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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리텍서 새 도전, 이색 신입생 열전
    한국폴리텍대학 광명융합기술교육원 증강현실시스템과 이주호 씨가 천문관측 가상현실(VR) 앱(app)을 제작하고 있다.     [타임즈코리아] ‘기술로 세계 제패’ 포부를 품은 청년도, 코로나19로 무대에 오르지 못한 연극배우도 한국폴리텍대학(이사장 직무대리 임춘건)에서 새 도전에 나선다. 폴리텍은 올해 입학한 신입생의 다양한 사연을 공개했다. “세계 제패가 목표” 고교 동창의 도전 인천캠퍼스 산업디자인과 김채환(19·남) 씨와 전우진(19·남) 씨는 고교 동창이자 기능계 라이벌이다. 김 씨와 전 씨는 구미전자고 3학년이던 지난해 전국기능경기대회 그래픽디자인 직종에 출전해, 나란히 금메달과 은메달을 거머쥐었다. 이들은 5월에 있을 국제기능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준비와 학업 병행에 바쁘다. 김 씨는 폴리텍이 “기술 숙련에 최적화된 환경”이라며, “어렸을 적부터 키워온 ‘세계대회 제패’와 ‘기술 명장’이라는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기분”이라고 입학 소감을 밝혔다. 또 2D 그래픽디자인 중심이던 고교 과정과 비교해 “전공 교과 선택 폭이 넓고,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교수님의 세밀한 지도 덕분에 심화해 배울 수 있어 좋다.”라고 만족감을 드러냈다.무대와 카메라 밖에 선 전·현직 배우 연극무대에 서던 홍재웅(26·남) 씨는 스마트팩토리 기술자로 인생 새 막을 열기 위해 폴리텍에 입학했다. 고교 2학년 때 극단 생활을 시작한 홍 씨는 예술대학에 진학해 연극 외길을 걸었었다. 홍 씨는 “무대에 설 기회가 줄어들었고, 동료들도 하나둘씩 새 길을 찾아 떠났다.”라며, 공연계가 코로나19에 잠식되면서 떠밀리듯 새 일을 찾아야 했던 이유를 설명했다. 홍 씨는 전자부품 제조업체 생산직으로 17개월간 계약직 근무를 하다가, 함께 일하던 반장의 권유로 구미캠퍼스 AI전자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10개월간 스마트팩토리 운영 관리 실무를 집중적으로 배워나간다. 현직 배우 이동현(19·남) 씨는 서울강서캠퍼스 패션디자인과에서 어렸을 적부터 관심 있던 패션 공부를 시작했다. 앞서 같은 과를 졸업한 누나 이서연(21) 씨 권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호텔 델루나’, 영화 ‘브로커’ 등에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 중인 이 씨는 “체계적으로 패션을 공부하고 배우로서 탄탄히 필모그래피(filmography·작품 목록)를 쌓은 다음, 내 정체성을 담은 브랜드를 출시하고 싶다.”라는 포부를 밝혔다.천문학도가 찾아 나선 ‘새 우주’ 메타버스 천문학도 정주호(30·남) 씨는 디지털 신기술을 배워 ‘새로운 우주’ 메타버스를 ‘내 손으로 구현해 보겠다’라고 마음먹었다. 정 씨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천문대에서 4년 4개월 일하고, 폴리텍 광명융합기술교육원 증강현실시스템과에 입학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천문교육을 하다가 메타버스 활용 가능성에 주목해서다. 정 씨는 “증강·가상현실(AR·VR) 기술이 적용되는 산업 분야가 넓어지는 걸 보면서, 관련 기술을 익혀 기존 전공과 융합하면 효과적인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 싶었다.”라고 입학 동기를 밝혔다. 그는 “아이디어를 구조화하고 프로그래밍해 콘텐츠 완성도를 높여갈수록 성취감을 느낀다.”라고 교육 참여 소감을 전했다. 임춘건 이사장 직무대리는 “폴리텍은 국민을 위한 평생 직업능력개발 기관답게 누구나 도전과 성장의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곳”이라며, “저마다 시작점은 달라도, 능력과 적성을 살려 사회로 진출하는 데 꼭 필요한 경로가 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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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3
  • 2021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 초등생은 운동선수, 중·고생은 교사 선호
    [타임즈코리아]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원장 류장수)은 ‘2021년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의 결과를 발표하였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은 2007년부터 본 조사를 통해 매년 학교급별 진로교육의 전반적인 현황을 조사하고 있다. 이번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의 주요 결과는 다음과 같다. 2021년 학생 희망직업 조사 결과, 1~3위의 희망직업은 운동선수, 의사, 교사 등으로 전년도와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온라인기반 산업의 발달로 코딩 프로그래머, 가상(증강)현실전문가 등 컴퓨터공학자/소프트웨어개발자 희망직업의 순위가 전년 대비 상승하였다.     희망 직업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중학생 63.2%, 고등학생 76.3%로 나타났고, 희망 직업이 없는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몰라서’ 직업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학생들은 희망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요소로 ‘좋아하는 일이라서(초 53.9%, 중 48.5%, 고 43.0%)’를 가장 많이 응답하였다. 희망하는 진로활동은 초․중․고 학생 모두 진로체험을 1순위로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로에 도움이 되고 향후에도 계속하고 싶은 진로체험유형으로 중학생과 고등학생 모두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현장직업체험형을 첫 번째로 꼽았다.     흥미와 적성, 희망직업 등 진로에 관한 대화를 부모와 가장 많이 하는 학생은 중학생인 것으로 나타났다.     ‘나의 흥미와 적성, 희망 직업’에 대한 부모와의 대화는 초등학생은 월 1~2회(23.2%), 중·고등학생은 주 1회(중: 26.1%, 고 : 26.9%)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학부모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진로정보로 초등학교 학부모는 ‘자녀의 흥미·적성 파악 정보(4.43점)’, 중·고등학생 학부모는 ‘진학·입시 정보(중 4.43점, 고 4.43점)’를 꼽았다. 중·고등학생 모두 ‘커리어넷’으로 진로정보를 획득하는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진로정보 획득경로 중, ‘커리어넷(중 44.6%, 고 54.0%)’, ‘워크넷(중 19.6%, 고 30.2%)’, ‘인터넷 동영상(중 25.4%, 고 26.3%)’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중·고등학교 관리자는 학교 진로교육 활성화를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전문적인 인력 확보 및 역량 제고(초 39.1%, 중 43.3%, 고 51.5%)’, ‘진로교육 활성화를 위한 학교 교육과정 및 수업 개선(초 41.9%, 중 38.4%, 고 38.1%)’, ‘진로교육 관련 예산 및 환경 지원(초 40.1%, 중 33.0%, 고 28.1%)’ 등을 꼽았다. 초·중·고등학교 진로전담교사도 ‘전문적인 인력 확보 및 역량 제고(초 51.8%, 중 43.3%, 고 47.6%)’, ‘진로교육 관련 예산 및 환경 지원(초 43.3%, 중 43.4%, 고 31.1%)’, ‘진로교육 자료 및 정보 확충(초 38.1%, 중 29.7%, 고 32.4%)’ 등을 꼽았다.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의 결과는 국가통계포털과 진로정보망 ‘커리어넷’ 누리집에 탑재·공개할 예정이다. 교육부는 이번 조사 결과를 토대로, 향후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진로교육정책을 추진할 예정이다. 학생들이 스스로 진로를 설정하고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학교 진로교육을 혁신한다. 교과 연계 진로교육을 활성화하여 학생들의 진로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고, 교과 이수 경로와 연계하여 학습자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다양한 체험활동 중심의 진로탐색 및 설계 활동을 지원하며, 진로연계학기 운영을 바탕으로 상급학교와 연계한 진로활동을 지원한다. 인공지능, 확장 가상 세계(메타버스) 등 신기술의 급속한 발달과 4차 산업혁명 본격화에 대비하여 학생들의 신산업 분야 진로체험 기회를 확대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부처 간 공동사업을 발굴․추진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연계를 강화한다. 직업세계에 대한 심화된 체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역사회의 인적․물적 자원을 연계하여 진로교육 생태계를 조성한다. 지역사회에 특화된 산업과 연계한 마을 진로교육 모형을 개발․확산하고, 현재 전국 시․군․구에서 운영 중인 진로체험지원센터(222개소)의 역량을 강화한다. 정병익 교육부 평생직업교육국장은 “4차 산업혁명 등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미래사회는 변동성, 불확실성, 복잡성을 특징으로 하므로, 우리 학생들은 현존하는 직업을 선택하기 보다는 스스로 진로를 설정하고 개척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 나가야 한다.”라고 말하며, “우리 학생들이 진로 역량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2022 교육과정 개정과 발 맞추어 학교 진로교육을 내실화하는 한편, 학교 밖 인적·물적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지역사회 연계도 강화해 나가겠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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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1
  • 성찰적 언어의 환희: 짧은 글들 속에 머무는 긴 생각들
    [타임즈코리아] 진리는 자신의 알몸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도정일은 삶의 예술 혹은 예술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조곤조곤 잘 말해줍니다. 인간의 탁월함(arete), 즉 인간 자신의 능력은 말하기, 이야기하기의 타고 난 능력에 있습니다. 아레테의 인간은 연결과 연결(narrare), 관계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야기(서사, mythos)를 통해서 존재의 확장을 꾀한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기의 탁월한 능력을 가진 도정일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은 ‘의혹의 해석학’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이야기는 상상력이기도 하지만, 본 것에 대해서 시각적 기입하기를 통한 전지전능한 신적 지혜를 풀어 밝히는 듯한 시지각적 시선의 무한한 확장입니다.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봄은 모르는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면에 활자가 기입되는 순간, 활자가 나타날 때에 그 신비함은 세상의 소유, 어쩌면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같은 것을 체험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인의 인문학(도정일, 사무사책방)』에서 저자는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사는 인간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류 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기실 평자가 엮어가는 이 글도 저 두 가지 삶의 방식의 유한성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습니다. 죽음의 순간, 오류의 순간을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고통에 대한 겸허한 사유는 늘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것도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죽음의 한 과정을 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환대는 나만이 아니라 타자에게까지 의식과 삶을 넓혀나갑니다. 손님처럼 상호간에 배려하고 베푸는 행위는 인간이 지닌 공통의 윤리의식이자 예의입니다.   텍스트(text)처럼 직조된(texture) 사회 속에서 우리는 모두 이방인입니다. 편하지 않은 삶의 나날들, 유한한 시공간 속에서 산다는 한계상황이 서로를 위해 환대하기 마련입니다. 텍스트 이야기는 그렇게 낯선 일상들 속에 특별한 사건들이 기입되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인문(학)이라고 합니다. 저마다 남긴 삶의 자취와 흔적이 인간과 세계의 무늬가 되는 법입니다. 설령 고통과 한숨과 좌절과 포기의 연속이라도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삶과 너의 삶이 건축(Bildung; bauen; bin)되는 게 인간의 텍스트요 삶입니다. 침묵의 고요한 몸짓이라 할지라도 삶과 삶 사이에 긴 여운이 남는 것처럼 호흡과 호흡을 가다듬어 숨을 쉬어야 합니다. 때론 침묵의 해석학, 침묵의 아픔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직시하게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인문적 삶은 나와 타자의 삶이 다 ‘좋은 삶’이어야 합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만 좋거나 아니면 타자에게만 좋거나 할 때 느껴지는 불만과 불평입니다.   기술(techne)이든 종교든 삶의 관대함과 관용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폭력과 이기성으로 점철된 욕망의 분출만이 난무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의 인문적 삶은 성찰하는 삶을 지향합니다. 성찰이 없는 삶, 음미하지 않는 삶은 아무리 좋은 이야기로 일구어진 삶이라 할지라도 결코 의미 없는 건조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자기를 대상화하는 읽기, 인간 읽기, 인간 자신의 이해를 역설합니다. 자기의 성찰과 인간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자기 자신마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삶의 문법, 인간다운 문화 문법을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인간은 삶의 텍스트 너머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지구상에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살아온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성찰적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직조하는 삶의 문법은 무엇일까요? 그 단초를 찾고 싶다면 《만인의 인문학》을 펼쳐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자의 조근 조근한 삶의 인문학, 성찰적 인문학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제목처럼 이 책은 만인을 위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감히 단언컨대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선택된 소수를 위한 책일 수 있습니다. 삶의 예술을 위해 자기를 성찰하는 자신이 저자의 텍스트에 자기를 비추고 삶을 새롭게 직조하기 위한 존재라면 이미 소수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니체(F. W. Nietzsche)의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처럼 “만인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 도 아닌” 책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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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2
  • 존재는 텅 빔(無; Leere, Nichts)이다
    [타임즈코리아] 하이데거나 노장철학을 논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적 사유의 맥락을 해체한 인물이요, 노자와 장자는 공자와 같은 정형화된 논법을 타파한 동양철학자입니다. 굵직한 한 사람의 철학을 다 우려낸다는 것도 버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닌 이 둘을 조합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철학자 윤병렬은 이 둘을 존재(Sein)와 도(道, Tao)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손쉽게 풀어 밝힙니다. 하이데거의 시원적 사유, 길(Weg), 침묵 언어, 무위,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 등의 유비점들을 찾아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흐름은 매끄럽습니다. 서양과 동양의 정신적 간격이 다소 멀어 보이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단순한 비약이라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를 말하고, 도를 말하는 순간에 이미 존재도 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역작은 존재와 도가 결코 언어로서 규정될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르케(arche)를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마치 다 안다고 하는 인식론적 오류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Nichts)가 단지 없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무가 그 자체로 물어져야 한다면, 그것은 먼저 주어져 있어야 합니다. 다만 저자는 인식론적 오만을 거두고 존재론적 겸허함의 삶을 살라고 권유하고 있는 듯합니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한다”(sein-lassen)는 말이나 “도는 존재자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두 개의 언어가 번역불가능성의 근원어(Urwort)의 문제임을 깨우쳐 줍니다. 이는 존재나 도는 삶의 방식, 삶 그 자체로부터 개시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의 방식은 ‘초연한 내맡김’(Gelassenheit)입니다.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이 대도시로 모여들고 깊이 성찰하는 삶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말고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노자도 무위자연을 말합니다. 이는 작위적인 행위를 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퇴락한 존재인 일상인(das Man)으로 살거나 장자의 물(物)에 빠지지 않고 자연 그 자체, 혹은 세계의 근거인 존재의 목자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존재는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옵니다. 인간은 그 존재의 언어를 뒤따라 말하고 사유하고 응답할 뿐입니다. 존재의 말씀은 인간이 세계에 어떻게 도달해야 하는지, 세계에 길을 내줍니다. 길을 가야하고 도를 깨우쳐야 하는 인간이 존재의 빛에 의해서 살아야 하는 당위성은 존재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언어의 말 걸어옴은 우리가 어떤 경험(erfahren)을 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길 위에서 걸어감을 통해 그 무엇에 다다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종국에는 다시 시원적인 말인 도, 그리고 “본래 길”(eigentlich Weg)에 이르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길을 내면서 움직이는 일입니다(Be-wëgen). 들길에서 외치는 단순하고 소박한 소리에 따라서 사는 삶,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 무위자연의 소리에 따라서 사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상실했습니다. 소요유(逍遙遊)의 장자적 삶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존재물음(Seinsfrage)은 절실해집니다. 도에 대한 사유도 간절해집니다. 하이데거는 세계로 던져진 “너는 실존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세계에 대한 배려(Besorgen)와 이웃에 대한 실존적 심려(Fürsorge)로서 관계 맺음의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이러한 실존적 삶의 방식은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감을 요구합니다. 그 이정표를 하이데거의 존재와 노장철학의 도를 통해서 알아듣기 쉽게 비교, 분석한 이 책(『윤병렬, 하이데거와 도가의 철학, 서광사』, 2021)은 윤병렬 선생님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케 합니다.   존재 망각과 고향상실의 시대라 규정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혜안이 동양철학의 도에 대한 존재론적 삶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신 윤병렬 선생님의 노고와 역작에 깊이 감사할 뿐입니다.   평자가 감히 이 책의 학문적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민중도 이 책을 통해 저자의 해석학적 언어와 씨름을 해야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민중들이 이 책을 읽고 생각을 모은다면(legein; logos) 하이데거와 도가철학이 예언자의 길을 찾아주는 친근한 동반자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글쓴이 김대식 박사는 숭실대학교 철학과에서 강의를 하면서 함석헌평화연구소 부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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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9
  • 연세대학교 인공지능 대학원 개원식 개최
    [타임즈코리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6월 10일 연세대학교 인공지능 대학원 개원식을 개최했다고 밝혔다. 개원식에는 과기정통부 조경식 제2차관, 연세대학교 서승환 총장,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및 산업계 협 력기업의 대표가 참석하여 인공지능 대학원의 성공적 추진을 격려하였다. 연세대학교 인공지능 대학원은 2020년에 선정되었으며, 매년 50명의 학생을 선발하여 인공지능 분야의 세계적 연구역량을 갖춘 석·박사급 전문인재로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 핵심이론에서 융합교육으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을 개설하고, 우수한 교육·연구 역량을 보유한 전임교원도 지속적으로 확보하여 심화형 인재를 양성한다는 계획이다. 세부적으로, 인공지능 핵심 이론교육은 인공지능 학습모형(모델) 고도화를 위한 원천기술, 인공지능 모형(모델) 최적화를 위한 시스템 설계 기술, 인공지능 영상·음성·언어 인지 고도화 기술 등 세 개의 축으로 구성하였으며, 인공지능 융합교육은 의료, 금융, 공학, 인문사회 등 타 학문 분야의 14개 학과가 참여하여 운영하고, 각 분야에 인공지능 기술 확산을 위한 연구 프로그램도 가동한다. 아울러, 인공지능 연구 및 산학 협력을 뒷받침하기 위해 100억원 규모의 자체 투자를 통한 대규모 인공지능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다양한 학내 창업지원 프로그램 및 창업자금 지원 등과 연계하여 학생들의 창업·성장도 지원할 예정이다. 과기정통부 조경식 제2차관은 “최근 인공지능이 모든 산업에서 활용되어 디지털 전환을 촉발하고 있는 만큼 우수한 역량을 보유한 인재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라고 언급하며, “연세대학교가 세계적 수준의 인재양성과 함께 산업계와 협력을 통해 국가 디지털 전환 가속화에 힘을 더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정부도 우수한 인공지능 인재가 산업 현장에 적기에 공급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대학원 프로그램은 2019년부터 선정이 시작되었으며, 현재 인공지능 대학원 10개, 인공지능융합연구센터 4개가 선정되어 운영되고 있다. 7월 중으로 인공지능 중심지(허브)를 신규 선정하여 산학연 협력과 인공지능 연구․인재양성 체계를 고도화할 예정이다.
    • 한국뉴스
    • 사회
    2021-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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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기준이 달라야 하는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배려와 포용은 약자나 국민들을 위한 자세 ▲ 소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정권, 다른 당, 다른 후보들에게는 조금만 문제가 있는 듯해도 맹공을 퍼붓는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는 언제나 넓은 아량과 배려라는 포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약자나 국민들을 생각하는데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자신에게 만큼은 유독 관대한 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4·11총선은 끝났지만 관련자들의 논문 표절, 공천시비, 권력층 인사들의 비리 등의 문제가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서 유독 쉽게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던 기준제시가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기도 하고, 적극적 해명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를 하고 나서기도 한다. 소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정권, 다른 당, 다른 후보들에게는 조금만 문제가 있는 듯해도 맹공을 퍼붓는다. 하지만 자신과 연관된 문제는 언제나 넓은 아량과 배려라는 포용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약자나 국민들을 생각하는데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자신에게 만큼은 유독 관대한 것은 이기주의의 전형이다. 공직자가 가져야할 덕목 가운데 으뜸은 봉사정신이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발상의 소유자라면 봉사정신이 앞서야 하는 공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심지어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도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윤리경영을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잘못도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잘못보다 더 큰 문제는 핑계나 합리화(rationalization)다. 합리화는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자기 보호적 방어기제(防禦機制, defense mechanism)다. 이는 스스로 잘못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고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변화하여 새롭게 되려는 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적 승인을 얻을 요량으로 변명이나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잘못을 저지른 진정한 동기를 감추고 자기를 보호하기에 급급한 모습은 스스로 지도자적 권위를 추락시키고 부정하는 행위다. 그렇다고 잘못이 결코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빛과 같아서 날이 밝으면 어둠 속에 묻혀있던 사실들을 드러내게 만드는 것이다.입만 열면 정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의 반민주주의적, 비윤리적 행태는 겉으로만 민주와 정의를 부르짖던 세력들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자신들이 말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 과정은 잘못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패권주의에 물든 나라들은 때론 ‘평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들이 치켜든 명분용 횃불은 타인을 비추는 데에 있어서는 과도하리만치 밝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신을 조명하는 데에는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와 하나이지 분리가 될 수 없다.한비자(韓非子) 세난편(說難篇)에 나온, 방패와 창을 팔던 楚(초)나라 장사꾼의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당착(矛盾撞着)의 이야기를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파는 방패와 창이 천하의 어떤 것도 막을 수 있고, 뚫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스스로 거짓임을 입증하는 것일진대, 그것도 모르고 소리치며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면 우습고 허무맹랑한 꼴이다. 이런 모습을 오늘 날에도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는 스스로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홍보하면서,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한 지도자로서 봉사하려고 한다는 꼴이니 말 그대로 모순이라는 것이다.모든 것이 만들어진 본래적 목적에 따라 쓰이고 작동되어야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다. 자동차는 사람을 태우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동차를 타지 않고 밀고 다닌다면 이거야말로 우스운 꼴이다. 이것은 자동차로서의 효용가치와 아름다움을 잃은 셈이다. 국민의 대리를 위해 뽑은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해 대리하고 봉사하지 못한다면 이로써 이미 그 아름다움과 효용가치를 상실한 것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장 13절)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Coram Deo, in front of God)”라는 인식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날마다 올바른 삶을 위하여 경각심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있다. 비록 혼자 있다고 할지라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올 곧은 몸가짐을 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말이다. 지도자들이여!보이는 곳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비록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라도 ‘국민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자세로 정직하고 성실해야한다. 그렇게 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이 만족되고 기쁠 것이며 국민들은 그를 아름답다할 것이다. 기준은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늘 변함없이 같아야 한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인격의 소유자라면, 더 나아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아량과 사랑의 시야를 소유해야 할 것이다.최대식 타임즈코리아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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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9
  • 자신의 길을 내라!
    남이 낸 길은 똑같은 흔적을 남기는 것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길은 멈춘 적이 없다. 길이 길 아닌 적도 없다. 길은 사람과 함께 존재해왔기에, 길은 사람의 고향이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그래서 길은 지나감이요, 지나가야 할 길인 것이다. 스스로 길을 내고 살아야 하는 살아감의 길, 즉 삶의 길이다. 길을 내지 않아도 길은 길이다. 길은 선험적이고 초월적이다. 함석헌이 “사람이 길을 낸 것 아니요, 길을 걷는 것도 아니요, 도리어 길에 떨어진 한 알이 사람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인간혁명의 철학2」』, 한길사, 1983, 165쪽)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수많은 길이 있다. 사실 길 없는 곳이 없다. 다닌 길은 다닐 길이고 다닐 길은 계속 다닐 길이다. 그러나 길 아닌 곳은 가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 다닌 길을, 간 길을 가려고 한다. 자국이 남은 길이 편하고 안심을 할 뿐만 아니라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길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길을 내는 것이다. 반드시 참 길, 삶의 길, 다님 길을 내야 한다. 내가 내야 비로소 길이 된다. 다닌 길을 가는 길은 진리/참 길이 아닐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 한다. 가야 할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함석헌은 “길이 참이다. 기르는 것이 참이다. 갈 길 있는 것 아니다. 감이 길이다.”(위의 책, 165쪽)라고 말한다. 가고 감. 가는 것은 삶을 감는다, 마음을 감는다는 것이다. 가는 것은 감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삶을 감고, 마음을 감기 위해서 선뜻 길을 가려하지 않는다. 오직 남이 낸 길을 따라 똑같은 흔적을 남기려고 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길이 나지 않는다. 새로운 길이 나야 새로운 삶이 열린다. 새로운 길을 가야 새로운 씨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길은 기르는 것이다. 나를 기르는 길이다. 그런데 그 길은 같은 길이 아닌 늘 다른 길이다. 길은 늘 거기에 있지만 그 길을 가는 나는 다른 시간, 다른 길을 만난다. 길의 신비, 길의 진리는 현상을 넘어 우리를 이끄는 세계를 지시한다. 길은 있음이지만 반드시 가야 있는 것이다. 길의 형이상학은 넘어선-곳, 넘어서-있는-곳에 새로운 나를 놓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길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동시에 갖는다. 새로운 존재는 시간성을 나타내지만, 넘어서-있는-곳, 혹은 넘어서-있을-곳은 공간성이다. 넘어서-있는-곳은 다시 너머에-있는-곳이다. 길은 ‘너머’가 없다면 ‘넘어’는 무의미하다. 의미 없는 너머의 길은 의식과 행위의 불가능성을 낳지만, 길과 너머는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원인체이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항상 넘어서, 너머에-있는-곳을 향해 간다. 길의 형이상학은 너머의 존재를 해명하려 한다. 그것은 길을 가는 자가 향해-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향해-있음의 존재는 향해-있는 존재의 본질이 향해야-할-곳을 본다. 지금 향해-있는-곳으로부터 향해야-할-곳, 즉 너머에-있는-곳으로 향해 가려고 한다. 저축은행 사태, KTX 민영화, 미국산 수입쇠고기 반대, 총선부정, 원전반대 등등의 모든 이슈들이 길과 연관된 것들이다. 국가 정치경제는 이미 낸 길을 날 길로 바꾸려 함인지, 아니면 낸 길을 새로운 길로 하겠다는 것인지, 씨알은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씨알은 난 길을 낼 길로 알고 자기의 길인 양 가고 말 것이다.길은 길기 때문에 아무도 지레짐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가야 비로소 길을 알 뿐이다. 모두가 저마다의 길을 간다. 길을 가기 전, 길을 가는 도상이라도 그 길이 참 길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현재 향해-있는-곳에서 과연 향해야-할-곳으로 가려고 하는 것인지를 자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리로 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할 것이다.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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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8
  • 외모지상주의 과연 행복의 돌파구인가?
    외모가 서로 다름이 아닌 우열적 차이로 수용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하나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것 ▲ 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더불어, 하나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을 발하는 공동체로서의 조화를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선(善)이며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문제는 행복에 대한 기준이 문제다. 기준이 잘못 되면 모든 것이 잘못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잘못된 기준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그 가운데 외모지상주의 또한 만만치 않은 기세다. 외모지상주의(Lookism)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보통신의 물결을 타고 전염병처럼 급속하게 지구촌으로 번져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유독 심한 것 같다. 인구대비 1인당 화장품 소비량이나 성형수술의 비율이 세계최다 수준이다. 이제는 성형도 하나의 스펙(Specification)으로 자리 잡고 있는 분위기다. 외모가 서로 다름이 아니라, 우열적 차이로 수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외모도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인종차별, 성차별을 넘어 외모차별이 개인 간의 우열과 성패에 적극적으로 개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연구 결과들은 외모가 사회생활에서의 관계나 취업 등에 상당한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모 경쟁력을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외모가 잘나야 자신감도 생기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니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성형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 인류의 재앙이 숨어 있다. 창조섭리에 순응하는 조화와 아름다움이 아니라 저급한 자기 생성적 쾌락주의가 여기에 물든 사람들을 자기 입맛대로 제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끝없는 비교의식과 우월주의를 부추겨서 마침내 인간을 파멸로 몰아간다. 인간의 기계화, 상품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몰개성화(Deindividuation)를 의미한다.몰개성화란 말 그대로 모두의 개성이 하나로 되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각자의 개성이 각각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는 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봉(Gustave LeBon)에 따르면 군중 속에 있는 사람들은 몰개성적 현상으로 인해 충동적, 야만적, 파괴적인 본능들을 충족시키려는 것에 보다 자유롭게 노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획일주의적 발상의 외모지상주의에 의한 몰개성화는 엄청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우리는 자기 생성적 저급한 쾌락주의의 대가가 그렇게 만만치 않음을 직시해야 한다.  외모지상주의에 의한 성형은 자기 파괴적 행위다. 더 예뻐지려는 자기 생성적 쾌락의 발상이 외모라는 겉모양의 파괴를 넘어 자기 정체성과 개성이라는 본질적 순수와 아름다움을 송두리째 파괴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천을 정비한다고 콘크리트로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놓으면 당분간은 멋지게 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생태계는 파괴되고 생명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된다. 비유하자면 외모지상주의적 발상에 의한 성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콘크리트로 단장한 하천이 얼마동안은 좋아보여도 그 본질적 가치와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듯이 외모지상주의는 결국 인간성을 파괴하는 행위다.전파교란 행위처럼 인간의 아름다움이라는 본질적 가치를 교란하는 파괴적 속임수다. 하천의 하천 됨은 물고기는 물론 온갖 생물들이 살아가고, 스스로 정화하며 자연과 인간에게 상생적 유익으로써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간됨은 다양성의 표출과 더불어, 하나 되어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움을 발하는 공동체로서의 조화를 드러냄에 있을 것이다. 여기에 창조섭리에 부응하는 인간의 행복이 있지 않겠는가? 박요섭 박사 타임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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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4
  • 재능은 자신만을 위한 시혜적 방편인가?
    배워서 남 주는 것, 소통과 조화의 아름다운 세상재능은 자신과 세상 모두를 위해 위탁된 것 ▲ 인간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써 존재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경쟁과 전투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사랑하며 나누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동일한 지능 지수와 외모를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각자 어디가 달라도 다른 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손가락의 지문도 똑같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창조의 신비가 놀라울 뿐이다. 요즘 각 학교들은 중간고사를 치르는 기간이다. 피곤에 찌든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진한 한숨이 베어 나온다.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표시일 것이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얻지 못한 것이야 본인의 탓이다. 그러나 동일한 열심을 내더라도 지능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결과적으로 그만큼의 거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이런 현실을 감안한 평가적 판단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운동경기에서는 체급별로 치르는 것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지 않으면 체격조건이 좋은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평등에 대한 것들에서도 다양한 이해와 기준이 필요하다. 무조건 허용한다고만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허용적 평등은 소극적 기회균등과 차별 철폐적 성격이 강하다. 이런 점에 대해 적극적 기회균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보장적 평등이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조건을 부여하는 조건의 평등, 취약한 부분을 지원하거나 보상하는 결과의 평등도 있을 수 있다. 평등에 대한 어떤 적용도 그것이 기계적인 적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인간의 존재적 가치와 의미를 구현하는데 얼마나 더 바람 직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의 실현은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가령 수많은 금은보화를 준다고 해도 그 조건이 무인도에서의 삶이라면 그 순간 그 가치는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관계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는 것이다.인간은 ‘너와 더불어 나’라는 공동체로써 존재적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경쟁과 전투의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사랑하며 나누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성적 지상주의식 교육은 나만 잘되자는 것이다. 소위 ‘배워서 남 주느냐’는 식이다. 배워서 남에게 주어야 사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다. 이렇게 해야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지고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그런데 재능이 자신만을 위한 스스로의 생성적 산물인양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창조섭리에 대한 도전이요, 창조세계에 대한 파괴적 행위다. 따라서 이것은 죄악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도층이 더  높은 도덕성을 발휘하여, 보다 앞장서서 책임이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마땅한 것이다. 좋은 재능은 자신만을 위해 시혜(施惠)를 베풀도록 부여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은 물론 세상 모두를 위해 위탁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이 계절에 순응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모든 사람들은 주어진 재능에 따라 자발적 기쁨 가운데 의미 있는 수행을 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이런 삶을 실현해나간다면 이것은 가장 아름답고 복 된 생명적 교감과 열락(悅樂)이 될 것이다. 정부나 교육당국의 모든 정책도 이런 안목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게 하는 인재육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입법과 제도가 우선적으로 마련 될 때 학교 교육은 교육다운 교육으로써의 아름다움을 발하게 될 것이다.박요섭 박사 타임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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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5-02
  • 다문화에 이중적 잣대는 안 된다!
    ‘다’는 다름이 있지만 다 같은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내포하는 개념 ▲ 한국 내에 문화적 다양성, 민족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다’에 대한 존재와 이해를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문화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큰 지혜를 지닌 사람은 여유가 있지만 작은 지혜를 지닌 사람은 남의 눈치만 본다. 위대한 말은 담담하고 너절한 말은 수다스럽기만 하다.”(大知閑閑, 小知閒閒, 大言炎炎, 小言詹詹.)-莊子아마도 우리 민족은 같은 핏줄을 타고난 동포가 해외에서 잘 나가는 위치에 서게 되고 세계 언론에 주목을 받게 되면 박수를 보내싶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가 보다.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왜소한 국가에서 사는 우리 국민의 속성인지는 몰라도 선진국에 대한 엘리트 콤플렉스도 작용을 하는 것 같다. 한국인으로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한 유명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은행의 총재 후보로까지 오르내리는 김용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와 비교하고자 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필리핀에서 대학도 중퇴하고 한국으로 시집와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까지 선출된 이자스민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의 태어난 나라에서보다 현재 국적을 취득한 나라에서 훨씬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비교에서 우리의 잣대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성공적인 출세길을 달리고 있는 김용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에 이자스민에 대해서는 그렇게 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외국인혐오증(Xenophobia)으로 인한 인격적 폄하도 없지 않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이미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말들을 하건만 타인에 대해서 환대하지 못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다문화(多文化)에서 ‘다’(多)는 단순히 많다거나 다양하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다’는 다름이 있지만 다 같은 한 민족이라는 동질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다. 설령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체성이 인간성이나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선진국에 대한 우월의식, 백인 선망의식 같은 것들이 공존하면서 피부색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 태도를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다’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내에 문화적 다양성, 민족적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다’에 대한 존재와 이해를 달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문화적 현실을 타개해 나가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다’는 포개어짐이다. 여러 개가 중첩되어 하나가 되는 현존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에는 특별한 시공간이 있는 장소이다. ‘다’는 거기에-있음이라는 존재 의미를 드러낸다. ‘다’는 다른 어떤 말보다도 우선성을 점유한다. 그러므로 ‘다’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그 다음의 언어와 행위가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다’의 사태를 미리 내다 본 사람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다. 그는 “본국인이 기피하는 업종에서 기꺼이 일해 줄 노동력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값싼 노동력의 부족으로 자국민이 제공할 수 없는 용역에 대한 수요는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제3세계에서 제1세계의 인구 이동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보았다(에릭 홉스봄, 안토니오 폴리토, 강주헌 옮김,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끌리오, 2000, 184-185쪽).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에게도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때가 있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소한 그들이 이제 이 사회의 뼈아픈 고통과 여러 난관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면 영원한 이방인은 없다. 몸이 낯설다 하여서 그들의 정신세계마저 혐오스러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땅에서 풀 한 포기, 돌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이성을 가진 존재의 삶과 행위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자본은 이미 세계 자본이요, 정치는 세계 정치가 되었다. 이 지구사회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공공의 선을 위하여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어느 누구도 손가락질 받거나 차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대부분의 이민자가 제3세계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인종 차별은 피할 수 없다... 다른 용모와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은 인정받기가 훨씬 어렵다”(에릭 홉스봄, 안토니오 폴리토, 강주헌 옮김,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 끌리오, 2000, 186쪽)라고 인종차별문제에 대해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하지만 결코 이 사회가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차별주의) 만큼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와 더불어 나’는 인간의 본질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함인데, 이에 대한 몰이해나 부정은 그야말로 모순이라는 것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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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합정보
    2012-04-30
  • 표절은 해도 되는 것인가?
    정치적 영웅주의가 아닌 진실과 신뢰의 회복이 필요 ▲ 우리는 온갖 변명과 핑계로 얼룩진 한 국회의원 모습보다는 땀 흘려 얻은 금메달을 국민들의 가슴에 안겨둔 정직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아들을 더 사랑하고 원한다. “연구할 때 어떤 것이 맘에 드는지 안 드는지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일 수 있는지 여부만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최대한의 지식을 동원하여 진리로 간주할 수 있는 것만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Johann Gottlieb Fichte적어도 학자라면 자신의 생각을 독창적으로 개진하고 사유의 깊이에서 우러나온 연구 결과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식의 전체 보고(寶庫)를 풍요롭게 해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박사’가 하도 많아서 발에 차이는 게 박사라고는 하지만, 원래 박사란 자신의 연구 분야의 독창성을 인정받은 결과로서 주어지는 명예스런 직함이다. 그런데 최근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 국회의원 당선자의 논문 표절 시비로 시끄럽다.당연히 정치적 이성의 판단과 국민 정서상 낙선이 됐어야 함에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학자의 소양으로서도 부족한 사람임은 물론이거니와 양심을 가지고 국민의 정치 이성을 대변해야 할 사람인 국회의원의 인격과 기본 자질을 보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논문 표절 시비로 자신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았는가. 국회의원은 국민을 대신하는 입법기관이다. 내연이외연(內燃而外延)라는 말이 있다. 안에 있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표절은 무방하다는 입법도 괜찮다는 것인가? 이런 문제로 사회,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서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그만두는 것이 잘못을 인정하는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더욱이 한때 태권도 국가 대표 선수로서 나라를 빛낸 인물이었던 사람이 아니가. 더더욱 그의 올곧게 보인 이미지가 유권자들의 선택에 큰 기준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부각시켜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정치 일선에 나타났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정치적 역량을 논함에 있어 그 자체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변명을 하여도 진실은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학자가 되기 위해서 출발점을 찍은 자신의 논문에서조차도 신뢰를 할 수 없다면 앞으로 정치 일선에서 일어나는 그의 여러 정치적 사태들에 대해서 어떻게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정치는 막무가내나 영웅주의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도 안 된다. 굳이 그가 정치를 하고자 했다면 그의 경험적 지평에서 체득된 진정한 무도인의 자세 정도는 갖고서 시작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무예를 익히는 사람들에게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 있다. 적을 제압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먼저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짊을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날렵한 발차기로 상대를 제압했지만 쓰러진 상대를 따뜻하게 일으켜 주었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국민들은 아직도 그 모습을 기억하며 일련의 사태를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갖 변명과 핑계로 얼룩진 한 국회의원 모습보다는 땀 흘려 얻은 금메달을 국민들의 가슴에 안겨둔 정직하고 믿음직한 대한의 아들을 더 사랑하고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결코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보다 못하지 않다.   공자(孔子)는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학자라면 학자답게, 정치인이라면 정치인답게, 무도인이라면 무도인답게 처신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명예를 지켜야 한다. 그를 사랑한고 신뢰한 국민들에게 더 이상 실망을 줘서는 안 된다. 이 순간에도 정당의 정치 전략과 정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인 개인의 정치적 신념과 진리, 정의의 구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김대식 박사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 한국사상
    • 종합정보
    2012-04-23
  • 교육은 교감(交感)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 형성 중요 ▲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충분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가 형성되어 원활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위기에는 죽을 가능성이 있느니만큼 살 가능성 있다. 붙잡으면 생(生)이요 놓치면 사(死)다. 하면 복이요 못 하면 화다. 시간은 늘 위태로운 것이다. 그 뱃속에는 늘 쌍둥이가 들어 있다. 시간의 뱃속을 째 보아도 아무것도 있을 리가 없지만, 그 빈탕 속에서 생 아니면 사가 나온다.”_함석헌(1901-1989)“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불편하다는 점뿐이다.” 우리가 장애인으로부터 일반적으로 듣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표현을 진정한 마음으로 담아내기에는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것 같다. 이 사회에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모멸감, 혹은 비인격적인 대우 등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말이 편안하게 들릴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불리한 조건을 딛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장애인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전에 두 시각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게도 쉽지 않은 대학 과정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일선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한 신문 기사를 보았다. 마음 한 구석이 환해졌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마음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학생들에게 비춰지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위대한 스승으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현대 창조영성가 매튜 폭스(M. Fox)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강한 체험은 늘 자비를 인식하고 익히고 성장시켜 가는 수련장이다... 고통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합당한 자비를 위한 수련장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인생에 있어서 수련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했기에 그들의 장애는 자신들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애가 단절이 아니라 교감을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과연 얼마나 충분한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사귐이 있고[交] 느낌이 있는[感] 관계가 형성되어 원활한 사제지간의 정을 나누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고통을 삶의 수련으로 여겼던 그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교감(交感)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 비록 눈은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사람들에 비해서 더 잘 보는 교사, 더 잘 듣는 교사, 더 잘 느끼는 교사로서 제자들에게는 귀감이 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이 그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는다.마음과 마음이 서로 사귀고 느끼는 것에서 신뢰가 싹트고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교사와 학생의 마음이 서로 무너져 버린 교실에서 교육의 이상을 찾는다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렵기만 하다. 함석헌은 “교육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는, 즉 거저 주는 것이 아니고는 그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런데 교사 노릇을 직업으로 하게 되면 하는 교사 자신의 맘속에도 희생 봉사에서 오는 고상한 감격은 있을 수 없고 아주 냉랭한 지식, 기술적인 것을 주는 데 그칠 수밖에 없고, 받는 피교육자도 저 사람은 우리에게서 값을 받고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는 심리가 암암리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중요한 인격 발달의 양식이 되고 고상한 심정의 전달을 받는 것이 없게 된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93쪽)라고 비판했다.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지식 전수에 그치는 교육이 가져온 폐해는 교실의 황폐화뿐이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사귀고 느끼는 것에서 신뢰가 싹트고 올바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교육(자)의 폭력과 학교 폭력의 배경에는 상호간의 신뢰 문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신뢰는 마음의 교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신뢰의 장벽이 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입시 경쟁, 출세주의,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등이다. 이를 다시 공동사회를 위한 타자에 대한 배려,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선, 정신의 함양을 우선시 하는 인간으로 바꾸면서 공동사회 안에서 공동의 지식, 공동의 자녀, 공동의 인격, 공동의 선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는 인식이 필요하다. 더불어 교사는 학생을 대함에 있어 하나의 교육 대상이나 피교육생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시각 장애 교사들의 공통점은 학생들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파악하여 학생 하나하나를 인격체로 대하려는 심성(心誠)으로 참교육의 색깔을 입힐 줄 아는 교사들이었다.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자신들이 입게 되는 상처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학생들을 성숙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을 해야 한다. 눈은 사물을 파악하는 데 일차적인 기능을 하는 인간의 감각 기관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시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인간 심성이 더욱 중요한 교육의 매체가 되었던 것이다. 함석헌의 말을 빌리면 그들의 마음에 혹은 교육철학에는 ‘덕[밝은 속알]이 있었던 것이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86쪽) 그들은 덕으로서 학생들을 대하고 덕으로서 교육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교사는 자신의 덕스러움으로 인해서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인정하는 덕이 있는 교사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요즈음 우리 교육의 현실 속에서 사(私)는 있는데 공(公)은 없다. 이익만 찾을 뿐이고 덕을 앞세우려는 교육자를 만나기가 점점 더 어렵다고 한다. 명심해야 할 것은 교육한다는 것의 기본은 남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자기교육이 우선이다. 자기교육이 먼저 되어야 남을 교육할 수 있다. 그래야 자기뿐만 아니라 전체를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이 “교육은 인간 살림의 알파요 오메가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서풍의 노래5」』, 한길사, 1984, 172쪽)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실이 살아야 한다. 교실의 주체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다. 그런데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좋은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시각 장애 교사들의 사례에서와 같이 교육은 그 무엇보다도 교감(交感)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해야 할 것이다. 함께 생각하고 호흡하고 배려하며 동행하려는 따뜻한 교감을 통하여 우리 교육의 아름다운 내일을 엿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김대식 -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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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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