린 마비상태에 있는 것처럼 현실과 미래를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많은 전력을 소모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겠다면 그 실재계(the Real)는 무리와 무지 앞에 황망하게 무너질 것이다. 그러기 전에 지금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위한 아고라(agora)가 왜 필요한가?’와 ‘원전 가동 중단, 원전 비리, 전력 위기 등의 그 담론이 의미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곱씹어 봐야 할 일이다. 더불어 함석헌의 기술문명에 대한 우려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광풍이 한 번 노하기만 하면 기술 어디로 갔는지 지식 어디로 갔는지 경험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조차 없고 모양은 일변하여 버린다. 그리하여 맘대로 이용한다던 바람은 인제는 맞출 수도 없고 도리어 그 폭위(暴威)하에 전연 굴복하여 그 하는 대로 맡겨두고 밀려갈 수밖에 없어진다. 소위 문명의 힘을 가지고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대개 이러한 것이다... 지식을 믿던 인간의 지식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기술을 믿던 인간의 기술이 끝이 나는 날은 저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날이다.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은 해와 별이 없어져서가 아니다. 눈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믿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절망의 밑바닥에 떨어질 때 그전에 모든 사물 모든 이치를 그렇게 똑똑히 보노라고 자랑하던 교만한 눈이 그 안광을 잃어버린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48-49쪽) 이에 미셸 푸코(M. Foucault)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의식을 이렇게 말한다.“자신만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 자신의 영혼, 자신의 생각, 자신의 행동 등에 영향을 끼치는 기술, 그리하여 자신을 변형시키고 자신을 수정하여 어떤 완벽, 행복, 순수, 초자연적 힘의 상태를 얻는 기술이 있는 것... 이 자아 테크놀로지는 진실과 관련된 어떤 사항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를 배우는 것, 진실을 발견하는 것, 진실을 깨우치는 것, 진실을 말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M. Foucault, “섹슈얼리티와 고독”, Marshall Blonsky 엮음, 위의 책, 168쪽) 따라서 그가 주장한 ‘자아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원자력에너지의 조작인식, 핵에 대한 의존인식에서 탈피하여 스스로 삶을 조망하고 탈핵에 근거한 생태적 삶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정부와 세계, 그리고 원전자본의 기호적 조작은 하나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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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그리하면 내가 살고 공동체가 산다.
-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만 한다. 윤성민 박사(한신신학대학원 외래교수)1) ▲ 한신교회 홈페이지 화면캡처와 편집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의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sein in Christus)’는 몹시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만 그 동안 신학적인 토론이 적었다.2) 2002년도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인 프리데리케 뉘쎌(Friederike Nüssel) 교수가 『Ich lebe, doch nun nicht ich, sondern Christus lebt in mir (Gal 2,20a)』 라는 제목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성서구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정리해 놓은 바 있다. 우리는 우선 이 구절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해석되어 왔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여기에 관해서 존재론적인 해석들이 많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강조되었고, 루터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적 의미로까지 확장시켰다. 또한 고 이중표 목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서 ‘별세의 영성’을 말하였다. 독특한 자기부정을 기독교 역사에서 말한 사람은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이다. 그는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고 말하였다. 이 파라독스(paradox)와 같은 표현이 그 당시의 교회들을 살렸다. 이제부터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어떤 해석들이 있어왔는지 논의하려고 한다. II. 바울이 말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의로움을 얻는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서 사도로서 자기 고백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갈 2:20, 4:19, 롬 8:10 그리고 고후 13:5을 통해서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믿음 안에서의 존재’라 일컬었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기독교인’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존재보다 “삶”이 강조된다는 점이다.3)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를 원했다. 갈라디아인들을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더 자세히 설명하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절을 보면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서 죽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함이었다. 신앙인으로서 바울은 새로운 삶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면 율법과 죄가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 그 존재는 삶을 강조하는 신학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거기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의미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서 스스로 희생하셨다!’ 이것에 첫 번째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랑 위에 기독교의 초석을 놓았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원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옛 사람의 삶, 율법의 행위로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삶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의롭다 함이 율법으로 된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죽으신 것이 된다(갈2:21b).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이전처럼 율법 아래의 옛 사람으로 살지 않겠다는 고백이다.4) 기독교의 구원론은 바울의 이 고백에 그 기초를 놓는다. III. 루터가 본 갈라디아서 2장 20절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대한 루터의 해석은 1535년에 출판되었다. 1531년, 루터는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강의했는데 그 강의의 내용이 1535년에 출판된 것이다. 루터는 예수 안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를 위해서 사는 존재를 고백한다. 바울이 고백한 ‘나’는 ‘더 이상의 내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나는 내 자신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루터의 해석은 이렇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예수의 존재였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섞이었고 그리고 바울 안에 존재하였다. 생명! 내가 새로운 삶을 살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이다.”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용접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 맞대고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접합된 존재로 이해하였다.5) 한국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표현대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써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구분되셨는데 예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자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참된 인간적인 존재로 계신다고 설명하였다. 구원론은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구분하고 차이점을 말한다. 그리고 기독론의 도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과 인격의 하나됨, 인간과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예수와 내가 하나 된다는 것은 구원론 안에서 그리고 기독론적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존재가 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존재가 된 것이다.6)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관해서 여러 논증을 하였다. 그런데 루터의 해석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신학으로 발전된다. 이것의 핵심이 바로 성만찬의 교리이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성만찬에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이 우리에게 허락된다고 설명하였다. 결국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관한 루터의 해석은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를 위한 해석이었고 그 정점은 성만찬에 있었다.7) 천주교의 교회론은, 죄 사함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공동체를 통해서 그 존재가 새롭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 한국 기독교는 천주교 사제들의 이 정신을 배워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에게로 오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라는 존재를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에 대해 그리스도의 화해적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루터는 공동체 안에서의 기독교인에 강조점을 두었다. 기독교 공동체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산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산다” 하지만 “내가 아니다!” 나는 새로운 나로서 증거 될 수 있다.8) 그리고 나는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IV. 고 이중표 목사가 체험한 별세(別世)의 은혜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개인과 공동체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싶다. 우선, 고 이중표 목사가 언급한 별세의 고백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성화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아보겠다. 앞서 말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중요하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삶이 중요하다. 고 이중표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죽은 후의 세계는 약속일뿐이요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천국을 체험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천국은 죽은 후에 가는 영혼의 천국이 아닙니다. 지금 현세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후의 천국은 약속이요, 현세에서 천국을 앞당겨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9) 한국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피안적인 저 세상이 아닌 이 땅 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별세신학에서도 그리스도의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별세(別世)’를 말할 때에 別은 다를 ‘별’이고 世는 세상 ‘세’ 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의 옛 자아는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로 살아갈 때에 기독교인은 이 땅 위에서 삶과 사역의 새로운 의미와 뜻을 발견하게 된다. 고 이중표 목사는 목사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사가 먼저 죽을 때에 그 목회자를 보고 교인들이 그 뒤를 따라서 자신 안에서 죽어야 할 모습과 옛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고 이중표 목사도 자신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문제가 많은 교인이 있어서 그를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나도 그를 고칠 능력이 없어 별세(죽었다)하였다. 고칠 능력은 없었지만 죽을 능력은 있었노라. 그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쉬우리라” 그때부터 고 이중표 목사는 본인이 먼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10) 문제가 있는 교인을 놓고 기도하던 이중표 목사에게 주님은 응답으로 교인을 고쳐놓는 것이 아니라 목사가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경험에 따라 그는, 목사는 교인을 고치려 하지 말고 목사 자신이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11) 목회자의 최대의 과제는 먼저 별세의 증인이 되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별세를 통하여 구원을 성취하듯 목회자는 별세를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별세하심으로써 모든 사람을 별세시키셨듯 목회자가 먼저 별세되어야 교인들도 별세하게 됩니다.12)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눈 안에 있는 티는 보아도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행동보다 말로써 상처를 받는 곳이다. 상처를 받았을 때에 기독교인들은 먼저 자신이 죽어야 할 모습들을 찾아야 한다. 분명 우리 안에는 사람이기에 죽어야 할 모습이 있다. 그 모습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아 힘이 들고, 그 모습 때문에 내 자신이 힘들어진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상처는 담임목사에게 향할 때가 많다. 목사는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인내하고 참는 경우가 많지만 목사가 받는 상처와 스트레스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예수전도단에서는 이렇게 교육시킨다.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의 모습이 내 안에 있기에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내 안에서 찾고 깨뜨리기 위해서 이 시험을 허락하신 것이라고. 사역자로 살아가기에는 내 안에 깨져야 할 모습, 죽어야 할 모습들이 있다. 영성이 깊다는 말은 자신의 죄에 민감하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기에 자신의 죄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내 힘으로 옛 자아가 죽을 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나의 옛 자아는 죽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가 거듭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은혜이다. 기쁨으로 우리는 날마다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 수 있다. 고 이중표 목사 또한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오늘날 교회는 많으나 이 세상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은 목사가 별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별세는 목사가 능력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때 권능과 능력으로 이 세상을 휩쓸던 종들이 타락하는 것은, 권능은 받았으나 별세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심판 날에 별세의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였을지라도 별세의 사람이 되지 못하면 예수께서 외면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별세의 주님이시요, 별세의 영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13) 목사만 죽어서도 안 된다. 장로도 죽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날마다 십자가에서 옛 자아가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교회에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사람을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 지체들을 세우는 마음이 아닌 지체를 깎아 내리고자 하는 마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도록 내어드리는 마음이 아닌 자신이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들을 옛 자아의 속성들이다. 이런 것들은 죽어야 한다. 죽어야지만 내가 살고 교회가 사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살펴보면서 고개를 드는 옛 자아의 모습을 찾고, 그런 모습이 죽게 해 달라고 날마다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별세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필자는 브루더호프 공동체(Bruderhof Community, place of brothers란 의미의 독일어) 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를 약속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없는 데에서 그 사람에 대한 허물(한국말로 하면 뒷담화)을 말하지 않는다는 약속이다. 그 사람이 범죄를 하면 직접 그 사람한테 가서 말을 하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가서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권면을 한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행동보다는 말로써 상처를 많이 받는다. 기독교인들은 남의 모습을 보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모습 중에서 죽어야 할 모습을 먼저 찾고 회개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날마다 성화된 성숙한 삶을 사모하면서 자신 안에서 죽고 깨어져야 할 부분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교인들이 많은 교회는 은혜가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 한신교회 홈페이지 화면캡처와 편집 V.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가 외친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필자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해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공동체적인 의미까지 확장시켰다. 기독교 역사에서 ‘별세’와 비슷한 사상을 말한 목사가 있다. 그가 바로 아들 블룸하르트인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Christoph Friedrich Blumhardt)이다. 그의 삶은 4 시기로 나눈다. 처음 그는 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처럼 “예수는 승리자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점차 자신에게 찾아 온 사람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동기를 발견하게 된다.14) 부흥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고 기도가 응답되는 놀라운 경험들을 체험하는데, 문제는 자신의 행복과 야망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우리 사람의 종으로 이용하려는 이기심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대의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종노릇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또한 성공적인 사역 뒤에 숨어있는 영웅주의, 즉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모습보다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15) 결국 마지막에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에게로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유혹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영웅주의이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기독교적 에고이즘’을 발견하였다. “네 자신과 너의 모든 곤궁함을 보지 말라. 차라리 하나님 나라의 곤궁함을 보아라.”16) 인간의 행복, 야망 그리고 계획을 위해서 주님을 우리의 종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종노릇하라.17) 그는 이 기독교적 에고이즘이야말로 교회의 진정한 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육(肉)’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이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죽는다고 말하였다. 모든 기독교적인 육(肉)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인 육은 늦기 전에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을 죽여 버린다…지금 나는 주님이 우리들 곁에서 육으로 발생하는 것을 죽이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을 기뻐한다.18) 한국교회에서 이런 모습이 죽도록 우리는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크리스토프는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열성과 헌신을 교단이나 종파에 돌리는 것을 교회성(Kirchlichkeit)으로 보았다. 그는 이 모습도 죽어야만 그리스도의 영이 살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교회공동체의 육(Christiliche Fleichsgebilden)을 지적하였다. 인간의 육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를 말한다.19) 한국에서 그 대표적인 예를 찾는다면 ‘세습’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이 죽지 않으면 한국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은 활동하지 않으실 것이다. VI. 결론: 우리는 다시 죽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기독교인들은 죄와 싸우기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본 회퍼가 말한 값 싼 은혜가 넘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은혜가 은혜 되게 하려면 내 안에 있는 옛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나의 힘으로는 내 자신이 변화될 수 없다. 오직 부활의 능력으로 변화 받을 수 있다. 이 별세의 영성을 통해서 우리는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교회 공동체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직분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죽어야 할 모습을 찾는 일이다. 이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성서는 개인과 공동체를 하나로 본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의 헌신으로 세운 교회가 너무나도 비대해져서 블룸하르트가 말하는 기독교적인 육, 교회공동체의 육 그리고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필자는 설교가들이 강대상 위에서 이러한 것들을 교묘히 이용하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다. 이런 모습들이 죽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살 수 없다. 이런 모습이 죽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다시 살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 한다. 필자는 확신한다. 교회 안에서 내 자신이 먼저 죽으면 우리 공동체는 살 것이다. 교회를 위한다면서 남을 정죄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법이다. 날마다 내 안에 있는 기독교적인 이기심을 찾고 회개해야 한다. 설교자는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죽지 않고서는 예수의 대의(大義)를 이룰 수 없다. 블룸하르트가 말한 기독교적인 육(肉)이 한국교회 안에 너무나도 많이 있다. 요즘 터져 나오는 사건들을 보면 인간적인 욕심, 욕망 그리고 야망이 그 모티브가 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기독교적인 육(肉) 때문에 한국교회가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외치고 싶다. “죽어라! 그래야 예수가 산다.”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고 다시금 별세의 영성을 붙잡아야만 한다. 필자는 필자의 옛 자아와 이기심 그리고 육(肉)된 모든 모습들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런 모습들이 죽기를 원한다. 그리고 부활의 능력으로 새로운 자아가 되기를 사모한다. 그리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기독교적인 육(肉)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한국교회로 거듭나기를 기도한다. 1) 독일 Heidelberg대학교 Dr.Teol. 예수영성대학 담당교수. 2) Friederike Nüssel, >>Ich lebe, doch nun nicht ich, sondern Christus lebt in mir<< (Gal 2,20a). (Zeitschrift für Theologie und Kirche, Bd. 99, 2002), 480. 3) Ibid. 4) Ibid., 483-487. 5) Ibid., 487-487. 6) Ibid., 497-499. 7) Ibid., 493-497. 8) Ibid., 501. 9) 이중표, 별세의 목회 (서울: 쿰란출판사, 1995), 13. 10) Ibid., 22. 11) Ibid., 23. 12) Ibid., 21. 13) Ibid., 21. 14) 손규태 편저, 혁명적 신앙인들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19-20. 15) 이신건,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생애와 사상,” 선교와 신학 제19집(1994), 294. 16) 이노우에 요시오 저, 원제 미상, 전호윤 역, 블룸하르트 부자 (서울: 설우사, 1987), 188-191. 17) 이신건, op. cit., 295. 18) Ibid., 294. 19) 손규태, op. cit.,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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