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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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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가지고 놀다보면 저절로 얻는 바가 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과 비판(이종철, 도서출판 수류화개)』은 저자의 혜안이 넘치는 철학함(philosophieren)의 방식을 담은 성실한 결과물입니다. 저자는 삶의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길어 올려 좋은 의식과 감각의 실천(bon sense)으로 나아갑니다. 비판(Kritik)은 모름지기 가르는 것, 곧 이성 자신이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생각’을 그야말로 곱씹어 ‘생각하여’ 현실을 풀어가는 해석학적 통찰력은 그의 목적, 즉 에세이 철학을 잘 드러낸 듯합니다. 그는 놀이하는 장사꾼, 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그러면서 점잖은 어른답게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essay)합니다.   글을 쓸 때는 그의 말대로 ‘진리의 순간’,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게다가 진리에의 용기(der Mut zur Wahrheit), 즉 어떤 사태에도 굴하지 않고 대면하고자 하는 저자의 올곧은 사유 실험과 현실 탐험은 철학적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저자가 임제 선사(臨濟 禪師)의 말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인용하면서 말하듯이,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일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것입니다. 오늘날 시민의 저조한 독서율과 글쓰기의 난조는 바로 매체에 매몰된 의식 때문입니다. 헤겔이 말한 ‘정신적 동물의 왕국’에 모여 엄지손가락으로 타자를 쳐가며 소통하고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인에게 자기 생각, 주체의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일상인(das Man)에 대해 비판적인 사유를 독려하고, 편견을 반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물론 사태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줍니다. 저자의 철학적 신념처럼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권위에 익숙해진 일상인의 해방을 위해서 종래의 철학, 이론, 인물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자고 제안합니다. 특히 저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 철학자 악셀 호네트(A. Honneth)의 인쟁투쟁이란 권리에 대한 쟁취임을 간취합니다. 인간의 자존심과 인격적 존엄과 관련되는 권리는 주격 ‘나’의 주체성을 자각하고 가치 인정에 따른 연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보편적 법칙, 즉 규정적 판단력(bestimmende Urteilskraft)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에세이 철학을 꾀하는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저자가 주장하는 현실문제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과 실천은 무엇일까요? 평자가 볼 때,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대상이나 사물을 무심코 공평하게 대하려면 무엇보다 내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쏠리지 않고 평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가 말하는 ‘초연’[Gelassenheit, 평자주: 방기(放棄)]이란 이런 경지를 말할 수 있다. 이 개념은 ‘들어가기’(Sicheinlassen)와 ‘나가기’(Sichlosslassen)라는 양면성을 담고 있다. 전자는 ‘몰입’의 측면이라 할 수 있고, 후자는 ‘거리두기’의 측면이라 할 수 있다. (…) 이것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실천적 거리’(phronesis)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들어가기와 나가기의 그 어느 지점에서 설정되는 균형적인 ‘중용’의 지혜가 그것이다”(376-377).   멀어지지도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 집착하지도 않고 무관심하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저자는《금강경》의 한 문장과 비교합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곳 없는 곳에서 마음을 내라는 말입니다. 하이데거의 초연이라는 개념이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로(M. Eckhart)부터 빌려온 것이라 시대착오적인 말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대의 철학적‧종교적 용어라고 치부하기 십상인 이 개념이 우리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가 물질과 기술과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글 속에는 자신의 마음이 녹아들기 마련입니다. 특히 에세이는 평소 저자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독자에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개방하기에 모험, 솔직함, 진정성, 그리고 사유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저자의 책에서는 법학을 전공한 후 다시 철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헤겔의 변증법적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다시 개별성을 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듯한 글쓰기는 그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다시 “완색이유득”(玩索而有得, 《중용》). 저자의 책을 가지고 놀아보니 얻은 바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지평에서 볼 때, 이 책은 전문적인 철학함의 훈련을 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진리에 대한 용기’가 생기도록 해 줄 이 책의 제목《철학과 비판》에서, 특히 ‘비판’(批判)에 주목할 것을 권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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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30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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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유물론도 인간의 이상세계를 지향합니다!
    [타임즈코리아] 철학을 좀 안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유물론이나 관념론 중 어느 하나의 입장에 서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물론이다 관념론이다, 하는 해묵은 논쟁의 역사가 인간의 갈등과 전쟁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경제적 삶의 조건)에 기반을 둔 인간의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의 현실보다도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그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입니다. 관념론은 애초에 그 이상세계를 그리고 항상 사물적 인간이나 물질적 현실을 넘어서려고 하였습니다. 두 입장의 시작이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의 삶을 딱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철학적, 사상적 결이 무수히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란 원래 역사적 맥락이 만들어 낸 존재입니다. 어떤 삶의 세계에 처해 있었느냐가 그의 철학을 형성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플레하노프(Georgi Plechanov, 1856-1918)라는 맑스주의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철학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은 서구 유럽철학, 영미철학, 동양철학 이외의 이른바 러시아 철학이라는 변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간에 우리나라의 현실 속에서 이념적으로 러시아나 유물론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금기시 되어 있었던 것도 한몫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 철학자인 플레하노프의 삶과 생애를 예술철학적 입장에서 정리하고 풀이한 한국의 철학자가 고(故) 강대석 교수입니다. 평상시 유물론적 입장에서 철학을 해왔던 강대석 교수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종교론에 대해서도 해밝은 분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2월에 하늘로 돌아가셨습니다. 평자와 일면식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학문적 관심을 갖고 멀리서 사숙을 하던 차에 그분의 궂긴 소식을 듣고는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불현듯 그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맑스나 레닌과도 교류를 했던 철학자입니다. 19세기의 역사가 그렇듯이 세계의 이념적 지형은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지리적 다툼 또한 매우 잦았던 때였습니다.   급격한 산업사회의 도래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갈등이 심화되고 그로인한 노동자 탄압과 인권은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플레하노프는 관념론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사회적 현실과 조건을 외면하고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관념론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몰락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하노프는 인문학교를 졸업하고 보병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곧 자퇴를 합니다. 그 후 페테르부크르의 광산전문학교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렇듯 그의 학력을 보면 예술철학자로서 어떤 특별한 면모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면 철학자란 당대의 시대가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잘 알다시피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차르 전체주의 정치로 농민의 경제 해방이 요원해지게 됩니다.   이 시기 플레하노프는 망명과 도피 생활을 계속하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읽고, 『공산당선언』을 러시아로 번역하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빵보다 책을 더 귀중하게 생각했던 그는 “혁명적 이념 없이는 참된 의미의 혁명 노동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이나 수정 맑스주의자 베른슈타인의 견해와 달리 하면서 그들을 공격하기도 했지만, 예술적 소양도 풍부했습니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즐겨들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또한 아나키즘, 생철학자 베르그송의 관념론, 톨스토이의 종교적 휴머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사생관에서는 매우 자연적이고 소박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이란 자연과 하나되는 것이다, 라는 견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플레하노프의 철학적 토대는 유물론이었습니다. “악인을 만드는 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회제도다”라는 대명제 하에 맑스주의는 온전한 세계관이요 철학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예술의 해석에 있었습니다. 예술(언어) 속에 감정, 사상이 들어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시대적 미감”이 무엇인가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적 조건, 즉 생산력과 생산방식에 따라 사람의 위치, 심리가 결정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예술은 사회생활과 삶의 반영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고수하기에 이릅니다. “예술은 사회적 인간의 관심이 되고 행동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지상에서 천국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합니다.    특히 그는 예술 작품의 이념은 사회학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설파함으로써 예술은 인간의식의 발전, 사회질서의 개선에 기여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무용론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예술에는 이념(자유, 평등, 민주)이 없으면 안 된다”는 강한 신념의 표현이나 예술은 인류를 위한 봉사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덕이란 타인의 행복을 통해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그는 노동자 자신의 시, 노래, 문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감성의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의 오해와는 달리, “공산주의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임을 입증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플레하노프의 유물론적 미학의 핵심인 주관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조건(현실)이라는 데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가 이념이 빠진 예술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한 것은 예술의 기능과 목적은 인간과 사회의 발전, 그리고 이 땅에서 더 좋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이든 관념론이든 이들의 철학은 지금의 세계가 아닌 더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분투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의 조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진부한 이념의 논쟁보다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위해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화해를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 곧 이상세계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현실에서 초월로, 초월에서 현실로 그 방향이 어디든 최종목적은 인간의 삶의 조건의 해방과 인간의 의식의 개혁 두 가지가 정합적으로 맞물리는 삶의 세계가 아닐까요? 플레하노프의 경우 그것을 예술이라는 영역이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플레하노프 생애와 예술철학(강대석 지음, 사람일보)』 은 고 강대석 교수의 유작이라면 유작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다시 물질로 돌아가 관념의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그의 정신세계와 감성세계를 잘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좋은 저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원광디지털대학교 원불교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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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1
  • 이 세계가 ‘호의적인 장소’(oikeios topos)가 될 수 있을까?
    [타임즈코리아] 자본주의는 새로운 세계 생태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권력-자연을 결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저렴한 자연을 구축하려 합니다. 하지만 기후변화의 시대에 저렴한 자연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요? 사회(인간 자연, 비자연 인간)와 자연(비인간 자연)에 대하여 자본은 자연을 전유(착취)하고 시간에 의한 공간의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가 급변함에 따라서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덩달아 바뀌게 되었습니다. 자본은 저렴한 자연을 끊임없이 탐색하여 상품생산의 축적·혁신하기 위해 비인간적 자연을 도구화하였습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연파괴는 급증하면서 대참사를 초래하고 비자연인 인간을 닦달하여 급기야 슈퍼잡초 같은 복수를 낳았습니다.   모름지기 자본주의는 자연 전체를 관통합니다. 위가 아닌 중심부의 관통(돌파)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유한한 자연에 대해 경비를 지불한 적이 없는 데도 말입니다. 자본주의의 축적 체계는 무상 자연 일과 유산 자본의 일로 이루어져 결국 ‘고갈의 지리학’이라는 기이한 지형을 만들어냅니다. 자본주의는 18세기 중엽부터 위기를 맞이하면서 성장의 한계와 동시에 자연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16세기 석탄 사용량의 증가, 19세기의 저렴한 자연의 확보를 통해서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철도화는 시간에 의한 공간 전유를 가능하게 했고 국가 부양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인류가 생명 그물의 종이라 한들 산업화에 따른 기계-자원의 메커니즘의 표준화에 종속되었데, 이는 지식(과학)-권력-자연-지배라는 등식의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시계를 통한 시간의 통제는 자연의 시간을 자본의 시간에 근접하도록 유도하였고, 저렴한 식량은 더 적은 평균노동시간으로 더 많은 칼로리가 생산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녹색혁명은 실상 잡종 옥수수의 출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무상 일, 에너지 전유, 벌집군집붕괴현상은 생물권의 특성화 문제를 양산함에 따라 사회주의적 세계 생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더불어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곧 식량주권, 기후정의, 탈성장이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후변화로 저렴한 자연은 끝났다는 비관적 선언에 의한 반성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금융화로의 전횡과 심화가 불가피한 후폭풍을 지연시키는 강력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가?”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을 바라는 의지는 아닙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자연 생태까지 전유한 횡포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암시입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안팎의 논의를 생태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조명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독자의 인내심 있는 해독 능력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Jason W. Moor 지음,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은 노동과 자연 등의 관계를 충심어린 마음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했다는 데 이 책의 높은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번역자의 성실하고도 정확한 번역이 눈에 띤다는 것도 필자의 논지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맑스의 《자본》이 “노동자의 성서(Bibel)”인 것처럼, 이 책은 이미 자본화된 자연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롯한 자연과 민중의 반성적 삶을 위한 훌륭한 연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스어의 오이케이오스(oikeios)는 ‘가까운’, ‘친척’, ‘자신에게 속하는’, ‘고유한’, ‘적절한’ 등의 긍정적 개념들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계가 인간이 살만한 곳, 모든 생명적 존재자에게 살가운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더군다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자본주의가 이미 새로운 경제적 지평을 확장(장악)했다는 통계가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저렴한 자연이 더 가난해지기 전에 민중이 생명과 생명, 인간과 자연이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식 숭실대학교 철학과 강사,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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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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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북자에 대한 관심과 구원의 동시성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넘겨질 경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이다. 구금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자유의 몸이 되어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북한 동포들이 최소한의 음식물조차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간다는 보도는 물자가 넘쳐나며 마음껏 먹고 사는 우리에게 큰 부담감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다. 이러한 차에 최근 중국국경을 넘어 탈출한 북한이탈 주민들이 중국의 비협조로 난민지위를 얻지 못해 다시 북송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은 우리를 참담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을 인지한 박선영 의원(자유선진당)이 깡마른 몸으로 단식투쟁을 감행하면서 다시 한 번 국제적인 이슈가 되었다. 결국 실신하여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탈북주민들이 자유를 얻기를 학수고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절절한 드라마와 흡사하여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당국은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아 답답하다. 중국당국은 그들이 경제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국경을 넘은 경제사범으로 취급하여 난민지위를 허락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과의 혈맹관계를 유지해온 터라 중국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넘겨질 경우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바이다. 북송되었다 다시 탈출한 이탈주민들의 증언은 우리의 염려가 사실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구금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자유의 몸이 되어 진정한 해방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은 자유와 해방일 것이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만을 뇌까려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그처럼 인간은 최고의 가치를 숭상하고 누릴 존재인 것이다. 더구나 굶어죽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의 일부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번 사건은 다시없는 회개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의 질적인 성숙을 기하는 사순절(Lent) 기간을 지나는 시점에서 박선영 의원이 단식투쟁을 하다가 실신했다는 보도는 정의(正義)에 대하여 말은 무성한데, 실천력이 부족한 우리사회에 통렬한 비판과 무거운 책임감을 갖도록 촉구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박 의원이 어서 회복되어 국회의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 국가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이참에 기독교의 고유가치인 예수를 통한 참된 구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구원은 죄, 죽음, 그리고 무의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함의한다는 파울 틸리히(Paul Tillich)의 지적은 성서가 가르치는 기독교의 기본사상에 근접하는 좋은 암시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구원은 최우선적으로 생존(生存)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1세기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 수없이 많은 이들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구하러 어쩔 도리 없이 떠돌이신세로 전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절실한 구원은 우선 먹을 음식으로 곪은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의 기적인 오병이어의 사건이다. 수많은 군중들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동시적으로 요구되는 현실적인 필요의 공급이었다. 구원을 이분법적으로 오해되거나 곡해된 영적인 차원만을 강변하는 것은 복음의 진정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오류를 나타날 수 있으니 유의할 일이다.“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랑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1세기 당시의 경제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제한된 재화’(limited goods)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오늘의 지구에서도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와 과거의 다른 점은 1세기에는 대부분 어려운 처지여서 누가 누구를 돕는다는 복지개념이 매우 희박했다. 그러기에 지금처럼 쓸 것이 너무 많아 주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1세기의 민중들이 처한 현실을 온전히 동질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아픔과 안타까움을 몸으로 함께 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라고 강조했다. 또한 어떤 쓸 것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한 이들에게 양도하라고 주문했다. 매우 실제적인 제시를 하는데, 이 점을 가볍게 보거나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예수는 나누어준 것에 대해서도 도로 받을 것을 기대하거나 억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다시 되받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나누어준 것을 도로 받아내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죄인이나 마찬가지로 선언했다. 예수가 강조한 본의를 분명히 새겨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윤리적 철저성이 부족한 것이 아닌지 심히 안타깝다. 예수가 제시한 교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통치하는 정의가 살아 숨 쉬는 그런 세상의 질서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정확하게 작동하여 정의와 평화가 활성화되어 공평한 사회가 건설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수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믿음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기 위하여 힘써야 한다. 실천력을 담보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지식을 소유했더라도 도무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허접한 공중누각을 자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수많은 정보와 자료가 넘쳐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랑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몸으로 앎을 적극적으로 체현하지 못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기에 그렇다.  행동이 부족하면 한마디의 기도를 통해서라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동시에 예수의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많아져 우리가 사는 땅이 평화로운 환경에서 참된 인권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축제의 자리가 되기를 희망한다. 중국당국에 붙잡혀 긴장 속에서 북송될 처지에 있는 우리 동포들의 상황이 호전되어 자유의 세계에서 해방과 환희를 누리게 될 날을 기원한다. 윤철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장 본지 편집자문위원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3-07
  • 세계는 '하나'다!
    "코리아는 '하나'다!와 함께 "세계는 '하나'다!" 언젠가 한국의 첫 우주인이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돌 때, 한반도 상에 이르러서 내려 보낸 그 감격의 첫 메시지는 “코리아는 ‘하나’다!”라는 것이었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분단조국’이 가슴에 아련하였던 모양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우주는 그 ‘시작’과 ‘끝’을 알지 못하는 그리고 결코 우리가 경험해낼 수 없는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무한팽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기 시작한 그 ‘성년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살아있는 우리는, 그러므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향해 묻는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그러나 아무도 이 물음에 대하여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답답하다. 한국의 인간현실은 답답하다. 뿐만 아니라 세계의 인간현실도 답답하다. 인간현실 뿐만 아니라 자연도 또한 답답해하며 몸부림을 친다. 지진, 해일, 토네이도(Tornado) 등으로서 인간현실을 위협하는 자연현실도 답답하여 몸부림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하여 침묵의 정적을 깨뜨리며 오직 한 고대 시인만은 놀라운 영감에 사로잡혀 이렇게 대답한다. “주님은 대대로 우리의 ‘거처’(habitation)이셨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에, 땅과 세계가 생기기 전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은 신(神, ‘엘’)이셨습니다.”(시 90:1) 이 시인의 신앙에 따라 문득 나는 “코리아는 ‘하나’다!”와 함께 “세계는 ‘하나’다!”라고 외치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대답 없는 우리의 모든 물음에 대한 대답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타임스 코리아’의 창간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하나의 ‘빅뱅의 소리’로 들려진다. 세계가 하나이니 코리아도 하나이어야 한다. 아마도 코리아의 부산에서 개최될 WCC 총회는 베를린→모스크바→이르쿠츠크(Irkutsk)→베이징→신의주→평양→서울→부산으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평화열차’(peace train) 프로젝트를 계획한다고 KNCC가 운(韻)을 떼고 있다. 세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타임스 코리아’(TOK=Times of Korea)의 창간은 이런 문맥의 표출이다. 우주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비록 팽창하기는 하여도, 아니, 끝없이 팽창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 주님의 ‘한 거처’(居處; habitation, 시 90:1)가 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제 코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될 것이다. ‘타임즈 코리아’는 이 네트워크의 관제탑(管制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타임즈 코리아’는 우리 세계를 밝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시려고 이 ‘카오스’를 향해 말씀하시는 신(神)의 음성, “빛이 있어라!”(창 1:3)라는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바로 그 진정한 매체가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김이곤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본지 자문위원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3-03
  • 세계를 올바로 해석하는 저널리즘을 위하여
    또 하나의 문자 오염이나 부담이 아니라명증적인 목소리이자, 해석학적 반성을 통해 보편화된 언어로 드러내는 매체여야!   너무나 급속하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문자 혹은 활자를 보고 그 속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제 촌음을 다툰다. 대부분의 매체가 문자를 이미지화해서 인식하도록 만드는 이 세계에서 사회비판적 정신을 알리고 소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시 말해서 세계를 바라보는 어느 일정한 시각을 문자화해서 대중들에게 알리는 것은 또 하나의 저널리즘일 터인데, 그것의 방향과 목적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세계를 해석하는 저널리즘은 이 시대의 정론(正論)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를 왜곡됨이 없이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매체여야 할 것이다. 저널리즘을 통한 문자의 전달은 또 하나의 문자 오염이나 부담이 아니라 명증적인 목소리이자, 해석학적 반성을 통해 보편화된 언어로 드러내는 매체여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세계와 야합하거나 시대적, 정치적 흐름에 경도됨이 없이 오직 미몽에서 깨어나는 정신에 입각한 윤리와 도덕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글을 쓰는 저널리스트들조차도 그러한 의식과 사상을 공유할 수 있는 공적 객관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저널리즘은 편협한 세계관에 입각한 보도와 서술이 되어서 오히려 자신의 해석과 이해를 정치권력처럼 수단화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는 <타임즈 코리아>가 다른 정론보다도 더 신중한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성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의(義, dikaiosyne)란 “바로 잡는 것”, 혹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누군가로 여겨지는 것”을 뜻한다. 외연을 넓힌다면 저널리즘의 역할은 의로움 곧 세계의 의식과 행위를 바로 잡는 것이며, 초월자의 시선으로 사태 속에 있는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듯 저널리즘 혹은 저널리스트는 세상에 대해서 연민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한갓된 감성이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심 없는 주의(attention)를 뜻한다. 주의는 편견을 가지지 않고 남의 입장에서 사물과 대상을 바라보는 의식이다. 그러한 태도가 바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가 말한 이른바 동정의 윤리학(Mitleidsethik)이다. 조작적 사회와 제도 속에서 신음하는 시민들의 아픔을 달래주고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주는 문자, 그리고 문자적 소통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바깥으로부터 구성된 원자적 개인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타임즈 코리아>가 지향하는 저널리즘의 활자는 또 하나의 구속이 아니라 해방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자본 속에서 기관들 없는 신체로 노예처럼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들의 사회체를 고발하고 그러한 삶의 세계와 방식이 아닌 새로운 삶의 길이 있음을 제시해야 하는 것도 <타임즈 코리아>가 가야 할 길이다. 누구나 쉽게 살고자 하지만 자발적인 난도(難道)를 마다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기쁨과 진리의 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본의 노예 혹은 대상에서 탈피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의식을 일깨워주는 것이 정론의 역할이다. 저널은 시대적 환경을 잘 파악하고 올바른 소리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상 현실과 타협하고 권력의 통제 아래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마는 것이라면 저널리즘을 통한 하늘 정신의 확산은 힘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주위의 악과 계속 싸워라... 자유와 정의의 이름으로 행동하라”고 말한다. 악이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온갖 세계의 광포한 악에서부터 평범한 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상적인 악과 싸워야 한다.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고 했다. 따라서 문자로 혹은 이미지로 확산되는 <타임즈 코리아>의 저널리즘은 결국 인간의 의식을 일깨우고 올바로 각성시켜서 자유로운 인간을 지향하고자 함이라는 사실을 보다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본지 편집자문위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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