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30(토)

한국사상
Home >  한국사상

실시간뉴스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 한국교육
    • 종합정보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 한국뉴스
    • 교육
    2021-05-17

실시간 한국사상 기사

  • 언어는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정점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삶을 영위한다.   언어는 인간에게 있어 타인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중요한 수단이다. 타인을 전제로 한다는 것은 언어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와 사회는 서로를 함의하는 말이다. 일상은 물론, 학문, 예술, 종교까지도 언어에 의해 파생되거나 규정되기도 한다. 이것은 본래적 자아가 언어에 의해 얼마나 변질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만큼 본질적 자아로의 회복이 중요하다. 아울러 이에 따른 현실화를 위해서도 언어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벵베니스트(Emile Benveniste)는 자아는 언어 행위로 만들어진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아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 본래적 주체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 본래적인 순수한 ‘나’를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가치혁신의 최우선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언어에 관한 대화(A dialogue on Language)》에서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인간은 언어라는 집에서 사는 것이다. 언어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고 삶을 영위한다. 언어와 사물이 만남을 이루면 존재는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은 사람에게 만족과 기쁨을 제공한다. 언어라는 것은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정점이다.   대화는 인간의 마음에 파종하는 농작물이며 삶을 밝혀주는 빛이다. 대화야말로 사람이 사람에게 나아가게 하는 가장 시원한 길이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가장 익숙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대화이다. 언어는 우리가 타인에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장소가 된다.   ▲ 대화는 인간의 마음에 파종하는 농작물이며 삶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자신이 말하는 그대로의 사람이다. 이것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언어가 그 사회와 역사를 드러내고 지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언어를 올바로 사용할 때만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아름다운 생명력을 발할 수 있게 된다.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만 잘하면 심각한 문제나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반면에 ‘혀 밑에 도끼 들었다’는 말도 있다.   이만큼 언어의 올바른 사용이 중요한 것이다. 언어에 관한 올바름이라는 것도 모호한 말이다. 분명한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인간의 창조 본래적 순수함을 회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을 드러내고 유지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아름답고 올바른 것이다.   인생의 가치혁신을 위해서 언어의 문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의 활동에서도 여러 가지 필요한 요소가 있겠으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주요 수단은 말이다. 성경의 야고보서에도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3:2)는 언급이 나온다.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 밝고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말을 생성하고 실천하는 것은 본질적 자아를 회복하는 것 다음으로 매우 중요하다.   창조 본래적 ‘나’에 대한 회복과 그 실현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얼룩진 자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벗어 버려야 할 요소이다. 창조 본래적 ‘나’는 모든 세계와의 조화에 최적이며 필수적인 존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고 풍요가 된다. 상생을 만들고 조화의 아름다움을 창출한다. 이렇게 인생의 가치혁신을 아름답게 일궈내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주변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23
  • 사람책과 자신에 관한 새로운 발견
      자신에 관한 진정한 가치혁신은 자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로댕(Auguste Rodin)이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와 같은 거장들은 석재를 보면 그 안에 잠재된 형상이 보였다고 한다. 그 형상의 생성을 위해 둘러싼 부분만 깎아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사고 가운데에는 항상 생성의 미학이 숨 쉬고 있었다.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한 평의 땅도 못 가졌지만, 드넓은 바다와 끝없는 하늘을 소유했기에, 꿈을 낚는 어부는 언제나 풍요로울 수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물들다 보면 소중한 가치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허상을 실재라고 생각하면 진정한 실재를 놓치게 된다.   권정생의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가 있다. 어린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쓸모없어 버려진 존재가 ‘강아지 똥’인 셈이다. 오죽하면 쓸데없는 말을 일컬어 ‘개똥 같은 소리’라고 하겠는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은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했던 강아지의 똥이라도 자신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이루면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된다.    ▲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은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했던 강아지의 똥이라도 자신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이루면 아주 소중한 존재가 된다.     더럽고 냄새난다고 무시당하던 존재가 꽃을 피우는 데에 쓰이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남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더니, ‘꽃’이라는 빛나고 아름다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자신이 지닌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면 자괴감 속에 빠지게 된다. 자기 비하와 열등감에 시달리며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발견하게 되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인생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자신의 창조 본래적 목적을 실현하려는 회복이야말로 본질적 회복을 이루게 하는 가치혁신이다. 자신에 대해 진정한 회복을 이루게 하는 가치혁신은 자신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욕망과 이기심, 원망으로 얼룩진 ‘나’는 본래적 ‘내’가 아니다. 먼지가 뒤덮인 겉모양을 실재라고 할 수는 없다. 성형한 외모라면 부작용도 염려해야겠지만, 2세들의 외모까지 속일 수는 없다. 비뚤어진 욕망은 언젠가 그 문제를 드러내고 만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창조 본래적 목적을 회복하고 실현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세계에는 7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손가락의 지문까지도 모두가 다르다. 이것이 사람의 신비로움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이며 그 다양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에서 고유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자신에 대해 순수하게 생각하고 사랑하며 본질적 가치를 발견해 낼 수 있는 매우 바람직한 통로가 되어줄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22
  • 사람책과 인생의 가치혁신
    가치(value)란 인간의 삶에서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모든 것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가치는 개인에게나 집단에 흥미와 유익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가치는 좋고 바람직한 어떤 것을 의미하게 된다. 가장 흔하게는 경제적인 가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적 가치, 도덕적 가치, 종교적 가치 등이 있을 수 있다. 가치는 결국 인간의 삶과 연관된 것이다. 가치에는 어떤 평가 작용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좋고 바람직하다는 평가는 매우 유동적이고 탄력적이다. 동일한 것에 대해서도 상대나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따라 평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과 ‘인생’이라는 것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쓸모와 평가가 달라진다. 사람의 존엄성에 대한 본질적 가치는 언제나 변함이 없지만, 시대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는 그때마다 기준이 달랐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한 때에는 노예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지 않았는가. 《홍길동전》에도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던 서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재에 대한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책도 시대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전자책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책은 물론, 인생에 대해서도 시대를 선도하는 가치혁신이 필요하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은 바로 이 시대를 앞서 가는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가치혁신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 줄 것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미운 오리 새끼는 사실은 백조이다. 미운 오리 새끼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본래적 모습과 정체성을 깨닫지 못한 백조는 불행했다.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을 비관했다.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면, 늘 남과의 비교 때문에 상대적 열등감으로 시달리게 된다.      단점이나 약점 때문에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자신의 정체성 회복을 통해 강점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라도 남이 없는 그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확실한 존재적 가치’이다. 세계적인 여론조사 기관들에서 수많은 조사를 통해 얻는 결론은 단점이 아니라, 장점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성공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물에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는 오리들 사이에서 헤엄도 못 치고 모양마저 엉뚱하게 생긴 미운 오리 새끼는 불행의 상징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날아오름으로써 백조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했을 때는 더는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다. 훨훨 나는 능력을 지닌 우아하고 아름다운 백조이다.   공중에서 바라본 세상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날려버리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헤매던 길도 한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크고 작은 언덕이며, 높은 산도 더는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헤엄칠 수 없어서 절망하며 바라보기만 했던 큰 강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회복한 백조는 더는 좌절할 필요가 없다.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만들어 가려는 인생의 가치혁신은 바로 이런 것이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가치관이 바뀌고, 생각이 달라지면 그때부터 세상은 가능성으로 가득해진다. 생각은 현실을 만들어내는 씨앗이다. 생각을 통해 자신의 창조 본래적 모습을 회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선시되어야 할 인생의 가치혁신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21
  • 사람책 출간을 통해 주변과 왕성하게 소통하자
      사람책의 출간을 통해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도 자신의 존재적 이유 가운데 하나    먼저 누군가에게 전해 주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이것이 바로 사람책(Human Wisdom Book)의 주제가 된다. 예를 들어 농부라고 하자. 농사짓는 방법에 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면 이것이 주제이다. 다만 이 주제는 너무 광범위하다. ‘단맛이 뛰어난 포도 재배방법 이야기’와 같이 범위를 좁혀야 한다. 그렇다고 오직 이것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종이 책에서도 한 사람이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듯이 여러 권의 사람책(Human Wisdom Book)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 사람책을 통해 주변과 왕성하게 소통하며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도 분명히 존재적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주제를 정했으면 목차를 정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너무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에 때와 기한이 있듯이, 자연스러운 전개가 필요하다. 결정된 주제에 따라 전달하려는 내용의 목차를 결정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전개 구조를 짜야 한다. 이를테면 처음, 가운데, 마무리와 같은 구조가 있으면 전달하기도 쉽고, 상대방의 이해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리가 되면 원하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에 등록해야 한다. 종이 책과 비교하자면 등록은 출간과 같은 것이다. 도서관의 상황에 따라 직접 방문하여 해당 양식에 기록하고 인터뷰를 해야 할 경우도 있다. 보통은 인터넷으로 먼저 등록하고 난 다음, 인터뷰만 방문하여 진행한다. 때에 따라서는 인터뷰마저 전화로 진행할 수도 있다.   이런 정도라면 큰 어려움 없이 사람책을 출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이며,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심어진 씨앗의 존재적 이유는 싹을 틔우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의미에 따라 이 땅에 보내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람책의 출간도 각자가 지닌 존재적 이유의 일부가 된다. 사람책의 출간을 통해 주변과 왕성하게 소통하며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도 분명히 자신의 존재적 이유 가운데 하나임을 용기 있게 선언하자.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20
  • 사람책도서관이 왜 필요한 것인가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공유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플랫폼이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바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책을 읽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보고, 텔레비전도 시청한다. 책을 읽지 못하는 주된 문제는 독서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의지로서는 문자를 해독하고 사고력을 발휘하며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독서는 각각의 단어와 문장을 해독하면서 이것이 글 전체와는 어떤 연계성을 가지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하므로 많은 사고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독서가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은 깊은 사고와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서는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물론, 상상력까지 동원해야 한다.   독서가 이런 유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도 있다. 독서만으로는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시원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읽은 다음, 독서 토론을 하기도 한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도 학창시절 독서 토론을 통해 지도력을 키웠다고 한다.   ▲ 문자를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해당 내용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내용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열렸다.     이렇듯 독서 토론도 좋지만, 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해당 내용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종이에 문자를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해당 내용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내용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열렸다. 이것이 바로 사람책(Human Wisdom Book)을 대출하여 열람할 수 있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는 시스템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공유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플랫폼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독서를 뛰어넘는 아주 특별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발달에 따라 정보의 전달은 빨라졌지만, 그만큼 진정한 만남과 소통의 기회는 줄어들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줄 놀라운 선물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고, 대출도 할 수 있다.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해 억울함을 당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한글 창제와 함께 엄청난 발전을 맛보며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와 유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처럼,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의 출현 또한 책, 독서, 도서관에 대한 엄청난 변화와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5
  • 사람책도서관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만남과 잉태의 텃밭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동국이상국집》에서 1234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고 기록하고 있는 《고금상정예문》은 1455년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 넘게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발전이 뒤처진 것은 대중화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고 보관용 서적 간행이 그 용도였다.   반면 유럽에서는 인쇄술이 발명된 후 50여 년이 지나자, 200여 개의 인쇄소와 출판사가 생겨났다. 민간영역과 시민사회로의 연결이 급속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유럽의 인쇄술은 성경을 인쇄하여 보급하는 대중화의 도구로 쓰였기 때문에 급속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험과 지식이 순환하며 공유하게 되지 못하면 이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이 서적이나 디지털 매체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필요하다. 사랑을 종이로 만든 책이나 영화로 할 수는 없다. 사람이 만나야 가능하다.   자본과 발전의 원동력도 생명에서 나온다. 사람이 불어넣는 생명이 아니고서는 창조적 동력을 발휘할 수 없다. 새로운 창조적 동력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형태와 지향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런 개념의 플랫폼들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만남과 잉태의 텃밭이 되어야 한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사람책(Human Wisdom Book)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사람책(Human Wisdom Book)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에 대한 익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앎)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고 만남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세상에는 날마다 새로운 발상과 가치혁신이 생겨난다. 사람을 책처럼 대출하여 배우고 공유하자는 이 일에도 다양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나날이 새로움과 창의력을 더해 가야 한다. 이로써 인류가 누려야 할 아름다움과 행복의 뿌리를 더욱더 튼튼하게 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어느 순간 완성되고 그다음부터는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창의력을 더하고 가치를 혁신하며 인류를 위한 유용한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4
  • 사람책도서관과 소통
    창조적인 아이디어라는 것도 목적이나 기술적으로 얽매인 상태에서 나오기는 어렵다. 다양성이 숨 쉬는 열린 세계, 열린 의사소통에서는 수많은 발상이 생명력을 가지고 또 다른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유기적으로 창출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을 확보하는 것은 물질문명의 이기(利己)에 따른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됨이라는 본질적 기쁨과 행복이 약동하는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상증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 명품 구매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골이 휘어도 자녀들에게 명품을 입혀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계급적 특권 의식의 발상에서 드러내는 과시인 셈이다.   SNS(Social Network Service·사회관계망서비스)도 실제적 의사소통보다 더욱더 강력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다. 텔레비전의 각종 프로그램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부합해야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런 현상을 초과실재(hyperreality·과잉 또는 과다현실)라고 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초과실재가 활개 치는 것만큼이나 진정한 의미와 실재는 가려지거나 묻히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갯속으로 사라진다”는 말을 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세태에 대해 “악마적 권능”이라며 그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가공된 내용에는 이미 ‘진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공되는 순간 본질적 가치의 실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진실한 실재를 회복해야 진실한 아름다움, 진실한 행복, 진실한 발전도 가능해진다. 진실한 실재에는 소통, 나눔, 배려, 존중, 사랑과 같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실재야말로 인류가 되찾고 누려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인류는 산업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커다란 변화와 갈등을 경험했다. 이런 소용돌이는 인류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산업혁명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편리와 풍요를 선물했지만, 노동력의 착취, 개인주의, 인간소외 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런 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한 반작용이 사회주의 사상을 잉태하는 온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생한 사회주의혁명의 결과는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에서 싹튼 독성과 폐해를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인류는 이제 첨단 과학기술을 앞세우며 지식정보시대를 달려가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디지털의 왕성한 활동 가운데 아날로그의 정체성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이제 인류는 디지털의 편리에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남녀 사이에도 ‘다름’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림과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누구라도 아무 제한 없이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듯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의 가슴에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아나도록 손에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소유론적 이기심과 억압의 어둠을 잠재우며 환하게 떠오르는 진정한 창조 본래적 모습으로의 회복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을 위해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종이책이나 eBook 대신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읽을 수 있도록 만날 수 있게 만든 시스템)도 필요한 것이다.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은 사람의 본래적 가치를 조화롭게 실현하는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이런 모든 노력과 회복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참된 행복이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3
  • 민심(民心)이 천심(天心)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 원리와 원칙, 그리고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고 한다. 변화 가능성 전체, 혁명 가능성 전체는 민중이 가지고 있으며, 그 가능성의 실현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민중이라고 해서 맘대로 혁명을 하거나 세계 변화의 가능성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말, 초월자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늘의 뜻인 사랑을 품어야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 원리와 원칙, 그리고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만이 편협하게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랑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고 통할 수 있다.(함석헌, 앞의 책, 56쪽)   시대의 변화를 끌어내는데 전체를 앞세우지 않고 사적 개인만을 생각할 경우에 너와 내가 전체 속에 흡수될 수가 없다. 전체가 혁명과 시대 변화의 명분이다. 한 개인의 아픔과 고통, 억압 때문에 혁명과 변화를 기획했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굴욕과 수모 때문에 일어나야 한다. 민중 전체를 제도로써 구속하겠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 민중이요, 그것도 민중의 삶과 생명이다.(함석헌, 위의 책, 57쪽)   ▲ 사랑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고 통할 수 있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어떤 국가나 제도에도 양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전체로 사는 삶이고 전체로서의 뜻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 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 나라는 ‘너’와 ‘나’를 분리하는 생각이 없고, ‘너’도 ‘나’라 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나’라 하는 것이 나라요, ‘나’라고 하는 생각이다.” (함석헌, 위의 책, 60쪽)   ‘나’라는 개인의 실존이 덩어리가 된 것이 ‘나라’가 되었다는 그의 논리에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너라고 하는 실존까지도 아우르면서(포섭)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자인 ‘너’가 ‘나’와 완전히 같다는 전체주의나 동일주의와는 다르다.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와의 상관성 속에서 존재하는 거대 실존(집단 실존)과 개인 실존의 실재적 필연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실존 역시 매 순간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결단하고 전체를 위해서 개별 실존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를 갈등, 고민, 긴장해야 한다. 집단 공동체의 생명이 거기에 있는바, 따라서 집단 실존의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29
  •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국론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이미 국가 공동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국가에 대한 정의는, ‘악과 투쟁하는 공동체’로서 규정된다. 국가, 함석헌의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나라는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민중의 재산과 안녕과 질서를 보장(담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함석헌은 그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도덕적 존재들이 모여서 구성한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42쪽).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도덕 공동체, 상호주관적 윤리 공동체는 타자를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따라서 나라는 민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구적 행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어떤 의식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민중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행위자 혹은 정치적 행위 가능자에게까지 해당되는 강한 주체 인식과 행위를 요청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표준을 삼고 살고자 하는 것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나라는 유기체이며 동시에 윤리 공동체, 사람 노릇을 하는 공동체이다(함석헌, 위의 책, 42쪽).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는 일개 나라를 초월하여 범국가공동체, 세계운명공동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3-44쪽).   그런 의미에서 세계 국가는 기능적 명령이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륜 공동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국가들은 각각의 이기적인 추구를 넘어서 도덕적 인간을 토대로 물질적 실존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하지도 않고, 상호주관적 민족 공동체의 분열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추상적 인간의 실존을 공적 도덕성으로 묶는 역할도 해야 한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86쪽).   이러한 도덕적 실존, 윤리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통일을 생각해보면 경제적 우월성, 경제적 성장을 통한 국가의 통합보다 “정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정신으로 국가 공동체의 의식이 고양되어 있어야 경제적 삶, 경제적 부흥도 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으로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력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다. “비폭력혁명으로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5쪽). 비폭력은,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시적-조물주적”이다. 그것도 “역사적 진리들의 조물주적 작품화”이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들의 실천이라는 혁명적 기획투사”(J. Habermas, 앞의 책, 371쪽)라고 말할 수 있다.   ▲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     하나의 생활세계, 하나의 소통되는 세계, 하나의 공통된 일상실천이 가능한 세계, 서로 돕는(상호부조의 철학) 세계, 상호 참여가 가능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기희생 없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적 실천, 즉 비(무)경쟁성, 비(무)지역성, 비폭력성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함석헌, 위의 책, 47-48쪽).   거듭 말하지만 비폭력주의는 경쟁이 아닌 자기희생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9쪽).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인권의 옹호와 확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이에 반해 평화 없음(peacelessness)은 기아, 영양실조, 질병, 환경오염 등이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는 평화 없음의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개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적 부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평화 없음의 파괴적 현실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진출, 확장, 정복, 지배, 순치, 주입의 시스템”이 아니라 “경청, 배움, 섬김, 자율, 상생, 평화를 위한 우정과 연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박성준, “인문학의 희망, 우정의 공동체를 열다”, 장동석 지음, 살아있는 도서관, 현암사, 2012, 137-144쪽).   이 모든 행위들 속에서는 물론 생활세계적 삶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이성적, 의사소통적 간섭,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의 타당성의 요청은 관념으로만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적 합의는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참여자들의 의지와 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J. Habermas, 앞의 책, 375쪽).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와 비폭력의 철학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타당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함석헌은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뜻”이라고 말한다(함석헌, 앞의 책, 51쪽). 시대가 원하는 뜻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고, 공존재적 삶을 만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언어, 즉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이 없으면 시대도 없다. 시대를 가리키고 시대를 선도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말-알이기 때문에 말 속에 이미 그 참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내뱉을 때는 단순히 소리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알, 즉 말의 지극한 뜻을 세계 앞에 내놓는 것이다. 세계로 내던지는 말-알은 말을 둘러 싼 속 알맹이이므로 그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말이 가식과 포장이 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말이 되고자 한다면, 말은 영원성과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설령 사태가 변한다 하여도 말의 진정성마저도 변한다면 말(씀)을 통한 의사소통과 비폭력을 통한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언어니 일상언어니 서민의 언어니 시정잡배의 언어니 구분을 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탕에는 참뜻만이 존재해야 한다.   참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나 다름이 없고 언어 이면의 초월의 뜻이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의 순수성이나 말의 진중함과 신중함조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언어(言語)가 기능적으로 사람의 소리[言]와 함께 나의[吾] 말[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매개체일지라도, 말은 말의 속 알맹이, 즉 말-알로서 본질적으로 그 속에 있는 참뜻의 교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22
  • ‘사람책도서관’이 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인가
      사람에서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노인이 한 사람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각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것이 담고 있는 경험과 의미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의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아프리카 가나 판티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나 제7대(1996~2006)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도 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여도 지구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들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다.   ▲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사람이 배제되는 일은 사람을 위한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존재적 가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답이 있다. 무인도에는 길이 없다. 삶의 현장에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 본래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 핵심이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때 진정으로 사람 사는 멋과 의미를 깨닫고 누리게 된다.   소통은 단순한 전달(transmiss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통에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일어나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community)와 친교(communion)라는 의미가 합성된 말이다. 따라서 소통은 메시지를 보내고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동체적 의식을 공유하고 친밀한 교제까지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청은 상대에게 신뢰감을 쌓아 놓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람책도서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스마트폰도 전화기이지만, 수없이 개발되어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화기를 뛰어넘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앱스토어이다. 이런 것과 같이 경험과 지혜의 장터가 필요하다.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바로 이런 플랫폼이다.    ▲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더욱더 아름답고 유익한 경제를 만들어 가려면 창의적인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사람이 중심이다.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융·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촉진되어야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도 창출되는 것이다. 창의적인 발상은 혼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만나고 부딪치면서 예측하지 못 했던 결과도 만들고, 그것이 또 다른 발상과 결과를 낳기 위한 씨앗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일의 플랫폼이 되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된다는 것이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휴먼 위즈덤 북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감으로써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19
비밀번호 :

Warning: Unknown: write failed: Disk quota exceeded (122) in Unknown on line 0

Warning: Unknown: Failed to write session data (files). Please verify that the current setting of session.save_path is correct (/home/danbi/public_html/data/session) in Unknown on line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