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5(월)

지역정보
homeHome  >  지역정보  >  경기지역뉴스

실시간 기사

  • 월광사 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에 써진 ‘직산(樴山)’과 화성시 마도면 백곡리 우리말 지명 ‘입피골’에 대한 고찰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정찬모      월광사 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   이 탑비는 진성여왕 4년(890) 9월 15일에 세웠다. 이 탑비의 주인공은 원랑선사 대통(大通, 816∼883년)으로 성주산문 초조인 낭혜(朗慧) 화상 무염(無染, 800∼888년)의 제자이다. 다만 스승보다 5년 먼저 사망하여 스승의 비석보다 앞서 세워진 것이다. 이 <월광사 원랑선사대보광선탑비>는 충북 제천군 한수면(寒水面) 송계리(松界里) 월광사(月光寺) 터에 있었던 것을 1922년에 일제가 경복궁으로 옮겨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보물 제260호인 이 탑비는 886년에 세워진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양식과 884년에 세워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양식을 계승, 절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탑비의 비문을 지은 사람은 헌강왕 10년(884)에 세워진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를 썼던 김영(金穎)이다. 보조선사 체징(體澄, 804∼880년)이 돌아가고 나서 헌강왕 9년(883) 3월 15일에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짓기 시작하여 그 해에 이를 끝마쳤던 듯, 비석은 그 다음해(884) 9월 19일에 세워진다.   이때 그의 벼슬은 조청랑수변부사마사비어대(朝淸郞守邊府司馬賜緋魚袋)였다. 6년이 지난 뒤인 진성여왕 4년(890) 9월 15일에 세워지는 <원랑선사 대보광선탑비(圓朗禪師大寶光禪塔碑)>에서는 조청랑수금성군태수(守金城郡太守)사비어대로 벼슬이 올라 있다. 조청랑과 사비어대는 당나라와 관계있는 벼슬이니 변동이 없고 수변부사마에서 금성군태수로 바뀌었으니 그 동안에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탑비의 비문에 써진 원효대사 득도처에 대한 지명과 4자 결락부분) □□□□□□□忘年請交廻席相事時也師兄慈忍禪師自唐歸國師時造謁忍禪師察其雅懷知非所敎乃設馬鞭之義激揚龍象之心師卽潛□憤悱欲扣玄微爰抵樴山寓」 □□□□乃神僧元曉成道之所也習定三月後依廣宗大師大師見知令惣寺務師不獲已因而蒞焉未幾功就曰吾當捨去以大中丙子歲投入唐賀正」 자인 선사는 선사의 품은 뜻을 살펴보고 자신이 가르칠 수 없음을 알자 이에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 격려하여 용과 코끼리와 같은 마음을 내도록 자극하였다. 이에 선사는 곧 꼭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조용히 간직하고 그윽하고 미묘한 이치를 공부하고자 하여 직산(樴山)에 이르러 ……(4자 결락)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은 신승(神僧)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도를 깨치신 곳이었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29
  • 땅이름의 뿌리로 본 당성(黨城, 唐城) 과 당항성(黨項城, 棠項城)
    화성지역학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한국땅이름학회 이사 정찬모     당항성(黨項城)은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당성(黨城,唐城)이라고도 한다. 둘레 1,200m로, 1971년에 사적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형태는 테뫼형(山頂式)과 포곡형(包谷形)을 결합한 복합식으로, 현재 동문ㆍ남문ㆍ북문의 터와 우물터, 건물지가 남아 있다. 원래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인데, 한때 고구려가 점령하여 당성군이라는 지명을 붙였다.   신라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에, 백제의 영향을 받아 복합형 산성으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항성이 있는 지역은 지금은 화성시이지만 신라 경덕왕 때는 당은군(唐恩郡)이었다. 이곳은 신라가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통했던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원효와 의상 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날 때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거쳐 갔던 길이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당항성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7월에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 서쪽 40여성을 쳐서 빼앗았다. 8월에 또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여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당나라와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였으므로 사신을 보내 (당)태종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11년 기사)   “(643년)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왕은 고구려와 화친하고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조공하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발동하여 공격하니 신라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3년 기사)   <고려사절요> 태조신성대왕(太祖神聖大王) 원년(元年918)의 기록에는 당시 당성(唐城)이 존재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궁예가 그 말에 따라 태조에게 발어참성(渤禦槧城)을 쌓게 하고, 이어 성주로 삼으니 이때 태조의 나이 20세였다. 그 후에 광주(廣州), 충주(忠州), 당성(唐城), 괴양(槐壤), 청주(靑州) 등의 고을 쳐서 이를 평정하니, 그 공으로 아찬(阿湌)을 임명 받았다. 관련해서 가장 주목되어온 자료로는 이색(李穡;1328-1396)의 남양부망해루기(南陽府望海樓記)에 “남양부는 삼국시대에는 당성군이라 이름 하였고 고려에 들어와 중세이후에는 익주로 되었다”고 쓰여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자료인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남양도호부(南陽都護府)”조에 의하면   ㅇ ‘본래 고구려의 당성현(唐城縣)인데, 신라가 당은군(唐恩郡)으로 고쳤고, 고려가 옛 이름(唐城)으로 복구하여, 현종(顯宗) 무오에 수주(水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인주(仁州)에 옮겨 붙였으며, 명종(明宗)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16년 경인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우승(征東行省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되고, 뒤에 또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34년 무신에 또 익주목(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2년 경술에 모든 목(牧)을 없앰에 따라 남양부(南陽府)로 강등되어,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13년 계사에 사례에 따라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세종실록지리지 경기 남양도호부)   ㅇ ‘본래 고구려 당성군(唐城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唐恩)으로 고치었다가, 고려 초년에 예전 이름을 회복하였고, 현종(顯宗) 9년에 수주(水州)에 속했다가 뒤에 옮겨 인주(仁州)에 붙이었고, 명종(明宗)이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홍다구(洪茶丘)가 원(元) 나라에 벼슬하여 정동행성 우승(右丞)이 되었으므로 지익주사(知益州事)로 승격하고, 뒤에 승격하여 강녕도호부(江寧都護府)로 만들고, 또 승격하여 익주목(益州牧)으로 만들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여러 목(牧)을 없앨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강등하여 부를 만들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남양도호부)     언어학자 서정범은 1990년 3월에 있었던 ‘마리산 이름 되찾기 국민대회’에서 ‘마리와 머리의 어원적 고찰’이란 제목의 강연을 한 바 있는데, 여기서 그는 ‘달’(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리산(智異山)의 옛 이름은 두류산(頭流山)이라 하였다. ‘두류’의 어근은 ‘둘’인데, 이 ‘둘’이 옛말에서는 ‘머리’의 뜻을 지니고 있다. 족두리의 ‘두리’도 머리의 뜻을 지니는 말이며 어린이를 어를 때 ‘도리도리’ 하는데, ‘도리’의 어근은 ‘돌’로서 옛말에서 머리의 뜻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가리’, ‘대머리’라고 할 때 ‘대’도 옛말에서는 머리의 뜻을 지닌 말이다. ‘대’는 ‘다이’가 줄어진 말로서, ‘대’의 옛말은 ‘달’에서 ‘다리>다이>대’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산 중에서 으뜸이 되는 머리의 뜻을 지닌 말로 산 이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하겠다.   몽고어에서는 머리를 톨로가이(thologai)라고 하는데 어근인 톨(tol)은 돌(tol)로 소급된다. 국어의 ‘달’, ‘둘’과 동근어이며 한자어 ‘두(頭)’도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수원에 팔달산(八達山)이 있는데, ‘팔’의 옛말은 ‘발’이다. 이 ‘발’은 머리의 뜻을 지니는 말로써 풀이해 볼 수 있다. 달(達)은 옛말로서 산(山)의 뜻을 지닌다. 그렇게 보면 ‘팔달산’은 두산(頭山)의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다. 대구의 달성(達城)도 ‘달’을 머리의 뜻으로 풀이 한다면 두성(頭城)의 뜻으로 풀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말은 대개 폐음절에서 개음절로 변하였다. 따라서 산(山)의 뜻인 ‘달’은 ‘닫'이 그 뿌리 일 수 있다. 이 '닫’은 지금의 땅이름에도 산(山)의 뜻으로 들어가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닫'이 그음 그대로 남은 것은 극히 드물고, 연결 음절과의 관계나 다른 낱말과 유사성으로 인해 변한 ’닷‘, ’닥‘, ’닭‘ 등으로 옮겨간 것이 대부분이다. 또, 개음절로 변한 ’달‘ 역시 ’다라‘, ’다래‘ 등의 음으로 옮겨가 많은 관련 지명들을 이루게 했다.   ‘닥’, ‘닭’ 등은 ㄴ,ㅁ을 초성으로 하는 음절의 말이 뒤에 따라올 경우는 ‘당’으로 되어 ‘당말’, ‘당모루‘, ’당내‘ 등의 땅이름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산골’의 뜻인 ‘닫골’은 발음 관계상 ‘닥골’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충북 청원군의 저곡리(楮谷里 )는 구녀성(九女城)이 있는 구녀산(九女山) 밑의 마을인데, ‘산마을(山村)’의 뜻으로 원래 ’닫골‘로 불리던 곳이었다. 이 닫골이 변하여 ’닥골‘이 되더니 마을에 닥나무가 많아 이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로 옮겨지면서 ’닥나무 저(楮)자를 붙인 저곡(楮谷)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닥골’, 닥실‘, ’닥말’등은 ‘닥’이 자음동화로 ‘당말’로 된 경우가 많다. 경남 진양군 대평면의 당촌리(堂村里)도 원래는 ‘닥말’이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의 저두리, 전남 신안군 지도읍의 ‘닥몰’도 ‘당’으로 바뀌어 쓰여 지고 있다.   다음은 당항성(黨項城)의 목(項)에 대한 지명과 풍수적 분류에 따른 연관성으로 용(간용-看龍)에 관한 지명으로 목(項)과 재(領)가 있으며 ‘목(項)’의 지형은 일반적으로 산줄기는 기(起)와 복(伏)을 반복하면서 나아간다. 산의 봉우리를 이루는 곳이 기(起)부분이고, ‘기’와 ‘기’ 사이 부분이 복(伏)이 된다. 풍수에서는 ‘복(伏)‘ 부분을 과협(過峽)이라 한다.   과협(過峽)은 산의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주는 고개로 산줄기의 굵기가 상하좌우로 줄어든 부분이다. 산이 기(起)를 하면 산줄기를 나누게 되고, 자연히 복(伏)부분 양쪽으로 계곡이 형성된다. 산줄기가 복(伏)하는 지명 ‘목(項)’으로 나타난다. 한자의 항(項)은 생물의 몸통과 머리를 잇는 ‘목’, 특히 목 뒷부분을 지칭한다. 이는 산의 능선이 주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고개 지형이나 하도가 급히 좁아진 부분을 가리킨다.   목 지형 중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 대표적인 지명이 장항(獐項-노루목)이다. 장항이라는 곳은 ‘느리목’이라 하여 구부러지고 기다란 하안(河岸)을 뜻한다. 이외에도 ‘개목’, ‘목쟁이’, ‘그물목’, ‘토끼목’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인 지역은 이충무공의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전남 해남군의 울돌목(鬱突項), 경북 포항(浦項), 충남 장항(長項), 홍성군의 구항(龜項)면 등이 있다.   전술 한바와 같이 풍수에서는 과협의 역할을 용이 살기를 털어 버리고 생기를 순수하게 걸러서 힘(地氣)을 한곳에 모아 혈의 형성을 도우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과협이 진혈(眞穴)을 판단하는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여기는 차원에서 지명에 사용하였다.   지명에 ‘~목(項)’이 붙는 주요 지형은 어떤 경우인가. 전술한 ‘목’은 군사용어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는 ‘통로의 다른 곳을 빠져 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나타낸다. 그래서 대침투 작전 및 방어 측면에서 적이 반드시 기동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목‘ 진지를 편성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목’은 군사적인 가치로 중요하다 하겠다.   상기에 열거 한바와 같이 당성(黨城, 唐城)과 당항성(黨項城)의 “당”은 우리말의 ‘산’의 뜻인 ‘닫’이 변한 걸로 보이며 또한 ‘성(城)’도 벼랑의 뜻인 ‘재’에서 온 걸로 추정된다. 그 예로 안성(安城)이 우리토속어로 ‘얕재’라고 불리어 온 것과 같은 이유로서 산성이나 구릉 있는 산을 일컫는 지명으로 보인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27
  •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의 새로운 주민자치센터 '새솔동' 이야기(5)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유포리 :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 앞에 ‘개(浦)’가 있고 버들이 무성하므로 버들개, 버들무지, 유포라고 하였다.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미지곶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유지동과 대장골을 병합하여 유포리라 해서 수원군 비봉면에 편입되었다. 유포리 당산   유포리의 마을신앙으로는 유포1리 당곡말 당제와 유포2리 버들무지 도당굿과 우물고사가 전하고 있다. 당곡말에서는 해마다 음력 11월 3일에 당제를 지낸다. 예전에는 해마다 좋은 날을 잡아 지냈는데, 하도 가리니까 남양 일대의 지주였던 한산 이씨 집안에서 동짓달 초사흘에 지내자고 제안하여 음력 11월 3일로 정착되었다.   당제를 지내기 전 사흘 동안은 마을에 부정이 없어야 한다. 혹 부정한 일이 생기면 그 해에는 제사를 안 지내고 넘어갔다. 예전에는 통돼지를 잡고 편(시루떡), 3색(밤·대추·감), 술 등을 제수로 올렸으나, 지금은 통돼지 돼지머리만 올린다. 술은 직접 담근 조라술을 쓴다. 당제 때는 집안에 우환이나 상, 임신한 여자 등 부정이 없는 정결한 사람 세 명을 뽑아 당주, 소염(소임), 제관을 시켰다.   당주는 조라술을 담그는 등 제수를 마련하는 역할을, 소염은 통돼지를 잡아 깨끗이 씻는 역할을, 제관은 제사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요즘에는 두 명씩 마을 사람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며 맡는다. 당주, 소염(소임), 제관으로 선택된 사람은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당제 시행 며칠 전부터 대문 앞에 황토를 깔고 인줄(새끼줄)과 솔잎을 걸어놓고 아무도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금기는 약 50년 전에 사라졌다. 유포리 현지조사 (유포리 이장)   유포2리 버들무지 마을은 생업인 어업과 관련하여 당제와 도당굿이 발달했다. 버들무지 당제는 도당굿, 뱃고사와 함께 행해졌다. 도당굿은 약 1950년대 무렵까지 해마다 음력 동짓달(11월) 10일 안에 정결한 날을 잡아서 3일 동안 행해졌다.   유포2리 버들무지의 우물고사는 약 30년 전까지 음력 7월 초이튿날 새벽 5시쯤 우물고사를 지냈다. 우물고사 때는 무당을 부르지 않고 책 보는 사람을 찾아가 생기복덕을 보고 당주와 소임을 선출하여 그들이 대동 우물에 가서 고사를 올렸다. 당주집에는 금줄을 치고, 대문 양측으로 위에는 청솔을 매달고 아래에는 황토 흙을 떠 놓았다.   제물을 소 한 마리를 잡아 소머리와 정육(날 것), 등심(구운 것), 소적 등으로 만들어 올리고, 과일 등을 함께 차렸다고 한다. 당주는 마을이 안정되게 해달라고 빌며, 세 번 절을 하고 대동으로 소지를 올렸다. 분육한 소고기는 날것으로 개인 집 대청에 놓고 고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유포1리의 마을조직으로는 사람이 죽었을 때를 대비한 상계, 유포1리 모든 마을 활동의 중심축인 사촌계, 병 들어 거동하지 못하는 마을의 노인들에게 다니는 문병 등 노인복지를 위한 노인회, 마을의 다양한 행사를 맡은 부녀회, 외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뿐만 아니라 마을 체육 대회, 마을 일손 돕기 등의 다양한 행사를 주관해 오고 있는 향우회, 이장의 노고를 격려하고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잔치인 대동회 등이 있다.   유포2리의 마을조직으로는 어촌 지역으로 어로와 채취 활동에 관한 조직인 어촌계, 시화호가 막히기 전 여자들끼리 갯일을 하여 수입을 올리면서 조직한 반지계나 쌀계, 집안에 상이 나거나 혼사가 있을 때마다 횟수와 관계없이 태워주는 혼상계, 버들무지 마을 농사를 짓기 시작한 2~3년간 존재하였던 두레, 마을 어르신들의 휴식과 복지를 위한 노인회 등이 있다.   유포리에 전승되고 있는 구비문학으로는 설화로 ‘거지에게 대접을 잘한 천석꾼 이필구’, ‘유포리의 유래’, ‘말굽이 붙게 한 유포리 당신’, ‘대장골의 유래’라는 지역적 전설들이 전승되고 있다., 민요로는 어업과 관련된 ‘배치기 소리 (1)’, ‘뱃노래’, ‘배치기 소리 (2)’, ‘배치기 소리 (3)’등이 전승되고 있어 어업이 성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버들무지 남쪽에 있는 길게 늘어진 마을의 이름인 ‘대장골(大將谷-대장곡), 일명 느르실. 노루골’ 등이 있고, ‘버드실’은 ‘벌’ 마을의 뜻으로 ‘버드내’와 비슷한 땅이름인 ‘유지동(柳支洞)’ 있으며, ‘크다’는 뜻이 옮아간 이름인 ‘함박골(芍藥-작약)’이 있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22
  •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의 새로운 주민자치센터 '새솔동' 이야기(4)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장전리는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노루(獐)처럼 생겼으므로 ‘장전, 장전굴, 장전리’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이곳은 바닷물이 드나드는 나루터이므로 ‘루’에서 온 말일 수도 있다. ‘루’를 한자어로 표기하면서 ‘노루’로 읽고 노루 ‘장:獐’으로 표기한 사례가 많다. 장전리는 1895년(고종32) 지방 관제 개편에 의하여 남양군 화척 지방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동이터, 정자동, 무덤실을 병합하여 장전리라고 해서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기존 자료에 의하면 정자동(亭子洞)은 정자말이라고도 하는데, 장전리의 동남쪽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송(盤松, 畔松)은 예부터 밭둑에 소나무를 많이 심어 바다와 하천의 제방이 터질 때 수살막이를 했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다. 그리고 무덤실은 해변 마을로 산림이 우거져 야생조수가 많았으며 한량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무단실동(武團室洞)이란 한량들이 모이던 집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밖에 동이터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장전리의 마을신앙으로는 산제사(당제)와 우물제사, 기우제 등이 존재하였다. 산제사는 음력 7월 7일을 전후하여 소나무 일곱 그루가 있는 서낭에 올리는 제사였다. 돼지를 잡고 제수를 준비하여 서낭 앞에서 마을의 대동놀이를 함께 펼쳤다고 한다. 산제사는 중단된 지 20년이 넘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당주와 제관, 축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여자들을 금하였다고 한다. 제의 시간은 놀이의 형식이기 때문에 낮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서낭에서는 기우제를 올렸다. 그런데 기우제는 주기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이 없었다. 즉, 비가 부족하지 않기를 바라는 제사가 아니라, 가뭄이 들었을 때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물 제사는 칠월칠석날에 마을 주민들이 돈을 추렴하여 제수를 장만하고, 우물을 청소하면서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장전리에는 ‘상골’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상골 밭 혹은 상골 구덩이라는 것은 상골이 많이 나온다는 의미로 상골은 뼈와 관련된 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단지 채취하여 복용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서낭에 동전과 함께 올리면서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다고도 한다. 이것은 매우 특기할만한 자료이다.   장전리의 민간신앙은 단골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하고, 성주대를 대나무로 하였다는 정도의 자료가 조사되었다. 그리고 어떤 악기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큰무당과 작은 무당을 구분하는 지표가 되었음도 확인하였다. 특히나 막대기를 가지고 긁어가면서 정성을 드렸다는 것이 특별한 자료라고 판단한다.   장전리에서는 삼, 두드러기, 하루거리를 비롯해 뼈를 다쳤을 때의 민간치료법이 조사되었다. 삼은 억새와 비슷한 쇠꼬챙이라는 풀로 삼이 선 눈에 찌르는 시늉을 하여 잡았다고 한다. 즉 쇠꼬챙이로 찌르는 시늉을 하면서 ‘삼 좀 없어지게 해주십시오. 눈 좀 깨끗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원한다. 그리고 하루거리는 어둑한 가시덤불에 데리고 가서 놀래주는 것으로 치료했다. 이 장소는 며느리 보금에 걸렸을 때 기원을 하는 장소라는 점에서 다른 지역과의 차이를 보인다.   장전리의 설화 자료는 ‘장전리의 지명 유래’ 1편이 조사되었다.   마을이 작은 산동네를 지칭 한 ‘반송동(盤松洞)’ 아름다리 소나무가 다섯 개가 서 있어 ‘오성종’, 큰 나무가 멋있는 아름다리 나무가 다닥다닥 서 있어 ‘무덤실, 무단실동(武團室洞)’ 장전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정자말(정자동)’, ‘돌마을’ 이란 뜻의 ‘독말’에서 유래된 ‘동막골’, 거룩하다, 크다의 뜻에서 유래된 ‘가마실골’, 배를 만들거나 배에서 짐을 내리는 곳이라 붙여진 ‘선재들’, ‘느리여울’인 눌어탄(訥魚灘)에서 연유된 ‘노라태골’, 산이 이어졌다는 뜻의 ‘늠지’, ‘늠재’ 등에서 온 ‘능어리골’, ‘해곡(海谷)’이 변한 말인 ‘해골’, 비탈길이나 큰길에 붙인 ‘덕노골’, 봉황은 고양이(猫)를 싫어한다고 해서 멀리 떨어진 곳의 붙인 ‘묘고지’, 노루 형국으로 생겼다고 해가지고 노루 장자를 붙여 지은 ‘장전리’ 등이 있다.   장전리는 청원 함씨들이 최초로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로는 김씨, 유씨, 강씨, 배씨 등이 들어와 각 성 받이 마을이 된 것으로 보인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21
  •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의 새로운 주민자치센터 '새솔동' 이야기(3)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지명유래에 조사는 이곳의 마을명, 도로명 및 시설명을 창안하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신외리 현지조사 중인 정찬모 소장(오른쪽)   이곳의 지명에 관한 것은 설화와 관련된 ‘봉선대산(鳳仙臺山)’ 비롯하여, 신외리 서쪽의 바다 갯벌에 접했던 골짜기 마을로 등계(䳾鷄:뜸북이) 많아 붙여진 지명인 ‘둥계골’, 중동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내동(內洞). 안 동네’, 땅이 몹시 질어 붙여진 이름인 ‘구리골. 구리개’, 대개 땅 이름에서 반도형으로 생긴 갑(岬)을 이르는 말로 곶의 안쪽을 일컫는 곶안-고잔(古棧), 바닷물을 막아 농지를 만든 ‘방죽들. 방축리(防築里). 방죽머리’. 방죽들과 여우골 사이의 마을로 강의 흐름 가운데 물살이 빠르고 센 곳에 붙인 ‘강여울골’, 내동 방향의 산 아랫마을로 여우가 살았던 마을이라서 붙여진 ‘여우골’, 동이를 만들었던 곳이어서 불린 ‘동이 터’, 위에 있는 마을이라 ‘웃말’, 봉선대 아랫마을로 바다 쪽으로 돌출된 곳에 붙여진 지명인 ‘화수개’, 창문초등학교 뒤에 높은 산인 ‘박산’, 당이 있는 데서 건너다보이는 높은 산인 ‘구럽산’, 가래추 큰 게 있다는 ‘가래울’, 전에 거기 술집이 있었다고 붙여진 ‘사창’, 인천으로 붙었다가 남양으로 되었다고 붙여진 ‘남양 인천’, 떠밀려 온 섬이라고 붙여진 ‘저울이섬’, 2리에 당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당너머’, 산의 형상이 모양이 범의 모양이라 붙여진 ‘범머리’, 쥐불놀이나 달맞이를 할 때 확 터졌다고 해서 ‘활딱지’ 등이 있다. 신외리의 입향조는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왔을 개연성이 높다. 왜냐하면, 외동이나 내동, 고잔 등에서 오래된 성씨들이 대개 13대 이거나 14대라고 하며 각각의 성씨들이 공히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왔을 것이라 제보하고 있다. 1리인 외동은 밀양 박씨, 2리인 내동과 고잔은 평산 신씨와 경주 최씨가 각기 터전을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뭍에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크고 작은 수로들이 있었고 그곳에 조그만 포구가 있었다. 이 수로를 통해 고깃배가 드나들었는데, 수로마다 고유한 이름이 있어서 어부들은 구분해서 불렀다. 고유어로 지어진 이름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포구나 물길의 지형적 특징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20
  •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의 새로운 주민자치센터 '새솔동' 이야기(2)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신외리의 어업은 인원수가 각기 다른 조별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으로 뱃고사를 지내는 형식과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보통은 서낭에 가서 떡을 해 다 놓고 풍어를 기원한다. 그렇지만 멀리 배를 타고 나가거니 그 인원이 많으면 돼지를 잡고 떡을 하며 큰 규모의 뱃고사를 지냈다. 이때는 징, 꽹과리가 동원되며 두레의 기와 같은 농기(뱃기)를 앞세우고 어로에 나선다. 터 주가리   그리고 만선을 하면 멀리서부터 꽹과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마을에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터주를 모시고 제석, 대감, 성주 신앙이 있었으며, 목살을 풀고 뜬 거, 탓 등을 풀어냈으며 정월고사, 홍수막이, 칠석고사 등을 지냈다. 단골은 집마다 차이가 있다. 인천의 무당들이 단골로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민간요법에는 삼, 하루거리, 두드러기, 홍역, 마마, 푸닥거리 등이 조사되었다. 삼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 조사되었으나, 고잔에서 (생선)을 젓가락으로 찔러다가 청수 그릇 위에 놓고 ‘내 병 떨어졌다’ 하고는 팥을 청수에 떨어뜨려서 잡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홍역의 경우는 바람을 쐬지 않게 하면서 보리 물만 뜨겁게 하여 먹였다. 또 마마의 경우는 ‘손님서낭당 밑에 있는 수문 할머니, 손님 할머니’ 하면서 장독에 청수를 떠 놓고 빌었다고 한다. 서낭당 밑에 있는 수문   손님을 마마라 이르는 것은 높여 부르는 것으로, 퇴치 대상의 격을 높여줌으로써 물리치는 주술적 방법의 하나이다. 또한 푸닥거리의 경우 칼을 던져서 칼끝이 밖을 향하면 잘 풀린 것으로 믿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잔에서는 칼을 마당 끝에서 꽂았다고 한다. 봉선대에 있는 정자   신외리에서는 마을의 신목인 서낭과 관련된 설화를 조사하였다. ‘서낭이 노해서 죽은 아이’. ‘당나무를 자르고 망한 천석 부자’, ‘말굽이 붙는 서낭’ 등인데, 이들은 모두 서낭나무인 신목이 영험함을 증명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중을 넣고 쌓았다는 방죽의 이야기인 ‘중을 넣고 쌓은 방죽(승방죽)’, 그리고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었다고 하거나 봉선이라는 여자와 연관되어 전하는 ‘봉선대 전설’, 용이 우물 안에 들어 있어서 물이 잘 났다고 전하는 ‘용이 물을 내는 용해우물’의 이야기가 있다. 한편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광포설화도 채록이 되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비롯하여 ‘지렁이를 밴 여자’,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뱀이 용이 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 전하는 민요로는 바닷가였기에 어업 민요가 ‘뱃고사 소리’, ‘뱃소리’ 2편이 채록되어 있고, 농업노동요로 ‘밭매는 소리’, ‘농요’, ‘논맴 소리’, ‘어허야 상사디야’ 4편이, 기타 ‘베틀 노래’, ‘학질 쫓는 고사 소리’, ‘다리세기 노래’ 등이 조사되었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16
  • 화성시 송산그린시티의 새로운 주민자치센터 '새솔동' 이야기(1)
    화성지역학연구소장  정찬모   ▶새솔동의 민속 문화적 배경 송산 그린시티 동쪽 지구 마을 및 시설 명칭 부여를 위한 학술 용역을 2017년 1월 20일 수자원공사와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가 계약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김용덕 박사, 김정수 박사, 강현모 박사, 정찬모 향토사학자가 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새로운 동명인 새솔동이 확정되었다.   현재의 새솔동 지역은 시화방조제가 완공된 후 바다의 갯벌을 매립한 지역이다. 새솔동의 지명은 순수한 우리말에서 동쪽을 의미하는 “새”를 사용하였는데 이 “새”는 처음이라는 의미도 있다. “솔”은 소나무를 나타내는 우리말로써 송산의 동쪽과 ‘새로운 송산’이라는 이미지를 나타내고자 제정하였다.   새솔동 지역에 있는 신외리, 장전동, 유포리의 땅이름의 뿌리와 구비문학, 보존하고자 하는 민속신앙과 문화적 배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 신외리 예부터 포구를 이룬 마을로서 구한말에는 지형이 인천과 닮았다 하여 남양인천(南陽仁川)으로 불렸다. 그 후에 인천항이 발전함에 따라 ‘신외리’로 부르게 되었다. 본래 인천부 이포면의 지역으로서,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남양군 화척지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고잔, 화수개, 내동, 중동, 외동을 병합하여 신외리이라 하여 수원군 음덕면에 편입되었다.   신외리 길가에 선 장승들    기존 자료에 의하면 신외리에는 곶의 지형인 ‘곶안-고잔’이 있고, 안동네로 불리는 ‘내동(內洞)’과 바깥 동네로 불리는 ‘외동(外洞)’, ‘신외리’의 복판에 있는 ‘중동(中洞)’과 ‘화수개’라는 마을이 있다.   ‘신외리’는 ‘외동’과 ‘내동’ 모두 ‘터줏가리’를 당으로 모시고 마을신앙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신외 1리’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도당굿의 형태로 마을 공동제의를 올리고 있다. 굿을 큰 제사라고 한다면 유교식 제의는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데 ‘신외 1리’는 그 규모가 오히려 커진 상황에 해당한다. 본래부터 도당굿의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외 1리’에서 신목으로 모시는 느티나무는 일제강점기 때인 소화 12년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지정목으로 관리가 되었다. 당시에 사기 팻말을 해두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제의는 10월 상달에 행해지나, 최근 몇 년간은 중단되고 있다.   신외리 당산나무와 터줏가리    ‘신외 2리’에도 1리보다 그 크기가 좀 작으나 터줏가리 형태의 당이 있다. 이 마을의 신목은 소나무였으나, 본래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시지 않았을 개연성도 높다. 어른들의 기억으로는 이곳에 무당들이 들어와 당굿을 행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시화호가 막히기 전에 인천과 더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 그리고 주민들이 바다 일과 관련된 일들을 생업으로 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규모와 형식이든 무속에 의존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신외 2리’에서는 우물 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중단된 지는 20년 정도라는데, 제수 비용은 마을 주민들이 추렴하여 마련하고, 돼지를 희생으로 샘물이 잘 나게 해달라고 제의를 드렸다고 한다.   신외리의 어업은 인원수가 각기 다른 조별로 이루어졌다. 그런 까닭으로 뱃고사를 지내는 형식과 규모에서도 차이가 있다. 보통은 서낭에 가서 떡을 해 다 놓고 풍어를 기원한다. 그렇지만 멀리 배를 타고 나가거나 그 인원이 많으면 돼지를 잡고 떡을 하며 큰 규모의 뱃고사를 지냈다. 이때는 징, 꽹과리가 동원되며 두레의 기와 같은 농기(뱃기)를 앞세우고 어로에 나선다. 그리고 만선을 하면 멀리서부터 꽹과리와 징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마을에는 여느 마을과 다름없이 터주를 모시고 제석, 대감, 성주 신앙이 있었으며, 목살을 풀고 뜬 거, 탓 등을 풀어냈으며 정월 고사, 홍수 막이, 칠석고사 등을 지냈다. 단골은 집마다 차이가 있다. 인천의 무당들이 단골로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민간요법에는 삼, 하루거리, 두드러기, 홍역, 마마, 푸닥거리 등이 조사되었다. 삼을 잡는 방법은 여러 가지 조사되었으나, 고잔에서 생선을 젓가락으로 찔러다가 청수 그릇 위에 놓고 ‘내 병 떨어졌다.’ 하고는 팥을 청수에 떨어뜨려서 잡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홍역의 경우는 바람을 쐬지 않게 하면서 보리 물만 뜨겁게 하여 먹였다. 또 마마의 경우는 ‘손님 할머니, 손님 할머니’ 하면서 장독에 청수를 떠 놓고 빌었다고 한다. 손님을 마마라 이르는 것은 높여 부르는 것으로, 퇴치 대상의 격을 높여줌으로써 물리치는 주술적 방법의 하나이다. 또한 푸닥거리의 경우 칼을 던져서 칼끝이 밖을 향하면 잘 풀린 것으로 믿는 것이 일반적인데, 고잔에서는 칼을 마당 끝에서 꽂았다고 한다.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14
  • 화성시의 장터 모습
      사창 장시(요리장)장터 흔적     발안 장터     정남 괘랑리 장터 흔적     남양읍내 장터     사강 장터     구포장(비봉 장터) 흔적     조암 장터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11
  • 오산시 지명유래(10) - 청학동, 탑동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10. 청학동(靑鶴洞) · 학고개 · 학현 두루미(鶴)의 두루는 ‘드르 -> 들 -> 돌’ 로서 두루나 다리나 ‘돌’계통의 말이다. ‘곰’에서 변한 ‘곰’이 동물 이름이 아니듯이, 돌에서 변한 ‘두루’도 동물이 아니고 마을이나 땅, 산의 이름이다.‘불’에서 ‘붉다’가 ‘풀’에서 ‘푸르다’가 나왔으며 ‘푸른’ 지명은 ‘돌’에서 나온 지명이 많으며, 감투봉을 넘어가는 고개를 일컫는 지명으로 보이며 감투봉에서 오산천까지의 마을로 현재는 남촌동에 편입되어 있다.토박이 지명 감투봉 ; 청학동 산16-1청 학 ; “ 165가수골 ; ” 산33 11. 탑동(塔洞) ·탑마루 전설에 의하면 옛날 흙으로 만든 탑이 이곳에 있어 ‘탑동’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 크기를 알 수 없고 다만 큰 탑이 있었다는 곳의 이름이 ‘탑재’라고 전해오고 있다.ㅇ 돌모루 서동 저수지에서 내려온 물이 탑고을 근처에서 물이 도는데 이곳의 지명으로 전국에는 ‘돌모루’라는 이름의 마을이 무척 많은데 대개 이곳처럼 냇물이 돌아드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를 보아서 돌모루의 ‘돌’이 ‘돌다(回)’의 뜻으로 볼 수 있다.ㅇ 창곡(倉谷) ·창골 이곳은 옛 수원군 초평면 소재지가 서녁말에 있었을 당시 정부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토박이 지명 웃마골 ; 탑동 150-1타마루 ; “ 75-1타마루들 ; ” 33-1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10-06
  • 오산시 지명유래(9) - 지곶동
    정찬모 화성지역학연구소장 9.지곶동(紙串洞) ·조꼬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전에 이곳에는 종이를 뜨는 조지서(造紙署)가 있던 곳이라 해서 흔히 ‘조꼬지’불렀고, 한자로는 ‘지곶리(紙串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실제로 정조임금께서 용주사와 오산의 지곶동, 수원 연무동의 지소동에 제지공장을 만들게하고 종이를 생산하여 궁궐에 공급하게 하였다. ‘곶’이 들어간 땅이름은 우리나라 서해안에 무척 많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만 70여 곳의 곶(串) 지명이 해안 지방에서 나타난다. 이 지명들은 서 · 남해안에 많았고 특히 서해안에 가득 했으며, 화성 지역에만 28군데의 ‘곶’, ‘고지’의 지명이 있다. 그만큼 해안선이 복잡해 돌출 부분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곶’ 지명의 대부분은 한자로 곶(串(‘관’으로 읽기도 함)이나 화(花)자를 취했다. ‘곶’은 ‘꽃’의 옛말이기도 해서 한자로 꽃화(花)자가 취해진 것이다. 배가 닿는 곳이거나 산기슭이 바닷가로 튀어 나간 곳이면 ‘배곶이’가 된다. 이 이름은 한자로 ‘이화(梨花)’가 되어서 화성시 우정면, 화성시 비봉면 삼화리 등에 있다. 또한 ‘산’의 옛말은 ‘달’이어서 산기슭이 들쪽으로 불쑥 튀어나간 곳은 ‘달고지(달곶이)’가 되었다. 이 달고지는 한자로 월곶(月串)이 되어서 강화군 강화읍, 충남 서산시 고남면 고남리, 전남 강진군 도암면 등에 있다. ‘곶’은 뒤에 ‘이’가 붙어 연철되면서 ‘고지’가 되었다.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의 고지리(古池里), 화성시 정남면의 고지리(古支里), 경북 영천시 북안면의 고지(庫指)등이 그것이다. ‘지’, ‘기’는 옛날에는 ‘재’의 의미로 쓰였으며, 삼국통일 후 ‘재’는 ‘성(城)’으로 바뀐 것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신라 경덕왕 당시의 지명 개칭 때에 ‘재’의 뜻이 들어간 땅이름은 거의 모두 성(城)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 지(支) > 성(城)궐지(闕支) > 궐성(闕城)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 (只) > 성(城)노사지(奴斯只) > 유성(儒城) (대전시 유성구)· 기(己) > 성(城)결기(結己) > 결성(潔城) (충남 홍성궁 결성면)열기(悅己) > 열성(悅城) (충남 청양군 정산면)‘지곶’은 ‘재’나 ‘성’의 형태가 앞을 흐르는 황구지천 쪽으로 뛰어 나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보이며 건너편에 화성시 정남면 ‘돌고지’의 지명도 존재한다. 독산성과 세마대가 있으며 현재는 세마동에 편입되어 있다.토박이 지명 석산골 ; 오산시 지곶동 516묘종골 ; “ 509양 골 ; ” 482-1소금안골 ; “ 67-2정림뒷골 ; ” 448-3배문리골 ; “ 563집팽골 ; ” 산51-6학봉 ; “ 산160조고지 ; ” 219-3조꼬리 ; “ 328-22갱변들 ; ” 387-18연지골 ; “ 369복림골 ; ” 403-1
    • 지역종합뉴스
    • 지역학
    2020-09-28
비밀번호 :