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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야기_공자의 『논어』를 다시 읽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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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13.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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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인간 자신의 제2의 차축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자기 다짐으로 읽어야 한다

▲ 고전은 인간 자신의 제2의 차축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자기 다짐으로 읽어야 한다. 고전의 자기 내면화, 자기 인격화, 자기 정신화가 되지 않으면 고전은 학생에게는 논술의 수단이요, 직장인에게는 처세술과 자기 계발의 수단이요, 사업가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 1883-1969)는 자신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인류 정신사의 획기적인 발생 시기를 차축시대(車軸時代, 혹은 축의 시대: Axial age, Achsenzeit)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시대는 대략 BCE 800-200년 사이를 일컫는 것으로서 동서양의 위대한 철학과 종교들이 등장하였다.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고타마 싯다르타, 이란에서는 조로아스터교, 팔레스타인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제2이사야, 그리스에서는 소포클레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소크라테스, 플라톤이 나타났다. 

거명된 사람들만 보아도 인류의 정신이 놀라울 정도로 성장․성숙하였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류는 이러한 유산을 기반으로 인간의 삶과 문화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는 새로운 정신적 혁명을 고대하고 있다. 물질, 기계, 과학, 기술, 의학 등은 인간의 외적 삶을 풍요롭게 하였지만, 정작 정신과 영혼은 황폐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와 불안을 달래 줄 도구들을 찾고 있지만, 그럴수록 인간의 마음은 건전하고 건강하게 되기보다 욕망과 탐닉으로 일정한 대상에 더 빠져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일각에서는 사람들의 왜곡된 의식과 마음을 인문학적 본바탕으로 극복하도록 힘을 주려고도 한다.

하지만 왜 인문학인가? 인문학은 인간의 물질적 지평에 외형을 치장해 주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도리어 인문학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성숙시키며 자신뿐만 아니라, 세계를 보다 올바르고 정확하게 바라보며 타자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삶과 관계의 정신적 무늬를 늘 새롭게 형성시켜주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 들어 고전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고전은 구태의연한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삶의 역사, 사랑, 애환, 죽음, 정치, 사회 등을 아우르는 축적된 정신의 보고(寶庫)이다. 

물론 거기에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라는 처세술 내지 자기 계발과 같은 내용도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고전을 그러한 도구로만 이용한다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고전은 인간 자신의 제2의 차축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자기 다짐으로 읽어야 한다. 고전의 자기 내면화, 자기 인격화, 자기 정신화가 되지 않으면 고전은 학생에게는 논술의 수단이요, 직장인에게는 처세술과 자기 계발의 수단이요, 사업가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인류는 제2의 차축시대를 열어야 한다. 정신의 나약함과 물질의 힘에 인간 삶의 본질이 함몰되어 점점이 흩어진 의식을 쓸어 담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정신을 각성시키는 위대한 선각자는 초월의 언어로 사람들을 계도했었고, 사람들은 그 말로 자신의 양식(bon sens, 良識)으로 삼으면서 삶을 곧추세웠다. 과거 차축시대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영혼을 한데 모으는 일이 가능했었는데, 이제는 물질의 끝에서 나풀거리는 깃발 모양 보일락 말락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초월의 언어를 발하는 선구자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자본에 묻혀 버린 언어가 더 이상 어느 누구에게도 고개를 내밀지 못하는 억압의 사슬이 되어 각(覺)의 가능성을 가진 사람조차도 일깨우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 어느 탓이든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 자신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흐릿하게 숫자로 각인된 휴지 조각을 끌어안고, 그것을 전부로 인식하는 것도 인간이거니와 말의 과잉과 부족을 퍼뜨릴 수 있는 것도 인간이기에 말이다. 항상 진정성이 있는 말은 빛이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깨인 정신을 갖게 한다. 성서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한 처음에 로고스(말)가 있었다고.

처음의 말은 꺼내기가 두려울 정도로 거룩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 압도되어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걷히고 조금 때가 묻은 익숙한 언어가 될 때 자신의 입에 올리기 시작한다. 조금씩 그 말을 일상화시키면서 때로는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의미가 확장되는 말은 그 말이 최초의 언어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인구에 회자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처음의 말이었다.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처음처럼 만들어주는 말을 만나야 한다.

그 말을 전해 주는 사람이 지금 없다면 지나간 사람을 만나면 될 일이다. 다행이 지난 사람이 자신의 언어가 다 사라지기 전에 또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으로 새기게 하였으니 그것을 우리는 고전(古典)이라고 한다. 그 옛날 중국에도 초월의 언어를 깨닫고 낱말과 낱말, 의미와 의미를 꿰어 주는 공자(孔子)라는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모아 놓은 책을 『논어』라 이름 하였다.

지금 그 말이 깨어나려고 한다. 침묵하던 말을 소리 내도록 앞세운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이 언어가 일상화되는 순간 그 언어를 소유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옛 성현의 말은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새로운 차축시대의 일원이 되기 위한 자양분 습득의 원천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물질에 경도된 세계의 혼미한 정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사물을 깊고 날카롭게 꿰뚫는 차축의 인간 혹은 차축의 시대를 선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공자의 글을 통해서 현실과 야합하는 고루한 사상의 중력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김대식 박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타임즈코리아 편집자문위원. 저서로는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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