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한국교육
Home >  한국교육  >  학술정보

실시간뉴스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1-07-02
  • 한국화학연구원, 스펀지로 열을 전기로 바꾸는 소재 개발
    [타임즈코리아] 구부러지고 늘어나고 압축이 돼, 열이 있는 곳 어디에든 붙여 열을 전기 에너지로 바꿔주는 열전소재가 개발됐다. 완전히 유연한 열전소재가 개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화학연구원 화학소재연구본부 조성윤 박사팀은 열원의 형태와 관계없이 어디든지 붙일 수 있는 ‘스펀지형 열전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열을 전기로 바꿔주는 소재로 온도 차에 의해 전기가 발생한다. 일례로 발전소 굴뚝에 열전소재를 부착하면, 굴뚝 안쪽의 고온(150도)과 바깥 상온(30도)의 온도 차로 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연구진은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스펀지에 탄소나노튜브 용액을 코팅했다. 탄소나노튜브를 물리적으로 분산시킨 용매를 스펀지에 도포한 후, 용매를 빠르게 증발시킨 것이다.  제조방법이 간단해 대량생산에도 적합하다. 모양을 만들어주는 틀 없이 스펀지를 이용해 열전소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거푸집 없이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셈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열전소재는 무기 소재로 만들어진 탓에 유연하지 않았다. 사람의 몸이나 자동차 등 다양한 곡면의 열원에 붙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제조공정 자체도 까다롭고 복잡하다. 전 세계 연구진들은 유연한 열전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탄소나노튜브에 주목했다. 탄소나노튜브는 전기전도도가 높고 기계적 강도가 강하며, 지구상에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팀이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해 유연한 열전소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열전소재는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스펀지와 유사하면서도 높게 쌓을 수 있는 탄소나노튜브 폼(foam)을 만든 것이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압축 안정성 실험 결과     한국화학연구원 조성윤 박사는 “지금까지 개발된 유연한 소재는 지지체나 전극의 유연성을 이용한 것”이었다면서 “소재 자체가 유연한 건 이번 스펀지형 열전소재가 처음이고 제조방법도 간단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개발된 스펀지형 열전소재는 열전소재의 전기적 특성과 스펀지 고유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하고 복원하는 과정을 10,000번 반복해도 형태는 물론이고 전기적 특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압축 전과 압축 후의 저항값이 각각 1.0Ω(옴), 0.3Ω으로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는 스펀지에 기공이 무수히 많아 변형에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펀지의 탄성을 이용한 응용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스펀지형 열전소재의 경우, 압력이 커질수록 발전량도 덩달아 높아졌다. 실험 결과, 열전소재를 압축했을 때 최대 2㎼(마이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하여, 압축 전과 비교해 발전량이 10배 정도 증가했다. 이에 대해 연구논문 1 저자인 김정원 박사는 “스펀지의 압축되고 복원되는 탄성을 활용해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기기에 적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수한 기계적 성질이 요구되는 자동차 등에도 다양하게 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원 박사는 “열전소재 분야 전망도 밝다. 현재 자동차에서 사용하고 난 후의 열이나 온천수를 이용한 열전발전 시작품의 실증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관련 기술 수요도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성과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에너지 소재 분야 권위지인 『나노 에너지(Nano Energy), IF:16.602』8월호에 게재됐으며,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창의형 융합연구사업의 지원을 받아 수행됐다.
    • 한국뉴스
    • 과학
    2020-09-22
  • 종속될 것인가, 회복할 것인가
      [타임즈코리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무서운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느린 사람은 어찌 살라는 건지, 넋이 나갈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많은 것들이 바뀌곤 한다. 이런 현상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다. 변화는 순리이고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라는 논리가 더 우세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약육강식이 진리이어야 한다. 여기에 동의할 사람들은 모두 강자라야 가능하다. 적어도 변화가 자연에 의한 것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자초한 변화에 순응하라는 것은 무조건 따를 수 없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그만큼 편리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그만큼의 행복을 확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비대 면화되어 가고 있다. 이것을 본질적으로 바람직한 변화라고 동의하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코로나19에 따른 불가피한 강요인 셈이다.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뿐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이에 따른 변화에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 만남에서 누리고 싶은 행복은 사람의 DNA 속에서 절대로 지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가치도 있다. 현장 공연에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감흥도 그렇다. 그럼에도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런 노력은 모두를 위한 것이지 개인의 욕심이 아니다. 그렇기에 머지않아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예술을 가상의 세계에 가두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다. 만약 가상의 세계에서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직접 여행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영상이나, 증강현실 그리고 가상현실 시스템만으로도 더 자세하게 보며 실감 나는 장면 속에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온라인으로 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계기로 우리는 온·오프라인의 콘텐츠를 구별하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태양의 서커스’가 파산했다는 기사가 유난히 아프게 느껴진다. 과학과 기술이 육체적 요소라면 문화와 예술은 정신적 요소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난국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와 예술을 활성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술의 존엄과 가치는 예술가들이 지켜 내야 하는 것이다. 대중화, 실용화 이런 측면들은 굳이 지키려 하지 않아도 어느 시대에나 자생해 왔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변하지 않게 하는 일,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려는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자극하여 거대한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예술의 힘이고 예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망가트려놓은 만남과 관계를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에 내어주고 거기에 종속될 것인가. 아니면 만남과 관계를 열망하는 DNA와 인간의 지혜가 코로나19보다 더 강함을 증명하며 예전과 같은 역동성을 회복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왔듯이 이 또한 극복해 낼 것이다. 우리는 머지않아 코로나19를 이겨낼 백신과 치료제를 개발하고, 이전과 같은 일상을 회복할 것이다. 예술가들이여, 우리는 과학자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합시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20-07-06
  • 인문학은 이론이 아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아 나선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사변적으로 흘러가면 이념이나 현상적인 집착으로 이탈하게 된다.   이런 행태는 수많은 증오와 폭력을 낳으며 씻지 못 할 마음의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남길 뿐이다.   인문학적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삶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타자와 참된 관계를 형성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관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조화로움의 아름다움을 통해 공감함으로써 상대방을 이웃으로써 인식하고 수용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추고 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의 이론을 습득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을 배우고 익힘으로써 그들의 아픔과 울분, 사랑과 기쁨을 공유하는 공감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인문학은 ‘너’와 더불어 존재하는 ‘관계’로서의 ‘나’를 인식하고 사랑(자비, 나눔, 배려, 공감)으로 소통하는 지혜를 깨우치고 표현하게 하는 모든 문화, 사상, 지식 등을 말한다.   인문학은 진리를 찾아가는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을 최선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8
  • 현대인 허균이 살았던 과거의 삶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동부승지, 삼척 부사,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허엽(許曄)은 30년간이나 관직에 머물렀는데도 생활이 검소했고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한 인물이다.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이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초당 순두부의 본고장이 바로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이다.         이곳에서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 1569~1618)이 태어났다. 교산(蛟山) 허균은 명문가의 자제로 천재적인 두각을 나타내 모든 것이 보장된 인물이었지만, 불우한 계층을 대변하는 삶을 선택했다.   이런 까닭으로 허균은 조선시대 반역의 상징 같은 인물이 되었다. 일찍이 평등사상에 눈을 뜬 허균의 급진적인 개혁 사상은 오늘날에 와서는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과 반역을 도모하는 사회전복세력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쓴 《홍길동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허균이라는 인물을 볼 때, “역사는 현대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평가될 수 있기에 역사를 보는 모든 이들의 시각은 상대적이다”고 말한 영국의 정치학자이며 역사가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1892년~1982년)의 견해가 더욱더 공감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6-03-15

실시간 학술정보 기사

  • 사람책도서관이 왜 필요한 것인가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공유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플랫폼이다.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바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책을 읽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휴대폰으로 인터넷도 보고, 텔레비전도 시청한다. 책을 읽지 못하는 주된 문제는 독서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웬만한 의지로서는 문자를 해독하고 사고력을 발휘하며 책을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다. 독서는 각각의 단어와 문장을 해독하면서 이것이 글 전체와는 어떤 연계성을 가지게 되는지를 파악해야 하므로 많은 사고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독서가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텔레비전 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은 깊은 사고와 많은 상상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서는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며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물론, 상상력까지 동원해야 한다.   독서가 이런 유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도 있다. 독서만으로는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시원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책을 읽은 다음, 독서 토론을 하기도 한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도 학창시절 독서 토론을 통해 지도력을 키웠다고 한다.   ▲ 문자를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해당 내용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내용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열렸다.     이렇듯 독서 토론도 좋지만, 저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해당 내용을 직접 들을 수 있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이제 종이에 문자를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을 뛰어넘어 해당 내용의 지식이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직접 만나서 내용을 듣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열렸다. 이것이 바로 사람책(Human Wisdom Book)을 대출하여 열람할 수 있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는 시스템이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공유하게 함으로써 창의적 창조력을 발휘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플랫폼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독서를 뛰어넘는 아주 특별한 독서를 할 수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발달에 따라 정보의 전달은 빨라졌지만, 그만큼 진정한 만남과 소통의 기회는 줄어들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고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줄 놀라운 선물이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사람책(Human Wisdom Book)이 될 수 있고, 대출도 할 수 있다. 어려운 한자를 배우지 못해 억울함을 당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한글 창제와 함께 엄청난 발전을 맛보며 상상할 수 없었던 변화와 유익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처럼,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의 출현 또한 책, 독서, 도서관에 대한 엄청난 변화와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5
  • 사람책도서관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만남과 잉태의 텃밭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동국이상국집》에서 1234년에 금속활자로 찍어냈다고 기록하고 있는 《고금상정예문》은 1455년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 넘게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발전이 뒤처진 것은 대중화가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고 보관용 서적 간행이 그 용도였다.   반면 유럽에서는 인쇄술이 발명된 후 50여 년이 지나자, 200여 개의 인쇄소와 출판사가 생겨났다. 민간영역과 시민사회로의 연결이 급속한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유럽의 인쇄술은 성경을 인쇄하여 보급하는 대중화의 도구로 쓰였기 때문에 급속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험과 지식이 순환하며 공유하게 되지 못하면 이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이 서적이나 디지털 매체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필요하다. 사랑을 종이로 만든 책이나 영화로 할 수는 없다. 사람이 만나야 가능하다.   자본과 발전의 원동력도 생명에서 나온다. 사람이 불어넣는 생명이 아니고서는 창조적 동력을 발휘할 수 없다. 새로운 창조적 동력은 만남에서 출발한다. 형태와 지향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이런 개념의 플랫폼들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만남과 잉태의 텃밭이 되어야 한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사람책(Human Wisdom Book)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사람책(Human Wisdom Book)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에 대한 익힘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앎)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고 만남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세상에는 날마다 새로운 발상과 가치혁신이 생겨난다. 사람을 책처럼 대출하여 배우고 공유하자는 이 일에도 다양한 발상의 전환과 가치혁신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다 나날이 새로움과 창의력을 더해 가야 한다. 이로써 인류가 누려야 할 아름다움과 행복의 뿌리를 더욱더 튼튼하게 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어느 순간 완성되고 그다음부터는 그만두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창의력을 더하고 가치를 혁신하며 인류를 위한 유용한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4
  • 사람책도서관과 소통
    창조적인 아이디어라는 것도 목적이나 기술적으로 얽매인 상태에서 나오기는 어렵다. 다양성이 숨 쉬는 열린 세계, 열린 의사소통에서는 수많은 발상이 생명력을 가지고 또 다른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유기적으로 창출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을 확보하는 것은 물질문명의 이기(利己)에 따른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사람됨이라는 본질적 기쁨과 행복이 약동하는 휴머니즘을 회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이상증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직면해 있다. 명품 구매에 대한 본질적인 이유도 따져보지 않고 무조건 사야 한다고 생각한다. 등골이 휘어도 자녀들에게 명품을 입혀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사람들이 사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계급적 특권 의식의 발상에서 드러내는 과시인 셈이다.   SNS(Social Network Service·사회관계망서비스)도 실제적 의사소통보다 더욱더 강력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문제를 만들고 있다. 텔레비전의 각종 프로그램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런 요구에 부합해야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런 현상을 초과실재(hyperreality·과잉 또는 과다현실)라고 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초과실재가 활개 치는 것만큼이나 진정한 의미와 실재는 가려지거나 묻히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현상과 관련하여 “실재가 이미지와 기호의 안갯속으로 사라진다”는 말을 했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런 세태에 대해 “악마적 권능”이라며 그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가공된 내용에는 이미 ‘진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공되는 순간 본질적 가치의 실재가 사라지는 것이다. 진실한 실재를 회복해야 진실한 아름다움, 진실한 행복, 진실한 발전도 가능해진다. 진실한 실재에는 소통, 나눔, 배려, 존중, 사랑과 같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실재야말로 인류가 되찾고 누려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인류는 산업혁명과 사회주의혁명이라는 커다란 변화와 갈등을 경험했다. 이런 소용돌이는 인류에게 큰 교훈을 남겼다. 산업혁명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편리와 풍요를 선물했지만, 노동력의 착취, 개인주의, 인간소외 등의 부작용을 초래했다. 이런 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한 반작용이 사회주의 사상을 잉태하는 온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발생한 사회주의혁명의 결과는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에서 싹튼 독성과 폐해를 가르쳐주었을 뿐이다.   인류는 이제 첨단 과학기술을 앞세우며 지식정보시대를 달려가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디지털의 왕성한 활동 가운데 아날로그의 정체성은 서서히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절대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이다. 이제 인류는 디지털의 편리에 따듯한 온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남녀 사이에도 ‘다름’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림과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누구라도 아무 제한 없이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누리듯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의 가슴에 희망이 무지개처럼 솟아나도록 손에 손을 잡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소유론적 이기심과 억압의 어둠을 잠재우며 환하게 떠오르는 진정한 창조 본래적 모습으로의 회복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을 위해 사람책(Human Wisdom Book)과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종이책이나 eBook 대신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읽을 수 있도록 만날 수 있게 만든 시스템)도 필요한 것이다. 사람책과 사람책도서관은 사람의 본래적 가치를 조화롭게 실현하는 세상을 회복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이런 모든 노력과 회복을 통해 삶의 아름다움과 참된 행복이 마음껏 숨을 쉴 수 있게 될 것이다.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10-13
  • 민심(民心)이 천심(天心)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 원리와 원칙, 그리고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고 한다. 변화 가능성 전체, 혁명 가능성 전체는 민중이 가지고 있으며, 그 가능성의 실현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민중이라고 해서 맘대로 혁명을 하거나 세계 변화의 가능성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말, 초월자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하늘의 뜻인 사랑을 품어야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근본 원리와 원칙, 그리고 동기는 사랑에서 나온다. 사랑만이 편협하게 내 편 네 편을 가르지 않고 전체를 아우를 수 있다. 사랑을 통해서만이, 사랑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고 통할 수 있다.(함석헌, 앞의 책, 56쪽)   시대의 변화를 끌어내는데 전체를 앞세우지 않고 사적 개인만을 생각할 경우에 너와 내가 전체 속에 흡수될 수가 없다. 전체가 혁명과 시대 변화의 명분이다. 한 개인의 아픔과 고통, 억압 때문에 혁명과 변화를 기획했다면 그것은 그 개인이 굴욕과 수모 때문에 일어나야 한다. 민중 전체를 제도로써 구속하겠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 제도보다 우선하는 것이 민중이요, 그것도 민중의 삶과 생명이다.(함석헌, 위의 책, 57쪽)   ▲ 사랑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전체 속에서 하나가 되고 통할 수 있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어떤 국가나 제도에도 양도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민중의 삶과 생명은 전체로 사는 삶이고 전체로서의 뜻이다. 따라서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잘못의 근본 원인은 너, 나를 갈라 생각하는 데 있다. 나라는 ‘너’와 ‘나’를 분리하는 생각이 없고, ‘너’도 ‘나’라 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나’라 하는 것이 나라요, ‘나’라고 하는 생각이다.” (함석헌, 위의 책, 60쪽)   ‘나’라는 개인의 실존이 덩어리가 된 것이 ‘나라’가 되었다는 그의 논리에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이 너라고 하는 실존까지도 아우르면서(포섭)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는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타자인 ‘너’가 ‘나’와 완전히 같다는 전체주의나 동일주의와는 다르다.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와의 상관성 속에서 존재하는 거대 실존(집단 실존)과 개인 실존의 실재적 필연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실존 역시 매 순간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결단하고 전체를 위해서 개별 실존을 어떻게 품을 것인가를 갈등, 고민, 긴장해야 한다. 집단 공동체의 생명이 거기에 있는바, 따라서 집단 실존의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29
  • 상호주관적 도덕 공동체와 시대적 참뜻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국론 분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우려가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 함석헌은 이미 국가 공동체에 대한 좀 더 근원적인 해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국가에 대한 정의는, ‘악과 투쟁하는 공동체’로서 규정된다. 국가, 함석헌의 정확한 표현에 의하면, 나라는 악에 대항하는 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나라가 민중의 재산과 안녕과 질서를 보장(담보)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함석헌은 그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보다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라는 도덕적 존재들이 모여서 구성한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도덕적 존재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윤리”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42쪽). 상호주관적 윤리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데서 도덕적 공동체가 시작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도덕 공동체, 상호주관적 윤리 공동체는 타자를 윤리적으로 인식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따라서 나라는 민중의 재산을 보호하고 안녕과 질서를 유지시키는 도구적 행위 공동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다.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가 어떤 의식과 행위를 해야 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것을 민중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행위자 혹은 정치적 행위 가능자에게까지 해당되는 강한 주체 인식과 행위를 요청한다. 그래서 함석헌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을 모든 행동의 표준을 삼고 살고자 하는 것이 윤리”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나라는 유기체이며 동시에 윤리 공동체, 사람 노릇을 하는 공동체이다(함석헌, 위의 책, 42쪽).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함석헌이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윤리적 공동체의 범위는 일개 나라를 초월하여 범국가공동체, 세계운명공동체로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3-44쪽).   그런 의미에서 세계 국가는 기능적 명령이나 행위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인륜 공동체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국가들은 각각의 이기적인 추구를 넘어서 도덕적 인간을 토대로 물질적 실존을 소외시키거나 파괴하지도 않고, 상호주관적 민족 공동체의 분열도 지양해야 한다. 그리고 추상적 인간의 실존을 공적 도덕성으로 묶는 역할도 해야 한다(J. Habermas, 이진우 옮김,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86쪽).   이러한 도덕적 실존, 윤리적 공동체를 바탕으로 통일을 생각해보면 경제적 우월성, 경제적 성장을 통한 국가의 통합보다 “정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직 정신으로 국가 공동체의 의식이 고양되어 있어야 경제적 삶, 경제적 부흥도 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신으로 통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력이나 폭력은 있을 수가 없다. “비폭력혁명으로야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함석헌, 앞의 책, 45쪽). 비폭력은, 하버마스가 말한 것처럼, “시적-조물주적”이다. 그것도 “역사적 진리들의 조물주적 작품화”이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개인들의 실천이라는 혁명적 기획투사”(J. Habermas, 앞의 책, 371쪽)라고 말할 수 있다.   ▲ 나라가 공동체라면, 개별적 민중 하나하나는 도덕적 존재, 도덕적 인간이어야 한다 .     하나의 생활세계, 하나의 소통되는 세계, 하나의 공통된 일상실천이 가능한 세계, 서로 돕는(상호부조의 철학) 세계, 상호 참여가 가능한 세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의 원리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에서 나온다. 자기희생 없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세계적 실천, 즉 비(무)경쟁성, 비(무)지역성, 비폭력성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함석헌, 위의 책, 47-48쪽).   거듭 말하지만 비폭력주의는 경쟁이 아닌 자기희생이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좋은 힘을 이끌어내는 것이다(함석헌, 위의 책, 49쪽). 적극적인 의미에서 평화의 구현이다. 평화는 사회정의의 실현, 인권의 옹호와 확대, 궁핍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다. 이에 반해 평화 없음(peacelessness)은 기아, 영양실조, 질병, 환경오염 등이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가하는 폭력적 행위는 평화 없음의 상태로 치달을 수 있다.   개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경제적 부를 향유하기 위해서 자연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평화 없음의 파괴적 현실로 치닫게 된다. 그러므로 “진출, 확장, 정복, 지배, 순치, 주입의 시스템”이 아니라 “경청, 배움, 섬김, 자율, 상생, 평화를 위한 우정과 연대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박성준, “인문학의 희망, 우정의 공동체를 열다”, 장동석 지음, 살아있는 도서관, 현암사, 2012, 137-144쪽).   이 모든 행위들 속에서는 물론 생활세계적 삶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의 이성적, 의사소통적 간섭, 상호이해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것의 타당성의 요청은 관념으로만 되지 않는다. 의사소통적 합의는 평화와 비폭력을 추구하는 참여자들의 의지와 조정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J. Habermas, 앞의 책, 375쪽).   이렇게 적극적인 평화와 비폭력의 철학이 정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에 타당한 말(씀)을 가져야 한다. 함석헌은 “그 말(씀)이 그 시대의 뜻”이라고 말한다(함석헌, 앞의 책, 51쪽). 시대가 원하는 뜻을 통해 세계를 해명하고, 공존재적 삶을 만드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언어, 즉 뜻이 있어야 한다. 뜻이 없으면 시대도 없다. 시대를 가리키고 시대를 선도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말은 말-알이기 때문에 말 속에 이미 그 참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내뱉을 때는 단순히 소리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알, 즉 말의 지극한 뜻을 세계 앞에 내놓는 것이다. 세계로 내던지는 말-알은 말을 둘러 싼 속 알맹이이므로 그 알맹이는 변하지 않는다.   말이 가식과 포장이 되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말이 되고자 한다면, 말은 영원성과 초월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설령 사태가 변한다 하여도 말의 진정성마저도 변한다면 말(씀)을 통한 의사소통과 비폭력을 통한 통일은 요원할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정치언어니 일상언어니 서민의 언어니 시정잡배의 언어니 구분을 하지만 그 언어의 밑바탕에는 참뜻만이 존재해야 한다.   참뜻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는 죽은 언어나 다름이 없고 언어 이면의 초월의 뜻이 성립할 수 없으니 말의 순수성이나 말의 진중함과 신중함조차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록 언어(言語)가 기능적으로 사람의 소리[言]와 함께 나의[吾] 말[言]을 통해서 생각을 전하는 매개체일지라도, 말은 말의 속 알맹이, 즉 말-알로서 본질적으로 그 속에 있는 참뜻의 교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22
  • ‘사람책도서관’이 왜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인가
      사람에서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이다.   노인이 한 사람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은 생각이다. 한 사람의 일생과 그것이 담고 있는 경험과 의미는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의식을 잘 나타내는 말이다. 아프리카 가나 판티족의 족장 아들로 태어나 제7대(1996~2006) 국제연합(UN) 사무총장을 지낸 코피 아타 아난(Kofi Atta Annan)도 한 연설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강조한 적이 있다.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아프리카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하여도 지구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일들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파생되는 것이다.   ▲ ‘한 사람이 하나의 도서관과 같다’는 생각은 사람의 경험과 지혜를 그만큼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사람이 배제되는 일은 사람을 위한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존재적 가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사람에게 답이 있다. 무인도에는 길이 없다. 삶의 현장에 길이 생기는 법이다. 이것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 본래적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 핵심이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을 나누고 공유할 때 진정으로 사람 사는 멋과 의미를 깨닫고 누리게 된다.   소통은 단순한 전달(transmission)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통에서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일어나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공동체(community)와 친교(communion)라는 의미가 합성된 말이다. 따라서 소통은 메시지를 보내고 듣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공동체적 의식을 공유하고 친밀한 교제까지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청은 상대에게 신뢰감을 쌓아 놓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려는 것이야말로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사람책도서관’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스마트폰도 전화기이지만, 수없이 개발되어 제공되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전화기를 뛰어넘어 엄청난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앱스토어이다. 이런 것과 같이 경험과 지혜의 장터가 필요하다.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바로 이런 플랫폼이다.    ▲ 소통을 통해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시너지를 창출하며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사람책도서관’이다.      더욱더 아름답고 유익한 경제를 만들어 가려면 창의적인 발상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사람이 중심이다. 핵심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융·복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촉진되어야 새로운 일자리와 시장도 창출되는 것이다. 창의적인 발상은 혼자서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신선한 아이디어들이 만나고 부딪치면서 예측하지 못 했던 결과도 만들고, 그것이 또 다른 발상과 결과를 낳기 위한 씨앗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런 일의 플랫폼이 되는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이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된다는 것이다.   1418년에서 1450년까지 재위한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의 정치는 인재경영에 기인한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의 발상과 그 실행을 위한 인재 등용과 연구의 산실이었다. 집현전은 세종대왕이 가동한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라고 할 수 있다. 집현전에서 휴먼 위즈덤 북들은 자유롭게 창의적인 연구에 열정을 불사를 수 있었다. 세종대왕은 여러 방면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힘썼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1443년(세종 23년) 반포된 훈민정음이 개발되었다.   세종대왕은 재임기간 동안 2천여 번의 경연(經筵)을 열었다고 하니, 한 달에 6회 정도를 한 셈이다. 여기에서는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소통이 일어났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장영실과 같은 노비 출신도 고위 관리로 등용했다. 모든 분야에 대해 다양한 관심을 가졌던 세종대왕은 특히 인재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던 지도자였다.   이 시대에도 이런 리더십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 필요하다. 블루오션(Blue Ocean) 이론은 무조건 밀어붙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핵심은 가치혁신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에는 새로운 성장 동력의 끊임없는 창출이 필요하다. 그 해답 또한 사람이다. 우리는 사람을 통해 오늘과 내일의 해답이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아이디어의 텃밭을 만들어내야 한다. 곳곳에서 ‘사람책도서관(Human Wisdom Library)’을 이런 텃밭으로 잘 가꾸어 나감으로써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 저자 박요섭 박사        박요섭 휴먼 위즈덤 라이브러리와 지혜생태포럼을 통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공감의 시대를 펼쳐 나가는 데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으며 “사람이 책이고 도서관이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서울정보통신대학원, 서울장신대학교를 비롯한 국내외 대학교에서 정보경영학과, 교육학과, 다문화학과 등 여러 분야의 교수와 학장, 학부장으로서도 열과 성을 다해 왔으며 유비쿼터스 경영 컨설턴트, 소프트웨어 아키텍터, 심리상담사, 평생교육사, 시인,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로서도 주어지는 역할에 성심을 다한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19
  • 비폭력의 철학과 희망의 정치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비폭력은 단순한 정치 수사학이 아니라 정치의 근본정신이자, 정신의 극치입니다.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말하고 있듯이, “모든 수사학적 형식들은 시대정신(Zeitgeist)이 되기를 갈망”(F. Moretti, 조형준 옮김, 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429쪽)합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수사학이란 “상호 주체적 진리를 확신시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가치 체계에 대해 지지를 요청하는 것이 목적”(F. Moretti, 위의 책, 397쪽)입니다.   함석헌의 정치 수사학은 비폭력의 철학적 가치 체계를 민중이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비폭력은 정치적 형식이자 동시에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폭력의 정치 수사학은 시대정신, 시대가 요구하는 민중의 정신이요, 세계의 정신입니다. 비폭력의 정신은 바로 그러한 토대에서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따라서 비폭력이 아닌 “힘의 철학, 폭력의 정치”로는 안 됩니다. 자신을 죽이고 타자를 인격으로 대하지 못하는 힘에 의지하는 철학은 상처와 술수와 치졸과 거짓만이 난무할 뿐입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36쪽).   민중의 정신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바탕이 되어야 하며, 정신이 세계철학의 지향이 되어야 하고, 정신이 민중의 사유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비폭력은 정치 현실(추악함, 비도덕, 조잡함)과 정치이론을 조화시켜야 합니다.   정치적 존재(실존)와 정치적 현실 사이에 있는 틈을 좁히고 삶을 삶답게 하여주는 정치미학은 정치적 존재자들(정치적 행위자들)과 정치적 실존(민중)을 서로 편안하게 하는 비폭력으로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권력은 국가의 질서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 개개인의 권리를 위해서 사용될 때 폭력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그것은 국가 체제, 정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 계층을 위한 권력으로 작용하게 될 때 폭력이 되는 것입니다. 민중은 그들에게 정치를 맡긴 적이 없습니다. 되레 그들 자신이 정치한답시고 잡아당긴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민중이 묵인하고 인종(忍從)하고 굴종한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이 지나치면 무식이요 무성의요 무책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7쪽).   ▲ 비폭력의 정신은 민중을 아픔에서 회복하게 하고 정치를 치유할 수 있는 원동력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신을 일으켜야 합니다. 민중의 정신은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함석헌, 위의 책, 39쪽). 민중의 정신이 일어나야 세계가 삽니다. 민중의 정신이 광기에 사로잡히라는 말이 아닙니다. 망상에 사로잡히라는 말도 아닙니다. 민중의 정신은 세계를 고치는 이상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신과 의지(Wille)가 스스로 진보하고 사물이 사물 되게 하고 세계가 세계 되는 힘(A. Schopenhauer)이라면, 민중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각되거나 의식되지 않는다고 해서 민중의 정신이 없거나 우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지러운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는 ‘새 도덕’이 필요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40쪽). 낡은 체제 속에서의 정신과 생각을 이끌었던 도덕은 이제 더는 소용이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도덕적 분투만이 사회를 구할 수 있습니다. 폐단, 구태, 차악, 안일, 안주, 절망, 자멸로 이끄는 도덕을 도덕이라 할 수 없으니 새로운 도덕을 구현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도덕마저도 정치적 행위자들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깨이지 못한 민중이 부화뇌동하여 자신의 사적 이익에 도덕이라는 훈장과 초자아를 부르짖는 현실에서 도덕의 갱신은 필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함석헌은 “낡은 체제에 속한 한, 너도 나도 다 악합니다”라고 단언합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선은 특정인, 특정사상, 특정주의에 국한되기 마련입니다. 차별주의나 당파주의는 더 문제입니다(함석헌, 앞의 책, 40쪽). 정치적 무의식은 차별, 분리, 당파, 구별입니다. 통합하고 화해하고 치유할 줄 모릅니다.   정치적 무의식은 본능(id)과 현실적 자아(ego)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본능을 향해 치닫습니다. “이드와 현실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존재로서 자아는 너무나도 자주 아첨꾼이자 기회주의자, 거짓말쟁이가 되려는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것은 마치 어떤 정치가가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위치를 대중들이 좋아하는 상태로 유지시키려는 행위와 비슷하다.”(S. Freud, 박찬부 옮김, ‘자아와 이드’, 쾌락 원칙을 넘어서, 열린책들, 153-154쪽 재인용, F. Moretti, 앞의 책, 448쪽)   그러므로 정치적 실존, 정치적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덕을 구상해야 합니다. 함석헌은 좌우도 아닌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인생관, 새로운 윤리, 새로운 종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궁극은 비폭력의 철학이라고 말합니다. 비폭력은 “너 나와의 대립을 초월한 것입니다. 차별상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생에 대한 절대의 존경을 그 도덕의 토대로 합니다.”(함석헌, 앞의 책, 40-41쪽)   정치는 이제 정치적 상투어를 파괴하고 정치의 상투적인 행위를 타파해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바탕에는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좌우 진영논리, 좌우 이념이 아닌 비폭력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비폭력은 자아를 존중하듯이 타자를 환대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생의 운동, 삶의 운동이라는 것을 통하여 외형의 형식과 가식을 뒤로하려고 노력합니다.   정부는 정치적으로 희생된 목숨의 안타까움과 진실을 외면하고 경제 부흥만을 부르짖습니다. 정치적 행위자들은 그저 형식과 가식, 체면, 가면만을 생각하고 민중을 짓밟으려고 합니다. 민중은 정신도 없고, 도덕도 없는 듯이 막 대합니다. 부흥도 민중 전체가 ‘감격’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감격하게 하지 않는 정치에는 쇼만 있을 뿐입니다. 감격은 앞에서 말한 타자에 대한 인식과 환대가 기초가 된 감정의 교환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41-42쪽).   산다는 것은 경제적 부흥이나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먹고 살 만큼 사는 우리입니다. 다만 극부와 극빈이 너무 심하니 그 둘을 조화롭게 하는 미학적 삶, 정치미학, 경제미학의 쾌감적 능력을 발휘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중 전체가 일어나는 전체 운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민중 전체가 일어나야 합니다. 민중 전체의 정신은 “그동안 사회적인 혜택을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되고 결과적으로 최대 다수의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이른바 롤스의 ‘최대극대화의 원칙’(전재원, 앞의 책, 147쪽)에 입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은 자기를 부정하고 타자를 긍정하는 것이며, 자기의 욕구를 포기하고 타자의 욕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민중의 삶의 충동, 삶의 의지를 위해서 정치는 고통과 악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욕망을 단념하고 삶 자체를 관조하고 기쁨을 얻게 해야 합니다. 정치의 목적, 정치적 비폭력은 인간 앞에 있는 것들이 짓북새를 놓으며 우리를 기만하려고 하는 데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욕망하는 자아를 정확하게 보고 욕망의 동기들을 내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15
  •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민중과 정치철학
       정치적 실존은 하늘의 뜻[天命]을 민중들과 함께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나라의 주체가 민중이듯이 정치적 주체도 항상 민중입니다. 그럼에도 민중을 정치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정치가를 정치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민중의 뜻과 생각이 달라진다면 정치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물론 민중의 뜻과 생각이 항상 정치적 이상을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그 이상 역시 민중의 뜻과 생각을 근본으로 하여 설정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치가 완전히 달라지려면 민중의 깨인 의식과 행동을 정치의 실존적 참여의 주체로서, 그들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의 역사, 곧 정치의 역사는 주체인 민중에 의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정치와 역사는 잠정적으로 모험입니다. 내딛지 않은 길을 가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모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정치 현실은 실존적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위험의 소지, 모험해야만 하는 필연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적 실존들이 단지 권력 쟁투나 밥그릇 싸움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정치 세계가 갖고 있는 우연성이나 부정성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정치는 민중의 삶과 역사가 진보하기 위한 것이고, 의미 실현입니다. 진보하기 위해서는 늘 새로워야 합니다.   함석헌은 늘 ‘생각’을 말합니다.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민중, 이 민중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서 기억하고 상상하며 성찰하는 존재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   민중은 이렇게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면서, 자신이 가진 이성과 감성으로 새로운 역사를 기획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민중의 실존적 지향, 시간성 안에서의 인식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지배자는 지금까지 보수적이었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민중의 생각을 조직적으로 짓밟아 왔습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역사의 걸음을 방해하는 악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과학적으로 하는 투쟁 그것이 곧 정치요 혁명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28쪽)라고 말합니다.   ▲ 정치적 실존은 하늘의 뜻[天命]을 민중들과 함께 실현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민중 스스로 정치적 실존이나 정치적 주체가 되려면 새로운 인간, 즉 자기 극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계몽하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진화해 나가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낱개로서, 개별로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개별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존재적, 함께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임으로 전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류, 종교, 도덕, 정의 등 전체와 떼려야 뗄 수가 없습니다. 전체 연관성입니다. 민중으로서의 전체를 살리는 것이 혁명입니다. 민중과 전체 사이의 거리가 소멸하는 것, 그것이 혁명입니다. 민중은 전체로서 세계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될 때 국가주의에 의해서 개별적 민중이 와해하지 않습니다. 민중이 전체의 핵심이자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민중은 국가가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이고 깨어난 의식입니다. 생각과 의식이 사람의 규정이라면, 그 전체의 인격이 곧 민중이 될 수 있습니다. 조직이나 체제도 아닙니다. 민중은 생각하는 존재 전체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참조)   이제 새 인류의 도래를 고대해야 합니다. 개별적 존재, 민중의 자유가 보장되는 전체, 생각을 전체로서 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합니다.(함석헌, 위의 책, 31쪽)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본질을 가능하게 한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인간의 자유 속에서 공중에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에서 ‘인간존재’의 ‘존재’와 구별할 수는 없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그런 다음에’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와 인간이 ‘자유라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Jean-Paul Sartre, 정소성 옮김,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2009, 78쪽)   민중의 생각과 정신을 무화시키려 하지 말고 스스로 깨우칠 수 있는 실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이 전체라는 의식, 민중이 단순히 관념이 아니라 민중이 정치 현실이자 정치 주체라는 인식이 정치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9-05
  • 봄 그리고 깨어 생각함
       민중이 깨어 생각하고 스스로 정신을 계몽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함석헌이 말하는 ‘봄’이라는 것, ‘본다’라는 것은 단순히 시지각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안 봄’과 ‘참 봄’의 부정성으로서의 ‘겉 봄’을 구분하고 있습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2, 인간혁명의 철학, 한길사, 1983, 11쪽). 그러면서 지금의 시대가 참 봄이 아니라 겉 봄의 시대라고 비판합니다. 어쩌면 그의 봄(시각 및 인식)의 철학은 시지각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식론적이며 계보학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지 모릅니다.   ‘본다’(see, voir)는 행위는 인식론적으로 ‘안다’(savoir)라는 정보의 습득과 남김 없는 타자의 파악, 그에 따른 조정과 ‘소유’(avoir)까지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정말 본다는 것은 안 봄, 즉 비폭력적인 무시선적인 태도가 진정한 봄이라고 합니다. 흘끗 봄, 사적 관심이나 이익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는 행위는 타자에 대해서 거리를 한껏 좁혀 인식론적으로 포착, 자기 것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존재를 인식하되 완벽하게 인식하겠다는 것은 오만입니다. 시각적으로, 시신경 안으로 들어온 정보는 지극히 선택적 정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보는 즉시 우리는 판단의 과정 속에서 타자를 전부 이해했다고, 세계를 다 알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함석헌이 말한 ‘겉 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지금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생각은 계속해야 합니다. 뚫어봄은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함석헌, 위의 책, 12쪽). 생각은 존재의 기본 행위, 존재의 근원적 본질을 특징짓는 행위입니다. 생각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이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한다고 해서 다 생각이 아닙니다. 생각은 현상을 깊게 뚫어 볼 수 있는 사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정신과 사상이 모이게 되면 인류를 보는,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져 결국에는 혁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생각이 영구불변한 생각일 수 없듯이 생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합니다. 변해야 생각입니다. 하지만 생각 없이 생각을 하면 생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모순, 즉 ‘무생각’이 되고 맙니다. 생각이 아예 없는 것입니다. 뚫어봄, 즉 세계와 현상을 올바르게 꿰뚫어보는 인식론적 통찰력을 올바르게 갖지 않는 이상, 그것을 생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정보를 갖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오성적 인식으로는 부족합니다. 자기 동일성인 이성을 가지고 사태를 정직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비판력이 있어야 합니다.   함석헌이 왜 남들이 다 싫어하는 사상의 넝마주의를 자처했을까요? 왜 인생의 넝마주의, 역사의 넝마주의가 되겠다고 주저 없이 말했던 것일까요? 그 근저에 “혁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를 줍는 넝마가 곧 혁명이기 때문입니다(함석헌, 위의 책, 14-15쪽).   생각을 통하여 흩어져 범주화·종합되지 않은 온갖 사상의 쓰레기, 정신의 쓰레기를 한곳으로 모으는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쓰레기가 인류를 지탱하는 사유와 정신,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함석헌 스스로 민중의 사유를 결집시키고 한곳으로 모아 생각하게 하는 선구자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넝마주의자는 아무나 될 수가 없습니다. 쓰레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 생각과 시선이 제대로 된 쓰레기를 모음, 곧 사상과 정신, 역사의 넝마주의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정신과 사상이 모이게 되면 인류를 보는, 세계와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보는 시선과 생각이 달라져 결국에는 혁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민중이 깨어 생각하고 스스로 정신을 계몽할 수 있다면 역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과 종교문화』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8-20
  •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에서 벗어나려면
      순수한 의식과 생각, 반성적 신앙의식을 향해 의식과 실천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맹목과 몽환, 그리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의식은 순수하지 못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신이 지각하는 것이 순수하지 못한 외물적 관심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과 지각은 매 순간 순수의식을 자각하려 하지 않는 이상, 예기치 못한 맹목,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말한 “종교적 세계의 몽롱한 경지”(공포의 변증법, 새물결, 2014, 247쪽)로 빠져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순수한 의식과 생각, 반성적 신앙의식을 향해 의식과 실천을 지향하려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맹목과 몽환, 그리고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종교인이 의식하고 있는 것이, 종교인의 사고방식이 순수하게 나타남 그 자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지각된 것 그 자체인가를 매 순간 깨닫지 않으면 의식의 부재(absence)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식이 만들어 놓은 초월자의 형상이나 표상을 배거해야 합니다(함석헌, 함석헌전집 19, 영원의 뱃길, 한길사, 404-405쪽). 그것을 순수의식의 나타남이라고 착각하고 믿음의 본질로 받아들이게 되면 편견과 아집, 오류의 신앙진술만이 난무하게 됩니다. 그것을 참이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른 말’, ‘자유를 주는 말’,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나게 하는 위로가 되는 말’, ‘장래를 보고 희망을 품는 말’”이라고 단언하면서 오늘날 종교 현실을 보면 거짓말만 있고 진실은 없다고 한탄하며 그 원인이 말씀의 기근 속에 있음을 비판했습니다(함석헌, 위의 책, 407쪽).   물론 말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없습니다. 상업용 언어, 마케팅 언어, 값싼 언어 등으로 초월자를 개시하고 현시하려고 하지만 그런 언어로는 초월자의 나타남, 초월자는 현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존재한다고 잘못 인식하여 말씀의 배후에 무언가가 숨어 존재한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을 보면 종교는 죽음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말은 옳은 말입니다. 종교의 언어는 옳은 말이어야 합니다. 말씀의 기근 속에 참된 말을 발견하기 위해서 다시 “마음의 지하수”를 캐야 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다시 들어가 그 속에서 참말을 만나야 합니다. 신앙의식의 근거는 참말입니다. 신앙의식의 법칙은 옳은 말입니다. 속 깊은 말 속에, 순수한 말 속에서 나타남 그 자체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와서 그야말로 말씀을 말하는 이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현상, 신앙현상은 종교 언어와 종교적·신앙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속에 참말이 있는지, 거짓말이 있는지는 “경전”을 비춘 말인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말하는 주체, 곧 발화자가 종교서술, 종교서사를 말할 때는 반드시 “경전을 비추어가면서 우물을 깊이 파는”(함석헌, 위의 책, 409쪽) 자가 되어야 합니다.   종교경전에 참 길이 있고 신앙의식의 발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난 말은 거짓입니다. 해석은 있을 수 있으나 순수의식에 의해서 나타난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 발화자는 거짓입니다. 종교인을 모두 거짓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고 삶의 근거를 거짓말로 구성되도록 의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사적 정신에 따라서 공적 정신을 파괴하는 행위가 종교(적 현상)에서도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사적인 영혼에만 관심을 기울이거나 반대로 사적인 영혼을 무지하게 만드는 종교 혹은 공적인 영혼을 좌지우지하는 종교로 인해서 공적 영혼은 병들고 사적인 영혼은 깨어나지 못하는 삶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Hannah Arendt, 김선욱 옮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200쪽).   앞에서 종교 지향성은 외물이 아니라 내적 세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식입니다. “현란한 광채를 꿈꾸는” 정신입니다. 가능한 한 순수의식이어야 합니다. 마음의 근저에 순수함과 맞닿아 나타남 그 자체는 인간의 삶과 신앙을 일깨웁니다. 말로써도 순수한 나타남 그 자체를 다 서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내면의 의식의 심층으로 내려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초월자를 독대해야 하는 신앙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더불어 말을 듣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하십시오. 발화자가 나타남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와 상관하면서 나타난 말씀인지를, 신앙 반성에 입각한 말인지를 잘 인식해야 합니다. 더불어 아직 한 번도 가본 길이 아니지만, 그 낯선 길을 경전에 기대어 가보도록 안내하고 그 경전에서 ‘생명의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발화자와 청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진리의 길, 낯선 길은 침묵만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수런수런”, “두런두런”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 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 세계』 등이 있다. 
    • 한국교육
    • 학술정보
    2014-08-1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